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 등이 언로를 넓힐 것과 김공량의 가자를 정지할 것을 건의하다
상이 조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영사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현재 강이 이미 얼어붙어 방추(防秋)가 바야흐로 시급한 때인데 영상이 오래도록 병고(病告) 중에 있으니, 돈유(敦諭)하여 나오게 하거나 혹은 사관(史官)을 보내어 조정의 정책을 자문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이 아직 차도가 없다고 하기에 그렇게 못했을 뿐이다."
하였다. 신흠이 아뢰기를,
"요즘 들어 변방의 사세가 지극히 위태해 우려스러운데 불시에 조발(調發)할 경우 군사를 거느릴 만한 사람이 없으니, 체찰사(體察使)로 하여금 장령(將領)이 될 만한 사람을 가려 뽑아 그때를 당해 조발하여 쓸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신흠이 또 아뢰기를,
"신이 정원의 계사에 관한 일로 최근 차자를 올리려 했는데, 마침 오늘 조강(朝講)에 참여하게 되었기에 감히 이렇게 상달합니다. 신이 삼가 당초에 전교하신 말씀을 살펴 보건대,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측은하였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큰 충신은 어기는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태도에 있어서는 임금의 행동에 혹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더라도 진정 크게 잘못된 일만 아니라면 또한 위곡(委曲)하게 받들면서 조용히 뜻을 유도해 나가도록 해야지, 갑작스럽게 거역함으로써 지나친 행동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원의 계사는 자못 완곡하게 따르는 뜻을 잃어버림으로써 엄한 분부가 계시게 만들었으니 지극히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선조(宣祖)께서 평소에 사제(私第)에 행행하셨다가 사속(私屬) 두 사람을 벼슬시킨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대간들이 또한 달이 넘도록 논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말을 보면 온순한 것도 있고 모가 나는 것도 있으며 혹 광망(狂妄)하기도 하고 혹 어리석기도 하며 혹 소탈하기도 하고 혹 솔직하기도 하여 하는 말이 같지 않지만, 밝은 임금과 올바른 임금은 그의 말만을 살피지 않고 반드시 그의 마음을 살피는 법입니다. 오늘날 일어난 이 일은 본시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점점 일이 복잡하게 전개되어 이처럼 엄한 분부까지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말이 한 번 나오면 사방에 전파되는 법인데, 보고 듣기에 어찌 미안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사사로이 비호하려고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언로(言路)의 개폐(開閉)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지극히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지극히 엄한 위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아무리 너그럽게 용납해 준다 하더라도 오히려 두려워서 말을 못하는 법인데, 만일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보인다면 누가 다시 감히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날 선왕(先王)의 말년부터 언로가 막히기 시작하여 폐조(廢朝) 때 극도에 달했는데, 우물쭈물 침묵만 지키고 따라 아랫사람들의 의견이 위에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옛날 성인들이 비방을 허용하는 게시판을 설치하고 간쟁하도록 북을 설치하던 것은 모두 언로를 넓히어 아래의 실정이 상달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정원은 진실로 진계(陳啓)했어야 마땅하지만 어찌 그렇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국가에서 여러 차례 큰 경사를 치르며 무거운 죄가 있는 사람도 모두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김공량을 착하게 여긴 것도 아닌데, 이토록 기필코 30년 전의 일까지 거론하다니 그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지사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이번 일은 진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계사를 올린 것인데, 심지어 간원에 비답을 내리시면서 정철(鄭澈)을 들어 분부하시기까지 했으니, 이는 성인의 불천노(不遷怒)하는 뜻이 아닌 듯 싶습니다. 정철은 평소 천성이 강직했기 때문에 당시 궁금(宮禁)과 내통하는 짓을 너무도 심히 미워한 나머지 자못 말을 하였던 것인데, 이번에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이 어찌 정철을 위하여 보복을 할 생각을 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신흠이 아뢰기를,
"사류(士類)들이 정철 때문에 폐고(廢錮)되어 버려진 지 30여 년이 되었는데, 오늘날 그 버려진 사람들이 모두 왕업(王業)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고, 성상께서도 이미 신임하여 부리고 계시는데 어찌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후생들은 일찍이 정철이 어떻게 했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편당하는 짓을 하느라 그런 계사를 올렸겠습니까. 사기(士氣)는 한 번 좌절되면 진작되기 어렵고 사람들 마음은 한 번 저하되면 일어나기 어려운 법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정구가 일찍이 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정철의 당이라고 논박을 받았는데, 그때 이정구는 사실 정철의 얼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오늘날 승지들이 어찌 정철에게 편당하느라 그런 계사를 올렸겠습니까."
