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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5일 기미 5번째기사 1624년 명 천계(天啓) 4년

남한 산성의 축조와 군량 및 기인의 가포 등에 대해 논의하다

저녁에 상이 또 자정전에 나아가 삼공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군현(群賢)이 거의 다 모였으므로 내가 덕이 없고 어리석더라도 소강(小康)을 바랄 수 있는데, 이제 난망(亂亡)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경들은 할 말을 다하기 바란다."

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시는 것이 지극하십니다. 신이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를 담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디 재주와 국량이 없는 데다가 노병(老病)이 날로 심하여 국청(鞫廳)·비국의 회좌(會坐)에 모두 참여하지 못하고 명초하실 때에만 겨우 들어올 수 있는데, 마침 국사가 위급하기 때문에 감히 사퇴하지 못할 뿐입니다. 군현이 다 모인 것은 과연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장현광(張顯光)으로 말하면 산야 사람으로서 이제 또한 왔으니, 백성의 향배(向背)는 진실로 알 수 없으나, 선비의 마음이 굳게 맺어질 것은 이미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참으로 만나기를 원했는데, 이제 다행히 만났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에게 병이 없더라도 여든 살에 조정에 있는 것은 사대부의 염치에 관계되는데, 더구나 병이 깊은 데이겠습니까. 도체찰사를 이미 갈도록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한번 도문(都門)을 나가서 방비하는 대책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국내의 역적은 천고에 없었던 것이니 어찌 다시 이런 변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서쪽 변방의 일이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관한 대책은 이성구(李聖求)에게 전임시켰으나, 강도는 한 구석진 곳이므로 온 나라를 호령하기에 어려울 듯합니다. 사변이 있을 경우 원자(元子)는 남한 산성에 들어가면 중앙에 있으면서 절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 산성은 쉽게 축조하기 어려울 듯하니, 이제 이서(李曙)를 장수로 정하여 성을 쌓는 일을 전담시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죽기 전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체찰사(副體察使)와 처리하고 싶으니, 오늘 계책을 정하기 바랍니다."

하고, 좌상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신이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강도의 보장과 남한 산성이 동서에서 서로 응하여 급할 때에 힘이 될 수 있는 방책에 대해서 갖추어 장계하였으나 말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우상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큰 계책입니다. 옛날 백제(百濟)의 임금도 이 성에 있었으니 이제 수선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백성을 괴롭히고 대중을 동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류(金瑬)는 아뢰기를,

"대중을 동원시키는 일을 할 수 없으니, 먼저 그 공정(功程)을 헤아린 뒤에야 미리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찬성 장만(張晩)은 아뢰기를,

"영상의 생각은 도망했던 포수(砲手)들에게 속죄하는 것으로 성을 쌓게 하려 하나,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대개 포수들은 본시 놀고 먹는 사람인데 성을 쌓는 일을 전담시키면 반드시 원망을 일으킬 것이고, 또 큰 일을 홀로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형편상 백성의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오랑캐를 피하는 방책은 강도를 주로 해야 하는 것으로서 만약에 두 곳에 모두 일을 일으키면 힘이 나뉘어 쉽게 성취되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심열(沈悅)은 아뢰기를,

"성을 쌓는 일은 매우 크므로 백성을 번거롭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을 쌓게 한다는 명령을 들으면 민심이 반드시 먼저 놀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서가 나가서 살펴보려 하는데 필시 그 공역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번에 강구하여 정하는 일은 적을 피하려는 계책이지 적을 막으려는 계책이 아닌데, 적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이번에 도성을 떠났던 계책은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왔던 것인데 한번 도성 문을 나간 뒤로 관부(官府)의 문적(文籍)과 기계(器械)·양향(粮餉)이 일시에 죄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하늘이 묵묵히 도와서 광복(匡復)할 수 있었는데 이제 또 적을 피할 방책을 먼저 강구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신은 전에 경기 감사였으므로 남한의 형세를 잘 아는데, 그곳에 대가(大駕)가 멈추려면 영조(營造)하고 수선해야 할 일이 많을 뿐더러 공역이 커서 쉽게 성취하지 못할 형세이므로 산성의 일은 결코 할 수 없으니, 사람을 보내어 가보도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적을 막는 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인데, 1만의 군사를 정하게 뽑아 목장의 말을 나누어 주고 늘 조련시키면 급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기병(騎兵)은 본디 정하게 뽑아야 하겠으나, 양향이 모자라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도감의 포수도 먹이기 어려운데, 더구나 새로 뽑는 기병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호조 판서에게 묻기를,

"양향은 장만할 수 있는가?"

