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 부원군 이귀가 체직을 청하다
연평 부원군 이귀(李貴)가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성명(聖明)을 만나 의리상 휴척을 같이해야 하므로 자신을 잊고 임금을 사랑할 줄만 알았을 뿐, 일찍이 시기를 보아 남을 따른 적이 없습니다. 매번 대신이나 대간과 탑전에서 쟁변(爭辨)한 것은 기미를 막으려는 생각이었으나, 정성이 적고 명망이 가벼워서 아래로 시론(時論)에 부합하지 못하고 위로 천청(天廳)을 돌리지 못하여 불충한 죄를 쌓았을 뿐이었으니 신이 하나하나 아뢰겠습니다.
반정(反正)한 뒤에 한 가지 의논이 있었는데, 중국 장수를 접대하는 데에는 정례(正禮)를 써야지 구차하게 그가 요청한 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두세 번 아뢰었으나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여, 오늘날 난처한 걱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미 이런 걱정이 있을 것을 알고도 끝내 힘껏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그 불충한 죄가 하나입니다.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가 굴을 파고 도망나와 불궤(不軌)를 꾀하려 할 때 삼사(三司)와 시종 쟁변하여 기어코 국법을 시행하도록 했어도 늦다 하겠는데, 의병을 일으킨 처음에 처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둘입니다.
역적 이유림(李有林)을 국문할 때에 신이 상소하여 대신과 대간이 추대한 사람을 묻지 않은 잘못에 대해 배척하였으나, 죽을 힘을 다해서 논쟁하지 못하여 역적 이제(李瑅)의 변이 있게 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셋입니다.
신이 상소하여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죄주기를 청하고 대간과 쟁변하여 모자(母子)의 윤기(倫紀)를 모른다고 책망하였으나, 정성이 하늘에 사무치지 못하여 끝내 윤기를 밝히지 못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넷입니다.
지난해 가을 조정에서 역적 이괄(李适)로 부원수 유비(柳斐)를 대신하려 할 적에 신이 ‘유비는 사람됨이 이괄보다 못하지 않으므로 까닭없이 가벼이 갈아서는 안 된다.’ 하였고, 이괄이 떠날 때에 남방의 군사 1만 5천을 계청하자 신이 탑전에서 논쟁하기를 ‘지난해에 유비는 남방의 군사가 없이 전례의 방수(防戍)하는 군사만으로 오히려 방수할 수 있었는데, 올해에는 어찌 반드시 남방의 군사를 많이 징발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유비를 체직하고 이괄을 보내며 남방의 군사를 많이 징발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으나 죽을 힘을 다해서 쟁변하지 못하여 지난번의 변란이 있게 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다섯입니다.
이우(李佑) 등이 고변하였을 때 이괄을 나포하는 일 때문에 탑전에서 소리를 높여 체면을 매우 잃었는데 추고받고 그만두었으니 옛사람이 옷자락을 잡아 당기며 간쟁한 것036) 에 부끄러우니, 불충한 죄가 여섯입니다. 신이 처음에 원수(元帥)의 군사가 황주(黃州)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탑전에서 아뢰기를 ‘평안도의 병력이 격멸하지 못하여 곧바로 황주를 지났다면 황해도의 병력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고, 황해도의 병력이 막지 못하면 경기의 병력으로 결코 차단할 수 없을 것이다. 성안에 혹시 내응(內應)하는 사람이 있으면 뜻밖의 변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종묘 사직과 대비전 및 제전(諸殿)을 받들어 강도(江都)로 이어(移御)하고 사대부의 가족이 피란하는 것도 금하지 말아야 하며 전하께서는 친히 삼군(三軍)을 감독하여 기회를 보아 격멸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전하께서 대신에게 물으셨는데, 신의 계책은 곧 정론(正論)에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신이 죽을 힘을 다하여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일곱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명나라의 정해진 제도에 어사(御史)·급사중(給事中)이 일을 논하는 데 있어 사실에 어긋나면 육경(六卿)이 사핵(査覈)하고, 혹시 무함당하였으면 스스로 변명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종조에서도 이 규례를 시행하였으므로 정사(政事)는 삼공(三公)에게 달려 있어서 대각이 혐의로 인하여 무함하는 풍습이 아주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의 정사는 오로지 대각에게 달려 있으므로 삼공·육경일지라도 대간의 비평을 받으면 감히 소리를 내어 서로 변명하지 못하는데, 정사가 대각에 있으면 어지러워진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힘으로 바로잡지 못하고 도리어 시끄럽게 하여 나라 일이 날로 무너지고 인심이 날로 위태로워지게 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여덟입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면 친소(親疏)를 가리지 않고 국법으로 처단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죄준 것은 종사와 윤기를 위한 것입니다. 