김포 산소의 묘호를 정할 것을 명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포(金浦)의 산소에도 당연히 묘호(墓號)가 있어야 할 듯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한대(漢代)의 고사에 따라 논의하여 정하게 하라."
하니, 예관이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고사를 널리 상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펴 보건대 ‘한 선제(漢宣帝)가 즉위한 후 조서를 내리기를 「고 황태자(皇太子)038) 를 호현(湖縣)에 장사하였지만 아직 시호(諡號)가 없고 세시(歲時) 때 제사도 없었다. 태자의 시호를 의정하고 원읍(園邑)을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예문에 의거하면 남에게 입양되어 간 이는 입양한 사람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자기의 본생 부모에 대하여는 강쇄(降殺)의 예가 적용되어 친히 제사를 모실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부를 존중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폐하는 효소 황제(孝昭皇帝)의 뒤를 이어 조종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고 황태자 묘위는 호현에 있고 사 양제(史良娣)039) 의 무덤은 박망원(博望苑) 북쪽에 있으며 아버지 사 황손(史皇孫)040) 묘위는 광명(廣明) 성곽 북쪽에 있다. 시법(諡法)에 의하면 시호란 그의 생전의 행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시호는 도황(悼皇), 어머니는 도후(悼后)로 하고 제후왕(諸侯王)의 원(園)에 준하여 3백 호(戶)의 봉읍(奉邑)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황태자의 시호는 여(戾)로 하여 봉읍 2백 호를 두고, 사 양제는 여부인(戾夫人)으로 하여 무덤지기 30 호를 두며 원(園)에는 장승(長承)을 두고 순찰하고 경비하기를 법대로 하게 하면 좋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호현 문향(閿鄕)의 야리취(邪里聚)를 여원(戾園)으로 하고, 장안(長安)의 백정(白亭) 동쪽을 여후원(戾后園), 광명(廣明)의 성향(成鄕)을 도원(悼園)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나 유사가 다시 아뢰기를 「예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이면 제사를 천자의 예로 모신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도원(悼園)에 대하여 당연히 존호(尊號)를 올려 황고(皇考)라고 하고 사당[廟]을 세울 것이며 묘원(墓園)을 침전(寢殿)으로 만들고 시절마다 제사를 올리는 한편 수호할 민가도 더 늘려 1천 6백 호가 되도록 하고 거기를 봉명현(奉明縣)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여부인은 높여 여후(戾后)로 하여 원(園)과 봉읍(奉邑)을 두고 여원과 여후원의 봉읍을 늘려, 각각 3백 호가 차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일단 한대의 고사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만, 양한(兩漢)041) 에 걸쳐 사친(私親)을 높이 받든 형제들이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환제(桓帝)·영제(靈帝) 같은 이들은 모두 자기 친생 고비(考妣)를 추존하여 황(皇) 또는 후(后)로 하였으므로 그들 장지(葬地) 역시 바로 능(陵)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예를 무시하고 제도에 어긋난 처사여서 성상께서도 매우 싫어하시어 그렇게 하시려고는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다만 선제(宣帝)는 능이라고 쓰지 않고 원으로 칭하였는데, 이 밖에는 달리 근거 삼을 만한 고사가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예조가 이것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였다. 좌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능이라는 글자를 이미 쓸 수가 없고 원이라는 글자 역시 근래에는 쓰이지 않던 것이니, 성상의 하교대로 묘(墓) 자 위에 별도의 명칭을 붙여 일반 묘와 구별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아뢰기를,
"김포 산소에 묘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예조에 내리신 전교를 삼가 받들고 이어 홍문관이 널리 고사를 상고한 끝에 아뢴 내용을 보건대, 홍문관이 고출한 것은 묘가 아니고 원에 관한 일이어서 성상이 하교하신 본의와는 어긋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널리 상고해 본다는 뜻에서 그 원(園)의 기원을 고찰해 보건대, 삼대(三代) 이전에는 묘제(墓祭)가 없었다가 진(秦) 대에 와서 비로서 묘 옆에 침전(寢殿)을 두었는데, 한(漢) 대에 진대의 제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모든 능에도 침전을 두어 생시에 기거하던 것과 똑같이 의복 등 모든 용구를 갖추어 두고 침원(寢園)이라 이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태상황(太上皇) 이하 고제(高帝)·혜제(惠帝)·문제(文帝)·경제(景帝) 등 대대로 있어 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원이란 바로 능을 달리 부르는 칭호인데, 옛 사람들의 문자상에도 원릉(園陵)이니 침원(寢園)이니 하여 천자 제후의 구별없이 써 온 것으로서 묘자와 능자의 사이에 별도의 원자를 두어 그것으로 위아래의 등급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이니 원이니 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원(戾園)·도원(悼園)도 능처럼 침전을 두어 세시(歲時)에 제향을 올린 것이 아니라 그들 침전이 있는 곳에 그들 시호인 여(戾)·도(悼) 두 글자를 합쳐 여원 또는 도원으로 불렀던 것이니, 수릉(壽陵)042) 이나 장릉(長陵)043) 처럼 특수한 칭호로 만든 것은 아닌 듯합니다. 대체로 원이라는 호칭은 한대에는 성행하다가 당(唐)·송(宋)으로 내려 올수록 점점 줄어들고 원(元)·명(明) 이후로는 더욱 보기가 드물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원으로 칭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묘를 원으로 고쳐 부르려고 한다면 처음으로 시작되는 일이라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주상의 하교대로 묘자 위에 색다른 명칭을 붙여 다른 묘와 차이가 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학(禮學)에는 원래 어두운 신으로서 절충을 취할 만한 소견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히 억설을 올리면서 주상의 재가가 있기를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한대의 고사에 의하도록 하교를 내렸었는데 대신들의 헌의(獻議)가 이와 같으니, 그들이 말한 ‘주상의 하교대로’라고 칭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단문(短文)한 소치로 말이 부실하여 사체에 손상을 입힌 일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나의 과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능과 원이 등급이 없지 않을텐데 저처럼 말하니 그 뜻도 나로서는 모르겠다."