하자, 심열이 아뢰기를,

"지금 세입(歲入)을 줄이고 있으므로 군향(軍餉)을 장만해 낼 수 없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조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수(元帥)가 앞에 있으니 소견을 말하라."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이시발(李時發)이 전에 황해도의 별승군(別勝軍) 3천 인을 뽑아 힘써 훈련하였으므로 이제 쓸 만한 군사가 되었고, 또 이원익이 관서(關西)의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영포수(營砲手)를 따로 뽑았는데 지금도 그 규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힘을 얻은 것은 오로지 이 두 군사에 의지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연소한 대간들이 함부로 자기들의 뜻을 가지고 어지러이 논계하는데 대신과 상의해서 한 것인가?"

하니, 영상·좌상이 아뢰기를,

"대간이 반드시 대신의 논의를 봉행한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죄를 입은 무리는 용서해 주는 범주에 들어 있어야 했는데, 곧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그만두었습니다. 대간이 법을 지키는 논의에 있어서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임금이 대궐로 돌아오신 경사를 당하였으니 널리 은택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상용(金尙容)은 아뢰기를,

"온 도성 안의 백성이 거개가 역적 이괄에게 붙었었는데, 왕법으로 논하면 본디 죽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모두가 의구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니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지난해에 죄를 입은 사람은 누구인들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팔방이 같이 경하하는 이때를 당하였으니 죄를 풀어주는 은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대간이 대신에게 묻고서 이런 계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을 방면하여 용서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폐모(廢母)한 사람은 본디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적에게 붙은 자 가운데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은 논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사대부로서 적에게 붙은 자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간이 모든 일을 대신에게 묻는다면 또한 간관의 풍채가 아닌데, 상의 하교에 망언이라고까지 하신 것은 간관을 우대하는 도리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적을 따른 사람을 낱낱이 치죄한다면 폐조 때와 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어떻게 처치해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신흠이 아뢰기를,

"진실로 너그러이 용서하여 죄를 씻어 주어야 하겠으나, 사대부로서 역적을 따른 자는 용서할 수 없을 듯합니다. 명나라 태조(太祖) 때에 주살(誅殺)이 매우 많았으니 어찌 원망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태조가 여러 번 출사(出師)하여 친히 오랑캐를 쳐서 위엄을 떨쳤으므로 백성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조(世祖) 때에도 주살하는 것으로 위무(威武)를 떨쳤는데 말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을 곧바로 진정시켰고, 성종(成宗) 때에도 문성군(文城君)의 변란이 있었으나 마침내 토평하였습니다. 대개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에는 조정의 조처에 혹 알맞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백성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세대에는 한 가지 잘못이 있더라도 백성이 문득 원망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시세는 마치 사람이 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려는 것과 같아서 우연히 작은 병을 얻더라도 곧 죽게 될 것이니, 널리 혜택을 베풀어 빨리 옥사를 끝내야 하겠습니다."

하고, 정경세(鄭經世)는 아뢰기를,

"기익헌(奇益獻)의 죄는 반드시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가 정성을 보낸 글은 뒷날의 여지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반드시 일이 이루어지면 부귀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흉역(兇逆)을 도와 못하는 짓이 없다가 그 형세가 궁해진 뒤에야 목을 베어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의 애초의 마음 먹은 것이 이러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이제 죽이지 않는다면 난신적자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신흠이 이른바 주살함으로써 진복(鎭服)한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인심을 기쁘게 하는 데에 힘쓰고 백성의 힘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의(擧義)한 처음에 호령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이 지금까지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제향(祭享)과 진상(進上)의 물품을 모두 줄였다 하니, 이것은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정사입니다. 그리고 기인(其人)의 가포(價布)에 대해서 당초에 신이 아뢴 말대로 감면하라는 영이 있었으나, 단지 반 필만 줄이고 세 필은 그대로 두어서 줄인 것이 너무 적으니, 이제 다시 줄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듣건대, 선조(先朝)의 나인(內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 집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하므로 이로부터 대궐 안에 온돌이 많아졌다 하니, 마루방으로 바꾸면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인의 나무는 대궐 안에 쓰이는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선왕의 후궁과 아직 가취(嫁娶)하지 않은 왕자(王子)의 집에도 모두 나누어 보낸다. 그런데 그 용도를 전일에 줄인 것이 많았는데 가포를 반 필만 줄였다고 하니, 어찌 이렇게 적은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대비전(大妃殿)의 어공(御供)은 줄일 수 없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종묘의 제향도 줄였는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혼자 진상을 받겠는가.’ 하신 말씀이 지극하시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분부는 매우 성대한 뜻이나, 아랫사람의 도리로서는 따르기 어려울 듯하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대체로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니, 자전께 공봉(供奉)하는 물건은 줄이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하자, 김상용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도 오윤겸과 같습니다."

