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우·심지원·여이징이 상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체직을 청하다
사간 이윤우(李潤雨), 정언 심지원(沈之源)·여이징(呂爾徵)이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언지(言地)에 대죄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일에 따라 광구(匡救)함으로써 우리 임금을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도(道)로 인도하기만을 생각할 뿐 어찌 일호인들 다른 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예법에는 압존되는 것이 있고 정리는 굽히는 데가 있는 것으로서 선왕(先王)의 예제(禮制)는 감히 지나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운궁의 성빈(成殯)이 대내(大內)에 있었던 것은 진실로 정례(正禮)가 아니고 실은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애통하고 황급한 가운데 지극한 정리에 가리워져 초종(初終)의 절목을 거개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한 일이 많았습니다.
대저 이미 장(杖)을 짚고 위차에 나아갔고 금전(金篆)으로 명정(銘旌)을 썼고 6일 만에 성복(成服)하였고 빈소(殯所)에 찬궁(欑宮)을 차렸으며, 기타 예법을 어긴 일이 한둘이 아니므로 궐내에 성빈한 것 정도는 논할 것조차 없는 것입니다. 지난일의 잘못은 이제 와서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예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전일의 잘못을 알고 드러나게 뉘우치는 뜻이 있었고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으라고 명하셨는가 하면 예장(禮葬)의 법제에 조금이라도 혐의되는 점이 있으면 일체 도감의 계사를 따름으로써 강쇄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리에서 발하였으나 예의(禮義)에 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식과 월식이 회복되듯이 과오를 고치시는 데 있어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성상께서 예를 어기는 일을 목견하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성의가 천박하고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했던 탓으로 엄한 비답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오만과 멸시는 동료 이하의 사람에게도 감히 할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전하의 신하로서 어떻게 감히 전하께서 스스로 도리를 다하시는 데에 모만과 멸시를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미 준엄한 비답을 받들었으므로 뻔뻔스레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출사(出仕)하게 하라고 처치하니, 답하기를,
"어제의 계사에 조어(措語)가 사리에 어긋났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이에 집의 강석기(姜碩期), 장령 권확(權鑊)·오준(吳竣), 지평 이경헌(李景憲)·이경의(李景義) 등이 상이 간원을 특별히 체차했다는 것으로 모두 인혐(引嫌)하였다. 옥당이 출사하게 하라고 처치하니,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예기(禮記)》에 ‘반곡(反哭)할 때, 주인(主人)은 마루로 올라가는 것은 망인(亡人)이 생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고 주부(主婦)는 침실로 들어가는 것은 망인이 생전에 어른을 봉양하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였고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그러한 의사(意思)를 알게 되면 이른바 그 자리에 올라서는 그 예(禮)를 행한다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하여진다.’ 하였다. 이 뜻을 미룬다면 인경궁(仁慶宮)도 하나의 궁궐이니 능원군은 감히 여기에서 궤전을 봉행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일하던 곳으로 돌아오고 봉양하던 곳으로 돌아오는 의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대간의 말이 매우 예문(禮文)의 뜻을 체득한 것인데 엄한 말로 꺾어버렸는가 하면 마침내는 특별히 체차시키기까지 하였으니 군정(群情)이 실망하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71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辛巳/司諫李潤雨、正言沈之源ㆍ呂爾徵啓曰: "臣等俱以無狀, 待罪言地, 惟思隨事匡救, 納吾君於大中至正之道, 豈有一毫他意哉? 禮有所壓, 情有所屈, 先王制禮, 不敢過也。 啓運宮之成殯於大內, 固非得禮之正, 實出於事勢之不得已, 而聖上當哀遑急遽之中, 爲至情所蔽, 初終節目, 率多徑情直行之事。 夫旣杖而卽位矣, 金篆書銘旌矣, 六日成服矣, 殯用欑宮矣, 其他違禮之擧, 不一而足, 成殯於闕內, 有所不暇論也, 旣往之失, 已矣難追; 將來之事, 猶足可及。 殿下旣知前日之失, 而顯悔悟之意, 已命綾原君爲喪主, 而禮葬之制, 稍涉嫌逼者, 一從都監之啓, 以示降殺之意, 所謂發乎情, 而止乎禮義者。 日月之更, 人誰不仰之乎? 臣等目見聖上違禮之擧, 不敢不言, 而誠意淺薄, 爲不達意, 致勤嚴批。 夫慢侮蔑視, 於敵以下, 猶且不敢。 況爲殿下之臣子者, 何敢慢侮蔑視於殿下所自盡之地乎? 臣等旣承嚴批, 不可靦然仍冒, 請命遞斥臣等之職。" 答曰: "勿辭。" 憲府處置請出, 答曰: "昨日啓辭, 措語無倫, 不可謂之無失。 竝遞差。" 於是, 執義姜碩期、掌令權鑊ㆍ吳竣、持平李景憲ㆍ李景義等以上特遞, 諫院竝引嫌。 玉堂處置請出, 從之。
【史臣曰: "禮曰: ‘反哭升堂, 返諸其所作也; 主婦入于室, 返諸其所養也。’ 朱子曰: ‘須知得這意思, 所謂踐其位, 行其禮等事, 行之自安。’ 推此義也, 則仁慶宮, 亦一宮闕也。 綾原君之不敢奉饋奠於此也明矣。 所謂返所作、返所養, 將安取義乎? 臺諫之言, 深得禮意, 而嚴辭摧折, 終至特遞, 群情失望焉。"】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71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