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11권, 인조 4년 1월 1일 을사 2번째기사
1626년 명 천계(天啓) 6년
전 판서 이시발의 졸기
전 판서 이시발(李時發)이 졸하였다. 시발의 자(字)는 양구(養久)이고 경주인(慶州人)이다. 인품이 영민하고 경사(經史)에 조예가 깊어서 약관(弱冠)의 나이로 기축년001)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 왜란을 만나서 왕사(王事)를 위해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여 많은 노고가 있었다. 접반관(接伴官)으로서 중국 장수 낙상지(駱尙志)와 병서(兵書)를 논했었는데, 상지가 크게 경탄하여 ‘그대와 같은 재주는 천하에서도 얻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 뒤 경상도로 나아가 안찰(按察)하여 훌륭한 치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이 겨우 30세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론을 제기하였고 또 정청(庭請)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기되어 강상(江上)에 거처하고 있었다. 기미년002) 에 오랑캐의 경보(警報)가 있자 찬획사(贊畵使)로 관서(關西)에 나아가 수년간 진무(鎭撫)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4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