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판서 김신국이 국가의 재정을 보강할 방도를 진달하다
호조 판서 김신국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나라의 저축이 탕갈되었는데 경용(經用)은 제한이 없어 각사(各司)는 하루의 경비를 공급하기에도 어려운 형편이고 큰 창고에는 몇 달의 수요도 저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독부(督府)의 채단(綵緞) 값과 여러 곳에서 외상으로 쓴 물건 값을 대략 계산해 봐도 은 5∼6만 냥을 밑돌지 않습니다. 이는 비유하건대 가난한 집에서 아침에 저녁 끼니를 걱정하는 형편인데 계약서를 가지고 묵은 빚을 받아내려는 자가 문 밖에 줄을 서고 방안에 가득히 앉아 있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신이 주야로 생각한 것을 감히 세 가지로 나누어 진달하겠습니다.
첫번째는, 국가의 일상 쓰는 비용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작년 재생청(裁省廳)의 사목(事目)을 보건대, 위로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서부터 아래로 백사(百司)의 소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겨우겨우 충당해 나가고 있을 뿐 여분이 없으니 한때의 정제(定制)라고 할 만합니다. 만약 일 년 동안에 들어오는 물자를 가지고 1년 중에 꼭 지출될 수량에만 비교해 보아도 오히려 부족할 염려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제정되어 있지 않은 규례 밖의 비용이 경상비보다 몇 곱이나 되는 데이겠습니까. 또 더구나 이른바 이미 정해진 제도에도 준용(遵用)하지 못할 것이 있는 데이겠습니까. 종이·초·붓·먹 등은 하찮은 물건이지만 매우 광범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비용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반 시간 동안의 촛불과 한 줄의 글씨를 씀에 있어, 초는 밑부분까지 다 타지 않고 붓은 털끝도 적시지 않은 채 마침내 하리(下吏)의 사용(私用)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조종조에서 사용한 뒤에 도로 내려 보내던 법을 지금은 다시 행할 수 없겠습니까.
공가(公家)에서 쓰는 온갖 물건은 백성의 고혈(膏血)이 아닌 것이 없으니 창고에 가득하게 저장되어 있을 때라도 소모되는 대로 놓아 두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지금은 나라가 나라 꼴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때에 어찌 그대로 버려두고 수습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크고 작은 관리들에게 나라의 회계를 아끼기를 이를 주관하고 있는 자의 마음과 똑같이 하게 하여 부득이 수용(需用)할 물건은 반드시 본조(本曹)에 이문(移文)하게 할 것이요, 직접 해당 관아에 독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다음에야 각사(各司)가 회복될 수 있고 일상 쓰는 비용이 절제가 없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폐(錢幣)를 만드는 일입니다. 전(錢)이 폐(幣)가 된 것은 태호(太昊)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를 금(金)이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천(泉)이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화(貨)라고도 하여 세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지칭되어 왔으나 그 실체는 하나였습니다. 선왕(先王)들은 이 한 물건을 가지고 인사(人事)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였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는 그 사용이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우리 동방에서도 일찍이 전(錢)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려 성종(成宗) 때에 처음 철전(鐵錢)을 사용했고, 숙종조(肅宗朝) 때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전을 사용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알았는데 삼한 중보(三韓重寶)·동국 통보(東國通寶)·해동 중보(海東重寶) 같은 것들로 그 명칭이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민왕 때에 송(宋)나라의 회자(會子)를 본받아 비로소 고려에 저화(楮貨)의 통행이 있게 되어서 전(錢)의 사용이 조금 쇠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는 저화를 전용(專用)하다가 태종 대왕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철전의 사용을 의논하게 되었고 철전의 주조가 시작되었으나 마침 논의가 귀일되지 않게 되자 헌묘(獻廟)076) 가 부득이 혁파할 것을 명하면서 ‘후세에 명군(明君)이 나오면 이것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때 저화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방해됨이 있을까 염려해서 그랬던 것으로, 성인(聖人)이 남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성신(聖神)하신 전하께서 등극하셨으니, 이용 후생(利用厚生)에 있어 옛 제도를 상고하시고 선왕의 뜻을 준행하여 일국에 통용할 화폐를 만들어서 백성의 재산을 부유하게 하고 후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세 번째는 바다의 이익을 거두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이익이 매우 많습니다. 제(齊)·초(楚)·오(吳)·월(越)의 부유함이 천하에서 제일이었던 것은 그들 나라에 어염(魚塩)의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어전(魚箭)과 염장(塩場)이 곳곳마다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기잡이 배가 바다 가운데 죽 늘어서 있으니, 진실로 이것을 잘 규획(規劃)할 수만 있다면 나라를 부유하게 할 자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종조에서 수세하던 규례가 금석같은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수십년 이래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공가(公家)의 막중한 이익을 모두 사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관아가 함부로 침탈하는 것은 국가의 용도에는 보탬도 없이 다만 쇠잔한 백성의 근심과 원망만을 가중시킬 뿐이니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일국의 병사(兵事)는 모두 병조로 돌리고 일국의 재정(財政)은 모두 호조로 돌린다고 했습니다. 지금 어전과 염장은 각각 주장하는 자가 있고 큰배 작은배에는 모두 표(標)가 있는데 해당 관아가 그들을 찾아서 세금을 거두는 것은 백에 두셋도 안 되니 잘 규획(規劃)해서 그 이익을 거두려 해도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에 소속된 어염은 모두 사의(事宜)를 헤아려 제도를 정하고 또 반드시 해조에서 표를 받게 하여 누락되는 폐단이 없게 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조금씩 거두어 국가의 비용으로 삼게 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선척과 염장 가운데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 소속된 것은 소재 지방에서 사사로이 세를 받지 않는 곳이 없는데 해조에서는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 반드시 해조에서 표를 받게 하고 지방에서 사사로이 세금을 거두는 것을 통렬히 금한다면 이중으로 징수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바다의 이익을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염장을 크게 열어서 곡식과 교환하게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신은 염장을 크게 열면 백성이 수고롭게 되고, 곡식과 교환하면 수송하는 병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있는 대로 놔두고 10분의 1을 수세하소서. 그리고 와서 사가는 것을 허락하고 멀리 가서 팔지 못하게 한다면 부족한 경비를 보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바라건대 신의 차자를 묘당(廟堂)에 내려 보충하고 다듬어서 조령(條令)을 만들어 봉행할 수 있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사연은 마땅히 의논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4면
- 【분류】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금융-화폐(貨幣) / 역사-전사(前史) / 수산업-어업(漁業)
- [註 076]헌묘(獻廟) : 태종 대왕의 능호(陵號).
