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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9권, 인조 3년 7월 12일 무오 1번째기사 1625년 명 천계(天啓) 5년

영사 신흠이 호패등의 일을 왕이 결정해 주기를 청하다. 이귀가 김류에 대해 논하다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영사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군적과 양전 두 가지 일을 아울러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상께서 그 선후에 대해 비국에 물으셨으므로 어제 이미 회계하였습니다. 외간의 의논은 ‘호패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것 또한 조종조에서 이미 행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은 상신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들어서 절충해야 하는 것이다. 매양 여러 사람의 의논에 동요되면 국사가 어느 때에 이루어지겠는가."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어떤 사람의 의논은 ‘호패의 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군적을 작성할 수 없다.’ 하니, 이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여러 가지 계책을 다 거행하는 것이 곧 오늘날의 급무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우러러 아뢰어서 재택을 기다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패를 행하려는 것도 소견이 없지 않으나, 다만 생각건대, 조종조에서는 백성이 일정한 산업이 있어서 그 토지에서 편히 살고 옮겨가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이 일정한 산업이 없으므로 도망하여 흩어지기가 매우 쉽다. 하물며 호패의 법은 극히 가혹하고 엄밀하여 시행하는 초기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지금 인심이 정해지지 못한 시기에 소요를 일으킬까 염려된다. 모든 일은 시설하는 초기에 여러 의논을 널리 수합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정해진 뒤에는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지 못하게 한 뒤에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쓰지 않으시니 신이 우러러 아뢰고 싶지 않으나, 다만, 이 일은 존망이 달려 있는 것이므로 침묵만 지킬 수 없습니다. 성상의 하교에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뒤에는 동요하여 고칠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성명께서 소견이 정밀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논의가 한번 정해졌다고 사람이 감히 발언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윤방(尹昉)·최명길(崔鳴吉)·신흠(申欽)은 모두 수령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일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니 신 이귀가 아니면 누가 감히 죽음으로써 쟁변(爭辯)하여 여러 사람의 논의를 거스르겠습니까. 옛날에 조헌(趙憲)을 괴귀(怪鬼)라 하였으나 그 뒤에 사람들은 과연 조헌의 말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신은 곧 오늘날의 조헌입니다. 신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 또한 많으니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군적(軍籍)에 관한 일은 성상께서 비록 대신과 확정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나라를 망치는 일인데 신이 어떻게 차마 앉아서 보기만 하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원익이 현상(賢相)이라 하더라도 계려(計慮)는 신에게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사람을 얻는 데에 있는데 전하께서는 명망이 중한 사람만 취하니 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귀가 전하를 보좌함에 만일 아부하였다면 반드시 부귀를 이루어 이미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을 것이고, 신 또한 조정을 핑계하여 무죄한 학사(學士)를 물리쳤다면 작위도 얻을 수 있고 임금의 총애도 굳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 학사가 외직에 보임된 것은 참으로 불행인 것입니다. 근일 이것 때문에 사대부들 사이에 기상이 수참(愁慘)합니다. 나만갑(羅萬甲)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벌할 만한 죄가 없고, 재능이 많고 천성이 곧으니 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이 김류에게 묻기를 ‘나만갑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더니, 김류 또한 ‘그가 무죄하나 다만 그 마음씨가 험함을 죄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논함에 어찌 마음을 주벌하는 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만갑의 죄는 정엽(鄭曄)의 사위가 된 데에 불과합니다. 정엽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박정과 함께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살인한 죄를 논하였는데 오늘날 나만갑이 외직에 보임된 것은 여기에서 싹튼 것입니다.