하고, 정언 권도(權濤)가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김공량의 강등된 자급(資級)을 도로 주도록 한 일을 논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는데, 어제 해조에 내리신 분부를 보건대 다시 김공량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하셨습니다. 임금의 거조는 조변석개(朝變夕改)해서는 안 되는데, 이렇듯 처리하시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김공량의 사람됨을 신이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궁금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말이 이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이산해(李山海)가 연줄을 대고 빌붙는 짓을 하여 자못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되자, 세상이 모두 비루하게 여겨 침을 뱉으며 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정목(政目)에 ‘전 별좌(別坐) 김공량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가자했다.’고 쓴다면, 보고 듣는 자로서 그 누가 해괴하게 여기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그윽이 부끄럽게 여깁니다.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은 초야의 덕이 높은 선비로서 징소(徵召)하여 올라오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자급을 내리는 격식에 따라 이제야 통정 대부의 자급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공량은 전 별좌로서 갑자기 통정 대부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이는 참하(參下)의 직급에서 계급을 뛰어넘어 당상관으로 승진시킨 것입니다. 어찌 너무도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신흠이 아뢰기를,
"권도의 말이 옳습니다. 권도는 영남 사람인데 또한 어찌 정철에게 편당하여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고, 지평 윤순지(尹順之)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평소에 상으로 관작을 주는 일을 아껴 오셨는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통정 대부의 자급을 사속(私屬)에게 내리셨습니다. 그에게 보답해야 할 공로가 있다면 금백(金帛) 등 재물로 상을 주어야 할 것인데, 어찌 조정의 관작을 공로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속히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실직(實職)이 아니다. 폐조 때에 일찍이 가선 대부(嘉善大夫)였던 것을 지난 번에 자급을 강등했기 때문에 도로 주도록 했었는데, 이것이 미안스럽게 된 듯 하기에 이제 다시 고쳐서 준 것이다."
하였다. 윤순지가 아뢰기를,
"지난 날에 가자한 것도 본래 공로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 오늘날 고쳐서 주게 한 것은 또 무슨 명목으로 한 것입니까? 대개 요즘 들어 사속을 돌보아 주시는 뜻이 퍽 많습니다. 유정량(柳廷亮)의 일도 논열한 지 이미 오래인데 기꺼이 윤허하지 않으시니, 사체상 지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의 증세가 매우 무겁다고 들었다. 만약에 차도가 있으면 어찌 도로 가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권도가 아뢰기를,
"김공량의 일을 소청대로 윤허받지 못한다면 신이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나가서 스스로 대간이라 하며 길거리에서 호창(呼唱)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도로 거두소서."
하고, 검토관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임금이 들어 주어야 할 말은 대신과 대간의 말입니다. 지금 대신과 대간이 빠짐없이 논열하고 있는데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신이 경연에 있는 신분으로 감히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승지 홍명형(洪命亨)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문장을 잘못 작성한 실수가 있으니 침묵을 지키며 대죄해야 할 뿐 감히 다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모욕을 가했다고까지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은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김공량의 행위에 대해서는 시정(市井)과 여항(閭巷)에서도 모두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고 있는데, 이것도 정철에게 편당하는 것이겠습니까.