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3월 25일 계유 4번째기사 1625년 명 천계(天啓) 5년

특진관 이귀가 학문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문제와 정온을 치죄할 것을 건의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특진관 이귀가 아뢰었다.

"맹자 이후에는 주자가 나와 지나간 성인들을 계승하고 다가오는 후학들을 개도하여 사문(斯文)에 큰 공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조광조(趙光祖)가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났었는데 이어 사림의 화가 있었고, 이 이후부터는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 뒤에는 이황(李滉)이 유자(儒者)의 공부에 독실하였고, 이황이 죽은 뒤에는 이이(李珥)성혼(成渾)이 도학에 고명하였으며, 폐조 10년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반정 뒤에 이르러서는 정엽(鄭曄)이 사유(師儒)의 장관이 되어 선비들을 모아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나, 모두가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었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은 일을 맡기기에는 우활한 듯 해도 서울 안에 머물러 있으면 후학들이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인데, 뜻을 결단하고서 시골로 돌아갔습니다. 장현광(張顯光)도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서 물러가버리고 오지 않습니다. 이는 진실로 국가의 큰 손실입니다. 박지계(朴知誡)는 경학을 궁리한 선비로서 조금도 조정에 죄를 얻은 일이 없는데도 한 번 배척하고는 다시 부르지 않으니, 유자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듯 싶습니다.

대개 초야의 선비들이 처음에 반열에 들어오면 으레 기롱과 모욕을 자초하고, 세속의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명사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폐조가 기강을 어지럽힌 나머지 전하께서 즉위하셨으니, 이는 곧 한 번 크게 다스려지는 시기입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흥기하는 터전이 되게 하소서."

사신은 논한다. 이귀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어가 법도가 없어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젊어서 사숙(私淑)한 기초가 있어서 그의 뜻이 이러한 것이다. 또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근심하여 뭇사람의 비방도 피하지 않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였는바, 충분(忠憤) 한 가지만은 그와 비교될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들이 이귀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저촉되거나 거슬리는 말이 많아도 상이 죄주지 않았고, 진신(搢紳)들에게 욕설하기를 거리낌 없이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다. 매일같이 차자를 올리고 상소하였으나 말을 써 주지 않았고, 국가 일을 도모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한갖 수고로울 뿐 도움이 없었다. 평생의 행사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이귀가 또 아뢰기를,

"인성군(仁城君)은 곧 인륜을 해친 자로 종사를 위태롭게 한 일이 뚜렷하여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외방으로 내칠 적에 ‘추대(推戴)’라는 한 가지 조항을 전지에서 삭제하도록 성상께서 명하셨는데도 승지가 감히 그대로 승전을 받들었으며 감사가 배행하도록 명하셨는데도 대각(臺閣)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만갑(羅萬甲)만이 입시했을 때 말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 감사가 배행한 일이 없었는데, 경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정온(鄭蘊)의 죄는 마땅히 가벼운 벌이라도 주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특별히 대사간을 제수하신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신이 일찍이 약방(藥房)에서 정경세(鄭經世)에게 말하기를 ‘정온의 머리를 베어야 한다.’고 하자. 정경세가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반정한 처음에 임숙영(任叔英)이 신에게 하는 말이 ‘이때에 전하를 무왕(武王)에 비하기로 한다면 백이(伯夷)와 같은 절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유몽인(柳夢寅)과 여러 역적이 있게 된 것은 대개 이런 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온의 소견이 이러했기 때문에 인성군을 신구한 것으로 신이 일찍이 분개하여 한탄하였습니다.

정온이 일찍이 남원(南原)의 원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8백 석의 곡식을 차지하였고, 또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의 집에 제수(祭需)를 보냈는데도 【 정온이 일찍이 정인홍에게 수학하였으므로 정인홍이 복주(伏誅)되었지만 사생(師生)의 의리를 잊지 않은 것이다.】 대간 중에 한 사람도 탄핵하여 논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신과 같이 늙고 망령된 자는 이제 땅 속에 묻힐 것입니다. 신이 죽은 다음에는 전하께서 신과 같은 사람을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온은 정직한 선비로서, 이러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가 옳습니다. 정온은 일찍이 전하를 폐조에 비유하여 군부를 모욕한 사람이니, 과연 구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에는 혹 임금을 걸(桀)·주(紂)에게 비유한 사람도 있었다. 경이 책하는 것은 경과 소견이 달라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692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上晝講《孟子》資政殿, 特進官李貴曰: "孟子以後, 朱子出焉, 繼往開來, 大有功於斯文。 以我國言之, 趙光祖以道學名世, 繼有士林之禍, 從此以降, 士習大壞。 其後有李滉, 篤於儒者之功夫, 李滉死後, 又有李珥成渾, 道學高明, 廢朝十年, 寂無聞焉。 及至反正之後, 鄭曄爲師儒之長, 雖聚士講學, 皆是科擧之士。 金長生則雖若闊於任事, 若留京中, 後學庶有所矜式, 而決意還鄕。 張顯光亦無意仕宦, 退去不來, 此誠國家之大欠。 朴知誡以窮經之士, 少無得罪於朝廷, 一斥不還, 恐非待儒之道也。 大槪山野之士, 初入朝班, 例招譏侮, 至於俗士登科, 多作名士。 廢朝亂紀之餘, 殿下卽祚, 是實一治之時, 願召學問之人, 以爲興起之地。"

【史臣曰: "李貴志操不端, 言語無章, 以此取笑於世人, 而少有私淑之地, 故其意如此。 且愛君憂國, 不避衆謗, 有懷必達, 忠憤一節, 罕有其比, 故當時之人, 號李貴爲雜君子云。 入侍經筵, 言多觸忤, 而上不以爲罪, 詆辱搢紳, 無所顧忌, 而人不以爲怒。 陳箚抗疏, 無日無之, 而言不見用, 竭誠殫情, 欲濟國事, 而徒勞無益。 平生行事, 類如是矣。"】

李貴又曰: "仁城, 乃倫紀之賊, 圖危宗社之事, 昭不可掩。 頃者出置之時, 推戴一款, 自上命去於傳旨之中, 而承旨敢捧承傳, 又命監司陪行, 而臺閣寂無一言, 獨有羅萬甲入侍而言之耳。" 上曰: "其時無監司陪行之事, 卿何從得聞此言耶? 告君之辭, 不當如是。" 曰: "鄭蘊之罪, 宜施薄罰, 而自上特除大司諫, 抑何意也? 臣曾在藥房, 言於鄭經世曰: ‘鄭蘊之頭可斬云,’ 則經世無以對之矣。 當反正之初, 任叔英言於臣曰: ‘今之時, 若比殿下於武王, 則宜有伯夷之節云。’ 其後乃有柳夢寅及諸賊, 蓋由此論也。 鄭蘊所見如此, 故乃救仁城, 臣嘗憤惋焉。 曾作南原倅, 私取八百石之穀, 又送祭需於賊臣仁弘之家, 【蘊曾受學於仁弘, 仁弘雖伏法, 猶不忘師生之義也。】 而臺諫無一彈論, 未可曉也。 如臣老妄, 今將入地, 臣死之後, 殿下難得如臣者矣。" 上曰: "鄭蘊直士, 難得如此之人也。" 曰: ‘殿下之敎是矣。 曾比殿下於廢朝辱君父之人, 果難得也。" 上曰: "古或有比其君於者, 卿之致責, 豈以與卿所見, 不同之故耶?"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692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