신은 지금부터 시골에 돌아가 살면서 만일 전하가 그리워지면 때로 와서 천안(天顔)을 뵙기만 하고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신의 죄는 아당하지 않는 데에 불과합니다. 신이 일찍이 전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한쪽의 말만 들으면 반드시 간사함이 생긴다.’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렇습니다. 김류가 겉으로는 조정한다는 것으로 상달하기 때문에 전하께서 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내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한 시대의 직신(直臣)입니다. 옛날 소인이 군자를 모함할 적에는 반드시 붕당으로 지목하면 임금이 믿고 따르지 않는 이가 적었습니다. 저 세 학사는 모두 죄가 없고 김류에게 묵은 혐의가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외부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김류가 사적인 원한으로 사람을 모함하였다.’ 합니다. 신이 처음부터 김류와 서로 합하지 않음이 많은 것은 성명께서 통촉하시는 바이니, 다시 아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세가 함께 용납되기 어려우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리고 물러가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의 세 신하가 일시에 외직으로 나간 것은 기상이 참으로 좋지 못하다. 그러나 다만 경은 경박한 두세 사람을 위하여 공훈이 같고 한몸과 같은 사람을 얽어 모함하는가. 더구나 이 일은 김류가 한 것이 아니다. 김류를 어찌 권세가 중한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김류는 과연 권세가 중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리와 범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거의(擧義)한 50여 인이 모두 김류에게서 마음이 떠났는가 하면 심지어 ‘7증(七憎)’이니 ‘5증(五憎)’이니 하는 말까지 있습니다. 지난번 김류최명길에게 말하기를 ‘공들이 무슨 까닭으로 여러 명사를 모아 나를 모함하려 하는가?’ 하자, 최명길이 ‘공은 무슨 까닭으로 세 학사를 외직으로 내보냈는가? 사람들이 모두 영공을 사나운 범에 견주고 있다.’ 하니, 김류가 ‘영공이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해 말을 다하려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이 한 일은 김류가 반드시 남김없이 공척(攻斥)한 것이겠습니까.

지난날 신이 염철(塩鐵)에 관한 일을 잠시 논하였는데 김류가 월과(月課)의 시제(試題)를 내어 말하기를 ‘송나라 사마광이 염철을 파하고 그 옛 규례를 다 회복하기를 청함에 비하여 [擬宋司馬光請罷塩鐵盡復其舊]’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신을 왕안석(王安石)에 비한 것입니다. 신이 이것으로 김류를 책하였더니, 김류는 ‘우연히 내었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이 김류를 얽어 모함한다고 하신다면 대신 및 제신(諸臣)으로서 자리에 있는 이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김류가 소인이 아니라면 신이 소인이고, 김류가 군자이면 신은 군자가 아닙니다. 무릇 국가의 일을 만나면 신이 매양 김류에게 굽혔습니다. 당초 논공할 때에 신의 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참여함이 없었는데, 김류가 그의 아들 경징(慶徵)이괄(李适)의 위에 서열을 두려 하였으나 끝내 되지 않자, 또 신경립(申景立)의 위에 서열을 두었으니, 이 무리들이 분을 품고 역적 짓을 한 것이 모두 이 때문입니다. 김류는 혐원(嫌怨)에 따라 사람을 모함하고 배척하였으며 또 심기원(沈器遠)·최명길·장유(張維)·신경진(申景禛)의 무리를 모함하고자 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또 그 아들 경징이 서로(西路)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가서 거칠고 비루한 일을 많이 행하여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합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 서경우(徐景雨)에게 이르기를,

"강이 끝나고 해도 저물었으니 파하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니, 서경우가 아뢰기를,

"대신과 대간이 지금 논계하고 있으니 파하고 나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양사가 전의 일을 연달아 논계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귀가 또 해직하여 전원으로 물러가서 여생을 마치게 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8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농업-양전(量田) / 호구-호적(戶籍) / 변란-정변(政變)