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는 다만 곡직(曲直)과 사정(邪正)을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한 것이 그르면 곧장 그르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논한 것이 어느 당파와 관계가 있다고 의심할 경우, 이 뒤로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침묵만 지키고 우물쭈물하면서 시비를 분간할 생각은 없고 그저 당(黨)이란 글자 하나만 벗어나려고 힘쓸 것이니, 이는 국가의 복이 아닐 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공량의 일 때문에 선왕조에까지 말이 미치게 되었으니, 마음에 매우 미안하다. 가자하도록 한 명은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65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朔辛亥/上朝講《孟子》于資政殿。 領事申欽啓曰: "目今江氷已合, 防秋正急, 而領相又在病告, 似當敦諭以出, 或遣史官咨訪朝政宜當。" 上曰: "予亦有意, 而聞病未差歇故未果耳。" 欽曰: "近來邊事, 極可虞危, 若不時調發, 則無可領兵之人, 令體察使抄擇堪爲將領者, 以備臨時調用宜當。" 上曰: "卿言是矣, 依此擧行。" 欽又曰: "臣以政院啓辭之事, 近欲上箚, 今日適値朝講, 故敢此仰達。 臣伏見當初傳敎之辭, 意甚懇惻。 古人云: ‘大忠不違。’ 夫人臣於事君之際, 君之所爲, 雖或有未盡合宜, 而苟不至大叚過擧, 則亦且委曲奉承, 從容導達, 不宜遽爾拂逆, 使至於過擧也。 政院啓辭, 頗失婉順之意, 致有嚴敎, 極爲未安。 平時宣祖幸私第, 官私屬二人, 其時臺諫亦論執踰月。 人之言語, 有溫順者、有稜角者, 或狂、或愚、或疎脫、或率直, 爲說不同, 而明君誼辟, 則不觀其言, 而必察其心焉。 今日此事本非大叚, 而轉輾增加, 嚴旨至此。 王言一出, 傳播四方, 其於瞻聽, 豈不未安乎? 臣非私護而敢爲此言。 此雖微細, 實係於言路之開閉, 人君處至尊之位, 有至嚴之威, 雖假之以寬容, 猶懼不言, 若示以雷霆之威, 則誰復有敢言者哉? 向來言路之閉, 始於先王末年, 而極於廢朝時, 含糊循默, 下情不達, 終至於亂亡而後已。 古之聖人, 設誹謗之木, 立諫諍之皷者, 皆所以廣言路, 而達下情也。" 上曰: "卿言甚是。 政院固當陳啓, 而其措語, 豈宜若是也。 國家屢經大慶, 重罪者亦皆蕩滌。 且予非以金公諒爲善也, 而必擧三十年前所爲之事, 至於如此, 未知其可也。" 知事李廷龜曰: "此實出於愛君之誠, 非有他意也。 政院在出納惟允之地, 故爲此啓辭, 而至於諫院之答, 乃擧鄭澈而爲敎, 似非聖人不遷怒之意也。 澈平生賦性剛直, 故其時宮禁交通之事, 疾惡已甚, 頗以爲言, 而今之爲此言者, 豈爲鄭澈而爲報復計也?" 欽曰: "士類以澈之故, 廢錮棄置者, 三十餘年。 其所廢置者, 今日盡爲興王之佐, 自上亦旣任使之矣, 夫豈不知乎? 況今後生未嘗知澈之爲如何, 豈爲黨比而有此啓乎? 士氣一挫則難振, 人心一沮則難起, 不可不察也。 廷龜曾爲翰林, 以澈黨被論, 而其時廷龜實未識澈之面目。 況今之爲承旨者, 豈黨於澈而爲此啓哉?" 正言權濤曰: "再昨臣論金公諒降資還授事, 旣已蒙允, 而昨見下該曹之敎, 復加公諒之資矣。 人君所爲, 不宜朝夕更變, 如此擧措, 極爲未安。 公諒之爲人, 臣未之詳知, 而其在平時, 交通宮禁之說, 始於此人。 李山海夤緣攀附, 頗有人言, 世皆麤鄙而唾罵之。 今者書諸政目曰: ‘前別坐金公諒, 今加通政’, 則瞻聆孰不駭惑? 臣竊恥之。 金長生、張顯光以林下宿德之士, 徵召上來, 而猶循資格, 今始得通政之資, 而公諒以前別坐, 遽超通政, 則是以參下之秩, 躐陞堂上, 豈不爲可駭之甚者乎?" 欽曰: "權濤之言是也。 濤嶺南人, 亦豈黨澈而爲此言乎? 此實出於公心也。" 持平尹順之曰: "殿下平日愛惜爵賞, 而一朝以通政之資, 遽加於私屬。 渠若有可酬之勞, 則賞之以金帛財物可也。 豈可以朝廷之官爵, 濫授無功之人哉? 請亟還收。" 上曰: "此非實職也。 廢朝時曾爲嘉善, 頃者降資, 故使之還授, 而此似未安, 今復改授耳。" 順之曰: "前日之加, 本非有功, 今日改授, 又是何名? 大槪近來顧念私屬之意頗多。 柳廷亮之事, 論列已久, 而亦不肯允許, 其於事體, 極爲未安。" 上曰: "聞病勢甚重, 若差歇則豈不還囚乎?" 濤曰: "公諒之事, 若不得請, 則臣何敢擧顔而出, 自以爲臺諫, 而行呼唱於道路乎? 請亟還收。" 檢討官李基祚曰: "人君之所聽用者, 大臣、臺諫之言。 今大臣、臺諫論列備至, 而亦不虛納, 臣在經幄, 不敢不仰達。" 承旨洪命亨曰: "臣旣有措語錯謬之失, 所當悶默待罪而已, 不敢更有所言, 而第以侮辱爲敎, 臣等不勝惶恐。 金公諒之所爲, 市井閭巷, 皆所賤惡, 此亦黨於鄭澈者耶? 人君聽言之道, 但當辨其曲直、邪正而已, 所言若非則直以爲非可也。 若疑其論涉於某黨, 則此後在廷之臣, 惟以含糊循默, 不分是非, 要免黨之一字而已, 恐非國家之福也。" 上曰: "以金公諒事, 語涉先朝, 心甚未安。 加資之命, 勿施, 可也。"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651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