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10권, 인조 3년 9월 1일 병오 1번째기사
1625년 명 천계(天啓) 5년
비변사에서 강홍립 등에 대한 조처를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의주 부윤 이완(李莞)의 장계를 보건대, 한적(韓賊)059) 이 오랑캐에 투항했다는 말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강홍립(姜弘立) 등이 한적의 기만하는 말을 듣고 잘못 늙은 어미와 처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안다면 필시 이릉(李陵)이 은덕을 저버리고 적에게 빌붙었던 것060) 처럼 할 것입니다. 강홍립의 아들이나 종을 시켜 집안의 서신을 가지고 오랑캐 땅에 잠입하여 강홍립 등으로 하여금 그들의 가속이 아무 연고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반드시 깨달아 본국(本國)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도모할 것이어서, 한적이 흉계를 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강홍립의 아들 강숙(姜璹)과 박난영(朴蘭英)의 아들 박입(朴雴)에게 노자를 주어 보내되 입에게는 실직(實職)을 제수하여 보내려 했는데, 마침 그때 모문룡(毛文龍)이 다른 일로 인하여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트집잡을 구실로 삼을까 하여 끝내 결행하지 못했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8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변란-정변(政變)
- [註 059]한적(韓賊) : 반역자 한윤(韓潤)을 말함. 인조 2년(1624)에 그 아버지 한명련(韓明璉)이 이괄(李适)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된 뒤 청나라 건주위(建州衛)로 도망하여 금에 투항한 강홍립(姜弘立) 휘하에 들어갔다.
- [註 060]
이릉(李陵)이 은덕을 저버리고 적에게 빌붙었던 것 : 이릉은 한(漢)나라 사람. 이광(李廣)의 손자로 자(字)는 소경(少卿)이다. 무제(武帝) 때 기도위(騎都尉)에 제배되었다. 보기(步騎) 5천을 거느리고 가서 흉노를 치겠다고 자청하고,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칠 것을 자부했다. 그러나 적을 만나 힘을 다해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져 할 수 없이 훗날을 기약하고 우선 항복하였는데, 선우(單于)가 그를 우교(右校)로 삼았다. 여기서는 강홍립(姜弘立)을 이릉에 비교한 것이다. 《사기(史記)》 권109. - [註 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