하였다. 정경세는 아뢰기를,

"자전께 진상하는 것을 줄이지 않는 것은 이른바 입과 몸을 봉양한다는 것이고, 진상을 줄이는 것은 이른바 뜻을 기른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지방에서 진상하는 것은 자전의 분부대로 줄여도 괜찮겠으나, 일용의 공상(供上)은 줄일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종한 사람을 녹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녹공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젊은 신진들에게는 따로 상전(賞典)을 베풀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심열·김류·정경세도 모두가 녹공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김효신(金孝信)한명련(韓明璉)의 중군(中軍)으로서 강작(康綽)을 베어가지고 신에게 귀순하였고, 유순무(柳舜懋)·이탁(李𤣯)·이신(李愼)·이윤서(李允緖) 등은 4천의 군사를 데리고 일시에 와서 귀순하였습니다. 적의 대세가 이로부터 꺾였으니, 이들은 녹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훈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김효신은 어떻게 처치해야겠습니까?"

하자,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김효신은 원래 적에게 함몰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죽었으니, 유순무 등에게 비교하면 더욱 가상합니다."

하였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이시애(李施愛)의 변란 때에 잡혀서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도 훈적에 참여되었으니, 김효신은 이에 따라 녹훈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장만이 아뢰기를,

"이시발(李時發)은 신과 함께 시종 일을 같이 하였으니 본디 경중을 논할 것이 없고, 김기종(金起宗)은 신의 종사관으로서 가장 공로가 있으며 이민구(李敏求)·김시양(金時讓)·남이웅(南以雄)·최현(崔晛) 등도 모두 녹공할 만합니다. 이 사람들을 녹공하지 않는다면 신이 어떻게 혼자 훈적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삼공이 모두 아뢰기를,

"녹훈하는 일은 원훈(元勳)에게 맡겨야 합니다. 신들이 어떻게 전진(戰陣)에서 있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나 상의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당초에 원수를 내려 보내어 변방의 일을 처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싸움터에서 분주할 즈음에 병이 생길까 염려되었다. 이제는 얼음이 풀렸고 변방의 일이 조금 늦추어졌으니, 가을이 되거든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윤방김류가 아뢰기를,

"중앙에 있으면서 절제할 수 있으니, 내려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지난번 행조(行朝)에 계실 때 윤황(尹煌) 등의 차자에 답하신 내용에 훈신을 모해한다는 분부까지 있었습니다. 윤황은 종묘 사직이 파천하는 것을 보고서 울분을 견디지 못하여 그런 차자를 올렸던 것이니, 중도에 지나쳤다고 할 수는 있으나 모함한다고 하는 것은 실로 그의 본정(本情)이 아닙니다. 왕언(王言)이 어찌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李貴)는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가 아니었으니 군율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처럼 차자를 올렸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옛날 사람은 배 안에서도 《대학》을 강독하였습니다. 6∼7건(件)의 《논어》를 지금 이미 모았으니, 이제 경연을 열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야 하겠다."

하였다. 상이 승지 홍서봉에게 이르기를,

"전에 도원수가 하사받은 은(銀)을 부체찰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에 내가 따로 주겠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은 30냥을 부체찰사 이시발에게 내리고 20냥을 독전 어사(督戰御使) 최현(崔晛)에게 내리라."

하였다. 그뒤 삼공이 장만의 말대로 이시발 등 여섯 사람을 모두 녹훈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군진에서 역전한 사람만을 녹훈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만이 다시 상소하기를,

"이시발이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쳐서 안현(鞍峴)의 싸움을 약속한 것은 모든 군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종사관 김기종안현에서 교전할 때에 혼자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 직접 장수들을 독촉하여 큰 공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남이웅은 끊임없이 군량을 운송하여서 군사들이 굶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민구·김시양·최현 등도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한 공효가 없다고 할 수 없는데 혹 일에 앞서 출사(出使)하거나 남의 막하(幕下)에 있었으니 인원이 너무 많은 것을 꺼린다면 혹 의논할 여지가 있습니다마는 이 세 사람은 그 공로가 이러한데 신만이 무슨 낯으로 감히 종정(鐘鼎)의 영예를 차지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이 소(疏)를 대신에게 내려 특별히 신의 훈명(勳名)을 삭감하고 세 사람을 추록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한 사연에 대해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9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진상(進上) / 재정-역(役)