지난번 을사년037) 의 간신(姦臣)과 근일 폐조의 군흉(群兇)이 대군(大君)과 왕자(王子)를 무함하여 죽여서 골육의 변을 만든 것은 만고에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따라서 근일 사류(士類)라는 자들은 뜨거운 국에 놀란 나머지 찬 나물국도 불며 마신다는 격으로 왕실(王室)의 친족이면 반역 모의가 이미 드러난 뒤에도 반드시 덮어두고 들추어내지 않는 것으로 정론(正論)을 삼습니다. 이리하여 역적 이제의 반역한 정상이 이미 나타난 뒤에도 양사(兩司)가 다만 파직시키는 것으로 논계하게 되고, 역적에게 추대된 뒤에 역적 제를 처치한 훈신(勳臣)에 대해서 왕자를 제멋대로 죽였다 하여 나국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상차하여 양사가 임금을 잊고 역적에게 느슨하게 한 죄를 극진히 아뢰었으나, 옥당은 역적을 토죄하는 대의(大義)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론을 제기한 사람을 체직시키고 양사를 비호하여 모두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치지 못하여 윤기를 부식하려던 계책이 허사로 돌아갔으니, 불충한 죄가 아홉입니다.
신은 김류(金瑬)와 외람되게 훈신의 첫째 지위에 있으므로 불행히도 전후 고변하는 자들이 모두 신들에게 고하였는데, 그들의 고변을 듣고 나서는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호위하였습니다. 그런데 심즙(沈諿)은 야대(夜對)할 때에 ‘고변한 자가 모두 분명하지 않다.’는 말로 신들의 죄를 꾸미고 사람들의 입을 봉하여 역적을 감싸주려는 계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그 조짐을 미리 막지 못하여 승여(承輿)가 남으로 파천하고 종사가 거의 망할 뻔하게 하였으니, 불충한 죄가 열입니다.
신에게 이 열 가지 큰 죄가 있는데, 어떻게 감히 조정의 의논에 다시 참여하여 성명(聖明)을 거듭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의당 벼슬을 그만두고 전리(田里)로 돌아가 여생을 마쳐야 하겠으나, 성은(聖恩)이 거듭되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인심이 날이 갈수록 위구한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의리상 물러갈 수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성에 들어와 대죄합니다. 신의 직명(職名)을 갈아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상차한 것을 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종사에 욕을 끼친 것은 오직 나의 허물인데, 경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더욱 성심을 다하여 시대의 어려움을 풀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9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외교-명(明)
- [註 036]옷자락을 잡아 당기며 간쟁한 것 : 위 문제(魏文帝)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 호를 하남(河南)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그때 신하들이 안 된다고 하였으나, 문제는 뜻을 돌리지 않았다. 신비(辛毗)가 신하들과 함께 뵙기를 청하니 문제가 간쟁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노한 기색으로 만나자 아무도 말하지 못하였는데 신비만이 간언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듣지 않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비가 문제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니, 문제는 옷을 떨치고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와서 말리는 뜻을 물으니, 신비가 민심도 잃고 백성이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이에 문제가 5만 호를 옮기게 하였다.《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권 2.