○戊午/上朝講《孟子》資政殿。 領事申欽曰: "軍籍、量田二事, 似難幷擧, 自上問其先後於備局, 故昨已回啓矣。 外間之議以爲, 號牌不可不爲云。 此亦祖宗朝已行之事也。" 上曰: "凡事, 相臣採聽群議, 而折中可也。 每爲群議所動則國事, 何時可成乎?" 曰: "或者之議以爲: ‘不行號牌之法, 無以成軍籍。’ 此言亦似有理。 況群策畢擧, 乃今日之急務, 故敢爲仰達, 以俟裁擇矣。" 上曰: "欲行號牌, 不無所見, 而但念祖宗朝, 民有恒産, 安土重遷, 今則民無恒産, 逃散甚易。 況號牌之法, 極爲苛密, 行法之初, 必多殺人, 當此人心未定之時, 恐致騷屑。 凡事施設之初, 不可不廣收群議, 旣定之後, 則使人人不得各執己見, 然後可成大事矣。" 李貴曰: "殿下不用臣言, 臣不欲仰達, 而但此事, 則存亡所係, 不得含默矣。 上敎以爲: ‘凡事旣定之後, 不可撓改’, 此聖明所見不精也。 一定論議, 人莫敢發言, 此何道理乎? 尹昉崔鳴吉申欽, 皆不經守令, 故不知此等事矣。 今日此事, 係國家存亡, 非臣, 孰敢以死爭辯, 以忤群議? 昔者以趙憲爲怪鬼, 而其後果思趙憲之言。 臣乃今日之趙憲也。 臣之所言, 見效者亦多, 可謂遠見之人矣。 籍軍一事, 聖上雖與大臣牢定, 而此實亡國之擧, 臣何忍坐視不言乎? 李元翼, 雖曰賢相, 而計慮則不及於臣遠矣。 爲國之道, 在於得人, 而殿下徒取名重者, 宜乎國事之不成也。 臣之佐殿下, 若爲阿黨, 則必致富貴, 已至相位矣。 臣亦托以調劑, 屛黜無罪之學士, 則爵位可圖, 君寵可固。 今者三學士之補外, 誠爲不幸。 近日以此, 搢紳之間, 氣象愁慘。 至如羅萬甲, 少無可罪, 而才多性直, 不可棄之人也。 臣問于金瑬曰: ‘萬甲有何罪乎?’ 金瑬亦言其無罪, 而只罪其心之險云。 論人, 豈可用誅心之法乎? 萬甲之罪, 不過鄭曄之壻也。 爲大司憲時, 與朴炡慶徴殺人之罪。 今日萬甲之補外, 萌於此矣。 臣從此退歸丘壠, 若戀殿下, 則時時來拜天顔, 而口不言時事也。 臣之罪, 不過不爲阿黨矣。 臣曾言: ‘殿下若偏聽則必生奸’, 今果然矣。 金瑬, 陽以調劑上達, 故殿下信之, 至於逐此三人, 三人, 皆一時直臣也。 古者小人之陷害君子, 必以朋黨指目, 人君鮮不信聽也。 彼三學士, 皆無罪辜, 不過有宿嫌於金瑬, 故外人俱曰: ‘金瑬以私怨陷人’ 云矣。 臣自初與金瑬, 多不相合, 聖明之所洞燭也。 今不必更達, 而勢難竝容, 欲冒死一言而退矣。" 上曰: "玉堂三臣一時出外, 氣象誠爲不好, 而但卿爲數三浮薄之人, 構陷同功一體之人乎? 況此事, 非金瑬所爲, 金瑬豈可謂權重者乎?" 曰: "果權重矣。 人皆畏之如豺虎焉。 是故, 擧義五十餘人, 皆與金瑬離心, 至有七憎五憎之說。 頃者金瑬崔鳴吉曰: ‘公等何故, 會諸名士, 欲陷我乎?’ 鳴吉曰: ‘公何故, 出送三學士乎? 人皆比令公於惡虎矣。’ 曰: ‘非令公, 孰肯爲我盡言乎?’ 況臣之所爲, 則必攻斥不遺。 頃日臣暫論鹽鐵之事, 而金瑬出月課題曰: ‘擬 司馬光’, 請罷鹽鐵, 盡復其舊。 此則比臣於王安石也。 臣以此責曰: ‘偶然出之矣。’ 殿下若謂臣構陷金瑬, 則大臣及諸臣在座, 其可誣乎? 非小人則臣是小人, 爲君子則臣非君子。 凡遇國家之事, 臣每屈於金瑬。 當初論功之時, 臣之所親者, 無一人得參, 而金瑬欲序其子慶徵李适之上, 終不能得, 又序於景立之上。 此輩之懷憤作逆, 皆以此也。 金瑬陷人斥人, 隨其嫌怨, 故又欲陷沈器遠崔鳴吉張維申景禛輩, 無所不至。 且其子慶徵, 奉命西路, 多行麤鄙之事, 人多言之矣。" 上謂承旨徐景雨曰: "講畢日晩, 罷黜可也。" 景雨曰: "大臣、臺諫, 方爲論啓, 不得罷黜矣。" 於是, 兩司連啓前事, 皆不從。 李貴又請解職, 退歸丘壠之下, 以終餘年, 上不答。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8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농업-양전(量田) / 호구-호적(戶籍)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