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판서 이정구가 상례의 부당함을 들어 사직을 청하다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이 변례(變禮)의 시기를 당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 오직 장례에 대한 일을 손색없이 치르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다만 늙고 병들고 정신이 어두워 어그러지고 틀린 일들이 많았기에 항상 두렵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명께서 애써 지정(至情)을 억제하시고 대신과 백관이 청한 대로 따르실 경우 거기에 관계되는 모든 절목이 당연히 그에 맞게 마련될 것인데, 이렇게 일정한 제도가 있게 되면 유사(有司)가 봉행하는 데에도 별로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또 혹 짐작만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정문(情文)이 있을 경우에는 위로 성명의 마음을 받들고 아래로 뭇 논의를 따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신의 구구한 일념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곳에 처하게 하고 대례를 유감없이 치르려는 마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발인(發引)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뒤 따라 간다.’는 문구가 있지만, 이는 대왕이나 왕후의 상에 신하가 임금의 장례를 치르는 예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먼 옛날의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인종(仁宗)께서 산릉(山陵)에 가시려 하자 대신과 예관이 쟁론하여서 대궐 문 밖에서 곡송(哭送)만 하였고, 선묘(宣廟) 때에도 국장(國葬)이 세 차례나 있었지만 모두 궐문 안에서 곡송만 하였다고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 발인 때에는 선조께서 궐문 밖에서 곡송하려고 하였으나 예조가 아뢰어 대내의 뜰 아래에서 망곡(望哭)만 하였습니다. 이는 상신(相臣)이 분명히 기억하여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으로서도 어리석은 생각에 창황하여 질서가 없는 상황에서 임금이 밤에 거둥하여 성 밖을 나간다는 것이 지극히 미안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선묘께서 이미 행했던 제도대로 따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렇게 두 번 세 번 감히 아뢰었던 것인데, 그처럼 번잡스럽게 소요를 일으킨 죄에 대해서는 신이 만번 죽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연(書筵)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천담색(淺淡色)을 주장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오례의》에 ‘전하와 왕세자는 외조부모의 복에 5일 동안 추포대(麁布帶)를 하고 제복(除服)하며, 왕세자 이하의 상에 있어서는 거애(擧哀)만 하고 복은 없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예경(禮經)》에서 ‘제후는 기복(期服)은 입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왕세자도 그 명위(名位)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제왕의 복제는 본래 사대부와는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막중한 삼년상의 경우에도 전하께서 종통(宗統)을 위해 강복하는 판인데, 왕세자가 어찌 그 복에 있어 변제(變除)028) 의 절목에 강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세자의 기복은 전하의 기복과 그 경중이 또 다릅니다.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 일 보는 복색으로 백포(白袍)를 착용하시는 이상 왕세자가 서연에서 일을 볼 때에는 당연히 천담복을 착용해야 하고 졸곡 후의 복색 역시 차례로 강쇄되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마침 하문이 계셨기에 감히 그 곡절을 아뢴 것이니 감히 자신의 의사로 단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다만 분명히 밝혀 말씀드리지 못함으로써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성명의 하교를 받고 보니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명을 지고 어디에 몸을 두겠습니까. 신이 예관으로서 예의 절목을 논의함에 있어 이미 성명의 뜻을 어겼으면서도 그것을 변통하여 절도에 맞게 할 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결코 이대로 눌러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속히 신의 죄를 바로잡고 대례를 완결지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78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註 028]변제(變除) : 변복과 제복.
○乙巳/禮曹判書李廷龜上箚辭職。 略曰:
臣當此變禮之日, 思欲殫竭心力, 以敦葬事, 惟其老病昏耗, 事多顚錯, 常切兢惶。 仰惟聖明, 旣勉抑至情, 俯循大臣、百官之請, 則凡干節目, 自當差別, 而若有一定之制, 則有司之奉行, 自無難事, 或有情、文之難以酌處者, 則不得不上體聖心, 下循群議。 區區一念, 只欲納吾君於無過, 成大禮於無憾而已。 發引時, 《五禮儀》有率百官陪往之文, 此則大王、王后喪, 臣葬君之禮也。 然而遠事, 雖未詳知, 仁廟欲往山陵, 大臣、禮官爭之, 止於門外哭送; 宣廟朝三度國葬, 皆於闕門內哭送, 人皆傳說。 至於河東府夫人發引時, 宣祖欲哭送於門外, 而禮曹啓之, 只自內下庭望哭。 此則相臣分明記知, 故臣之愚意, 蒼皇紛擾之中, 人君擧動, 犯夜出城, 極爲未安, 願遵宣廟已行之制, 玆敢再三陳稟。 瀆擾之罪, 臣誠萬死。 至於書筵服色, 欲以淺淡者, 《五禮儀》: "殿下及王世子爲外祖父母服, 麤布帶五日而除, 王世子以下之喪, 只擧哀而無服。" 此卽《禮經》所謂諸侯絶期之意, 而王世子名位一樣故也。 帝王服制, 本與士大夫不同。 況莫重者, 三年之喪, 而殿下猶且爲宗統, 而降服, 則王世子之服, 亦安得不降於變除之節乎? 王世子之期服, 與殿下之期服, 自有輕重。 殿下卒哭前視事, 旣以白袍, 則王世子書筵、視事, 當用淺淡服, 卒哭後服色, 亦當次次稍降。 適因下問, 敢陳曲折, 非敢以己意斷定, 而措語未瑩, 不能達意。 伏承聖敎, 惶隕戰灼。 人臣負此罪名, 何所措身? 臣以禮官, 議禮節目, 旣違聖旨, 而迷不知變以中節, 決難仍冒。 伏乞亟正臣罪, 以完大禮。
答曰: "省疏具悉。 卿其安心。"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78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