- [註 037]
을사년 : 1545 명종 즉위년. - [註 037]
臣遭遇聖明, 義同休戚, 徒知忘身愛君, 未嘗俯仰隨人。 每與大臣臺諫, 爭辨於榻前, 欲爲防微杜漸之計, 而誠微望輕, 不能下協時論, 上回天聽, 徒積不忠之罪。 臣請一一條陳焉。 反正之後, 有一種議論, 以爲接待唐將, 當以正禮, 不可苟從其請。 臣以不可不從之意, 再三陳啓, 竟未見施, 致有今日難處之患。 臣旣知有此患而終不能力爭, 其不忠之罪一也。 當廢祬掘穴逃出, 將謀不軌也。 與三司終始爭辨, 期於必行國法, 而亦云晩矣。 擧義之初, 不能處置得宜, 不忠之罪二也。 當逆賊李有林鞫問之時, 臣抗章以斥大臣, 臺諫不問推戴之失, 而不能以死力爭, 致有逆瑅之變, 不忠之罪三也。 臣抗章請罪仁城君 珙, 與臺諫爭辨, 責以不識母子之倫, 而誠未格天, 終不明其倫紀, 其不忠之罪四也。 上年秋, 朝廷將以賊适代副元帥柳斐, 臣以爲, 柳斐爲人不下於适, 不可無端輕遞, 且适之將行也, 啓請南軍一萬五千, 臣爭於榻前曰: ‘上年柳斐雖無南軍, 猶以例防之卒, 尙能防秋。 今年何必多發南軍, 以招民怨乎? 臣非不知遞斐送适, 多發南軍之不可, 而不能以死力爭, 致有頃日之變, 不忠之罪五也。 當李佑等之告變, 以拿适一事, 抗聲榻前, 殊失體面, 被推而止, 有愧古人牽裾之諫, 不忠之罪六也。 臣初聞元帥之軍敗於黃州, 陳於榻前曰: ‘平安道兵力, 不能勦滅, 而直過黃州, 則黃海兵力, 必不能沮遏; 黃海兵力, 旣不能沮遏, 則以京畿兵力, 決難遮遏。 城中或有內應之人, 意外之變, 不可不慮。 今日之計, 莫如先奉宗社及大妃諸殿, 移御江都, 士大夫家屬之避亂者, 亦令勿禁。 殿下親董三軍, 相機勦滅。’ 於是殿下詢問大臣, 臣計旋爲正論所沮, 不能見施, 而臣不能以死力爭, 不忠之罪七也。 臣竊以爲, 皇明定制, 御史、給事中論事失實, 則六卿覈之, 如或被誣, 則許其自明。 我國祖宗朝, 亦行是規, 故政在三公, 絶無臺閣因嫌構誣之風。 近日之政, 專在臺閣, 雖三公六卿, 如被臺評, 則不敢出聲相辨, 政在臺閣則亂, 不幸近之。 臣力不得救正而反致激鬧, 使國事日敗, 人心日危, 不忠之罪八也。 臣而叛君, 則不分親踈, 斷以王法, 不可饒貸, 故周公致辟於管、蔡, 爲宗社也, 爲倫紀也。 曩者乙巳奸臣及近日廢朝群兇之搆殺大君、王子, 以成骨肉之變者, 爲萬古罔赦之罪, 故近日之名爲士類者, 懲羹吹虀, 凡爲王室之親, 則雖叛謀已著之後, 必以掩置, 不發爲正論, 馴至於逆瑅叛狀已著之後, 兩司只以罷職論啓。 及其爲賊推戴之後, 其處置逆瑅之勳臣, 謂之擅殺王子, 至請拿鞫, 臣上箚極陳兩司忘君緩逆之罪, 而玉堂昧於討逆大義, 反遞正論之人, 庇護兩司, 請竝出仕。 臣誠未格天, 扶植倫紀之計, 歸於虛地, 不忠之罪九也。 臣與金瑬忝在勳首, 故不幸前後告變者, 皆告於臣等, 而旣聞其變, 則不可坐於家, 故不得不率軍官, 往扈闕下, 而沈諿因夜對, 以告變者皆不分明等語, 搆成臣等之罪, 鉗制衆口, 欲爲掩護逆賊之計, 而臣等不能預杜其漸, 以致乘輿南遷, 宗社幾亡, 不忠之罪十也。 臣有此十大罪, 安敢更參朝議, 重負聖明乎? 固當乞骸歸田, 以終餘年, 而聖恩重疊, 肉骨難忘, 又聞都下人心日益危懼, 義難退伏, 今始入城待罪, 請遞臣職名。
答曰: "觀卿上箚, 予甚靦顔。 不用卿言, 貽辱宗社, 惟予之過, 卿有何罪? 卿其勿辭, 益殫赤心, 以紓時艱。"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9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