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공·김상헌·정광성·이성구·장유·이경함 등의 인사를 실시하다
남이공(南以恭)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남이공은 젊어서부터 재주와 기강이 있었으나 성품이 본래 간사하고 교활하였다. 일찍이 김신국(金藎國)과 함께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두 사람에게 결탁하여 모두 그들의 지휘를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김(金)·남(南)’이라고 불렀다. 사론(士論)에 버림받은 지 오래였는데 김류가 극력 추천하여 대사간이 되었다. 김류 자신은 공도(公道)를 제대로 행한다고 생각했으나, 제목(除目)이 한 번 내려지자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워했다.
김상헌(金尙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김상헌은 자신의 말이 채택되지 않고 충성심도 신임을 받지 못했으므로 극력 대사간을 사직했는데, 바로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정광성(鄭廣成)과 이성구(李聖求)를 승정원 승지로, 장유(張維)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정엽(鄭曄)이 일찍이 정 2품이었는데도 그대로 대사성을 겸임하고 있다가 이에 이르러 자급(資級)이 1품으로 올라갔다. 상은 여전히 그를 체직시키고 싶지 않아 대신에게 하문하였는데, 대신이 관제(官制)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므로 장유로 그 소임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이경함(李慶涵)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경함은 천성이 공손하고 근실했으며 도량이 있었으나 다만 쓰기에 적합한 재능이 없었다.
김덕함(金德諴)을 호조 참의로, 이식(李植)을 사헌부 집의로, 엄성(嚴惺)을 시강원 필선으로, 정종명(鄭宗溟)을 의정부 사인으로, 유백증(兪伯曾)을 보덕으로, 정백창(鄭百昌)을 홍문관 교리로, 이소한(李昭漢)을 부교리로, 이경석(李景奭)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이경석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후덕하였으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신중하였다. 게다가 글 재주도 넉넉하였으므로 나이 젊은 명류(名流)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김설(金卨)을 예문관 대교로 삼았다. 김설은 곧 김덕함의 아들이고 이귀(李貴)의 사위이다. 성미가 본래 사특하고 망령되어 오직 아첨만을 일삼는다. 훈귀(勳貴)와 청류(淸流)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치고서 청류를 만나면 훈신을 헐뜯고 훈신을 만나면 청류를 헐뜯었으므로 한때의 제배들이 그가 서로 모함하는 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우려하였다.
정심(鄭杺)을 검열로 삼았다. 정심은 정경세의 아들로서 사람됨이 단아(端雅)하고 또 예학(禮學)을 알았다. 송상인(宋象仁)이 집의로 있다가 안동 부사로 나갔다. 송상인은 청렴하고 강직한 면에서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때 안동 고을에 온통 무단(武斷)하는 풍조가 만연되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를 제압할 만한 인물을 극력 가린 결과 송상인이 선발되었는데, 사실은 김류가 내쫓은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676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癸未/以南以恭爲司諫院大司諫。 以恭, 少有才器,而性本奸猾, 曾與金藎國, 締結朴承宗、柳希奮兩人, 皆聽其指揮, 時人號曰金南。 見棄於士論久矣, 金瑬力薦爲諫長, 自謂能行公道, 而除目一下, 物情大駭。 金尙憲爲吏曹參議, 尙憲言不見用, 忠不見信, 故力辭諫長, 旋有是命。 鄭廣成、李聖求爲承政院承旨, 張維爲成均館大司成。 鄭曄曾以正二品, 仍兼大司成, 至是陞資一品。 上猶欲勿遞, 問于大臣, 大臣以爲有違官制, 故乃以維代其任。 李慶涵爲戶曹參判, 慶涵天性恭謹, 且有度量, 但無適用之才。 金德諴爲戶曹參議, 李植爲司憲府執義, 嚴惺爲侍講院弼善, 鄭宗溟爲議政府舍人, 兪伯曾爲輔德, 鄭百昌爲弘文館校理, 李昭漢爲副校理, 李景奭爲司諫院正言, 爲人謙厚, 持身淸愼, 且長於文才, 年少名流, 皆推許焉。 金卨爲藝文館待敎, 卨, 乃德諴之子, 李貴之壻也。 性本邪妄, 惟以諂媚爲事, 遨遊於勳貴淸流之間, 遇淸流則毁勳臣; 遇勳臣則毁淸流, 一時儕友, 憂其有交構之漸。 鄭杺爲檢閱, 經世之子, 爲人端雅, 且知禮學。 宋象仁以執義, 出爲安東府使。 象仁廉淸剛直, 不下古人, 時安東一境, 武斷成風, 故朝廷極擇彈壓之人, 而象仁乃膺其選, 其實金瑬擯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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