○戶曹判書金藎國上箚曰:
當今國儲蕩竭, 經用無制, 各司艱一日之供, 大倉無數月之需, 而督府綵段之價及諸處賒用之物, 略計不下五六萬銀。 譬如貧寠之家, 朝不及夕, 而執契券, 誅求宿債者, 踵門而盈室, 其何以堪之哉? 臣晝夜思之, 敢陳三件事。 其一曰, 制國用。 臣伏覩上年裁省廳事目, 上自祭享、御供, 下至百司所用, 皆取僅足而無餘, 可謂一時之定制, 而若以一歲恒入之物, 較諸一年應出之數, 猶有不足之慮。 況乎規外不制之費, 倍蓰於常用者哉? 又況所謂已定之制, 亦有所不遵者乎? 紙燭筆墨, 物之微者, 而其用甚廣, 故爲費不億。 半餉之燃, 一行之書, 燭不至跋, 筆不濡毫, 而終歸於下吏之私用。 祖宗朝用後還下之法, 今不可復行乎? 公家百物, 莫非民之膏血, 雖在庫藏充牣之時, 不宜任其消耗。 矧今國非其國之日, 寧委而不收哉? 如使大小之官, 愛惜國計, 一如主者之心, 凡不得已需用之物, 必移文本曹, 不許直責該司然後, 各司庶可蘇息, 而經用不至於無制矣。 其二曰, 造錢幣。 錢之爲幣, 始於太昊。 或謂之金, 或謂之泉, 或謂之貨, 代各異稱, 而其實則一也。 先王以此一物, 御人事, 而平天下, 降及後世, 其用益繁。 惟我東方, 亦嘗用錢, 高麗 成宗之世, 始用鐵錢。 肅宗朝, 國人皆知用錢之利, 如三韓重寶、東國通寶、海東重寶, 其稱不一。 恭愍王時, 依倣宋之會子, 始置高麗通行楮貨, 而錢用於是少衰矣。 入我朝, 專用楮貨, 至太宗大王, 方議用錢, 鑄造伊始, 適値論議不一, 獻廟不得已命罷, 乃曰: "後有明君出而行之。" 蓋其時楮貨盛行, 故慮有相妨之患。 然而聖人遺意, 亦可見也。 方今聖神御極, 利用厚生, 稽古昔之制, 遵先王之志, 作爲一國之通幣, 以阜民財, 以幸後世, 此其時也。 其三曰, 收海利。 海之爲物, 其利甚博。 齊、楚、吳、越之富, 甲於天下者, 以其有魚鹽之利也。 我國三面際海, 魚箭、鹽場, 處處相望, 又有漁採之船, 簇立於海中, 苟能善爲規畫, 則富國之資, 實在於此。 祖宗朝收稅之規, 載在金石之典, 而數十年來, 國綱解弛, 公家莫重之利, 盡歸於私門。 京外官司之橫侵劫奪者, 無補於國家之用, 而只益殘民之愁怨, 可勝痛哉? 嘗聞一國之兵擧, 歸之夏官; 一國之財擧,歸之地部, 而今者魚箭、鹽場, 各有主者; 巨艦、小舠, 莫不有標。 該司之所得以收稅者, 百無二三, 雖欲善爲規畫, 以收其利, 而其道末由也。 諸宮家、各衙門所屬魚鹽, 皆令量宜定制, 亦必受標於該曹, 俾無落漏之弊, 而略收其稅, 以爲國用, 亦無所不可也。 凡船隻、鹽場之屬諸宮家、各衙門者, 所在地方, 則莫不私自收稅, 而該曹則不敢下手。 今若必令受標於該曹, 而痛禁地方之私收, 則無疊徵、重斂之弊矣。 今言海利者, 必曰大開鹽場, 轉換得穀, 臣則以爲, 大開則勞民, 轉換則病輸。 雖仍其存, 而什一收稅, 許其來買, 而勿令遠賣, 亦足以補經費之乏也。 願下臣箚于廟堂, 增損潤色, 作爲條令, 使得以奉行, 幸甚。
答曰: "箚辭當議處焉。"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4면
- 【분류】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금융-화폐(貨幣) / 역사-전사(前史) / 수산업-어업(漁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