하였다. 대신들이 이로 인하여 대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제(帝)와 왕(王) 두 칭호가 원래는 높낮이가 없었던 것인데 진대에 와서 그것을 구별하여 지금까지 준행하고 있다. 능과 원도 그것이 공통된 칭호라고 하나 한대와 송대에 구별을 둔 것이 어째 아무 뜻 없이 그러했겠는가. 더구나 원이라는 그 칭호가 원래 능명(陵名)처럼 참람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선제가 했던 대로 김포의 산소에 대해서도 무슨 원(園)이라고 칭하여 조금은 구별하는 뜻을 나타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예문관이 원의 호칭을 찬정(撰定)하였는데, 결국 육경(毓慶)으로 계하(啓下)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82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註 038]황태자(皇太子) : 무제(武帝)의 아들 여태자(戾太子)로서 선제의 조부.
- [註 039]
사 양제(史良娣) : 황태자의 부인.- [註 040]
사 황손(史皇孫) : 선제(宣帝)의 생부. 외가(外家) 성씨를 이어 사(史)로 하였음.- [註 041]
○上下敎曰: "金浦山所, 似當有墓號。 令禮官, 依漢故事議定。" 禮官請令儒臣, 博考故事。 於是, 弘文館啓曰: "臣等謹按, 漢 宣帝卽位, 下詔曰: ‘故皇太子在湖, 未有號ㆍ謚、歲時祀。 其議謚, 置園邑。’ 有司奏: ‘《禮》, 爲人後者, 爲之子, 故降其父母, 不得祭, 尊祖之義也。 陛下爲孝昭皇帝後, 承祖宗之祀, 故皇太子起位在湖; 史良娣塚, 在博望苑北, 親史皇孫位, 在廣明郭北。 謚法曰: 「謚者, 行之跡也。」 愚以爲, 親謚宜曰悼皇, 母曰悼后, 比諸侯王園, 置奉邑三百家。’ 故皇太子謚曰戾, 置奉邑二百家; 史良娣曰戾夫人, 置守塚三十家, 園置長丞周衛, 奉守如法。 以湖 閿鄕 邪里聚爲戾園, 長安 白亭東爲戾后園, 廣明 成鄕爲悼園。 後八歲, 有司復言: ‘《禮》, 父爲士, 子爲天子, 祭以天子。 悼園宜稱尊號曰皇考, 立廟, 因園爲寢, 以時薦享焉’, 益奉園民, 滿千六百家, 以爲奉明縣; 尊戾夫人曰戾后, 置園, 奉邑及益戾園民, 滿三百家。’ 臣等伏覩聖敎, 旣以漢故事爲言。 兩漢諸帝之崇奉私親者, 不止於此, 而桓、靈則皆追尊所生考妣爲皇、爲后。 故其葬地, 直稱曰陵, 此乃蔑禮、踰制之甚也。 聖明之所深惡, 而不欲爲此者, 唯宣帝避陵字不用, 而稱之以園。 此外無他故事可據, 敢啓。" 禮曹以此收議于大臣, 左議政尹昉以爲: "陵字旣不可用, 而園則亦非近代所用, 依上敎, 墓字上加以名稱而別之似當。" 右議政申欽以爲: "伏見下禮曹金浦山所, 似當有墓號事傳敎及見弘文館博考啓辭, 則所考出者, 非墓也, 園也, 似與敎意相左。 然旣爲博考矣, 就考園之所由起, 則三代以前, 無墓祭, 至秦始置寢殿於墓側。 漢因秦制, 諸陵皆有寢殿, 起居衣服, 如生時之具, 謂之寢園。 太上皇以下, 高、惠、文、景, 代各有之。 以此觀之, 園者, 陵之異名, 古人文字, 有園陵、寢園之語, 通天子、諸侯言之, 非墓之上、陵之下, 別着一園字, 爲隆殺之節, 而謂之陵, 謂之園也。 戾、悼二園, 亦非因陵設寢, 以時薦享, 爲其寢殿所在, 與其謚稱戾、悼二字, 合以謂之曰戾園、悼園, 似非特設殊稱, 如壽陵、長陵之謂也。 大抵園之稱, 盛於漢, 而唐、宋以下寢少, 元、明以後, 尤罕有之, 我東方絶無以園稱者。 今若欲改墓稱園, 則事係創始, 不可不審思而愼處之, 恐不若依上敎, 墓字上加以名稱, 以表著之之爲妥也。 臣素昧禮學, 安有折衷之見? 敢陳臆說, 伏惟上裁。" 上曰: "前者以依漢故事爲敎, 大臣如是獻議。 所謂依上敎之說, 予未解見矣。 因予文短, 致有言辭不實, 事體虧損之擧, 此豈非予過也? 且陵與園, 不無等級, 如彼云云, 亦未曉其意也。" 大臣以此待罪後, 上下敎曰: "帝、王二稱, 本無高下, 至秦區別, 迄今遵行。 陵與園, 雖曰通稱, 漢、宋酌定, 豈無其意, 而況園, 本非陵名之僭逼者乎? 依漢 宣帝故事, 金浦山所, 稱以某園, 以存稍別之意。" 於是, 藝文館撰定園號, 遂以毓慶啓下。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82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註 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