○夕, 上又御資政殿, 引見三公及備局諸臣。 上曰: "朝廷之上, 群賢幾乎畢集, 予雖寡昧, 猶可望其小康, 而今則將不免亂亡, 幸諸卿盡言之。" 領議政李元翼曰: "自上勵精圖治至矣。 臣待罪首揆, 非不欲擔當國事, 而素無才局, 老病日甚, 鞫廳備局之坐, 皆不得參。 惟於命招時, 僅得入來, 直以國事危急, 不敢辭退耳。 群賢畢集, 果如聖敎, 至於張顯光, 以山野之人, 今亦來詣。 民之向背, 固未可知, 而士心固結, 則已可見矣。" 上曰: "予固願見, 今幸見之。" 元翼曰: "臣雖無疾病, 八十立朝, 有關士夫之廉隅, 況臣疾病沈痼者乎! 都體察使, 旣不許遞, 則臣欲一出都門, 以試防備之策耳。 域中之賊, 此固千古之所無, 豈容再有此變! 但西邊之事, 極可憂也。 江都保障之策, 專委李聖求, 而江都一偶, 似難號令。 域中如有事變, 元子入南漢山城, 則庶可居中節制。 但南漢山城, 似難容易築之。 今宜以李曙定將, 專委築城之責, 則可趁冬前, 得以畢役矣。 臣請以未死前, 得盡心力, 與副體察使料理爲之, 願今日定計。" 左相尹昉曰: "臣曾爲京畿監司時, 以江都保障南漢山城, 東西猗角, 緩急得力之策, 具由將啓, 而言不見施矣。" 右相申欽曰: "南漢築城, 國之大計。 在昔百濟王, 亦居是城。 今不可不爲修繕, 而但不可勞民動衆也。" 兵曹判書金瑬曰: "動衆則不可爲也。 先量其功程然後, 可以預爲料理矣。" 右贊成張晩曰: "領相之意, 欲以逃亡砲手, 贖罪築城, 非計之得也。 蓋砲手輩, 本是遊食之人, 若專委城役, 則必生怨咎。 且難獨當大役, 勢將用民力也。 避胡之策, 當以江都爲主, 若兩處竝擧, 則恐力分而事未易就也。" 戶曹判書沈悅曰: "築城之役, 極爲浩大, 勢不得不煩於民。 若聞築城之令, 則民心必先驚駭矣。" 上曰: "李曙將爲出審, 必能量其功役, 可待其還而議定也。" 上又曰: "今此講定者, 乃避賊之策, 而非禦賊之策也。 如欲禦賊, 當若之何?" 禮曹判書李廷龜曰: "今番去邠之策, 出於不得已, 而一出都門之後, 官府文籍、器械、糧餉, 一時蕩然, 猶幸天心默佑, 得見匡復。 今又先講避賊之策, 非計之得也。 臣曾爲京圻監司, 詳知南漢形勢, 如欲駐駕其處, 則必多營造修繕之事, 工役浩大, 勢未易就。 山城之役, 決不可爲, 不必使人往視也。 惟當講求禦侮之策, 精抄一萬兵, 分給牧場馬, 常加組練, 則緩急庶有所賴。" 曰: "騎兵固當精抄, 而但患糧不足耳。" 都監砲手, 猶難餽餉, 況此新抄之騎兵乎?" 上問戶判曰: "糧餉可得措辦耶?" 曰: "今方裁減歲入, 恐無以辦出軍餉耳。" 上曰: "調兵不可不爲, 元帥在前, 可言其所見。" 曰: "李時發曾抄黃海道, 別勝軍三千人, 着力組練, 故今爲可用之卒。 且李元翼爲關西方伯時, 別抄營砲手, 至今仍行其規。 今番得力, 專賴此兩軍耳。" 上曰: "近來年少臺諫, 妄以己意, 紛紜論啓, 未知, 與大臣商議爲之乎?" 領、左相曰: "臺諫若必奉行大臣論議, 則必有後日之弊。" 曰: "上年被罪之輩, 當在原宥之列, 而旋以臺論寢之。 臺諫執法之論, 安得不爾? 然當此回鑾之慶, 廣加恩澤宜矣。" 金尙容曰: "滿都人民, 皆附賊, 論以王法, 則固當誅夷, 而但人人皆懷疑懼之心, 非細慮也。 上年被罪之人, 孰無自作之孽乎? 然當此八方同慶之時, 宜有雷雨之澤也。" 上曰: "意其時臺諫, 問于大臣, 而有此啓辭也。 其放赦之。" 曰: "廢母之人, 固難容易放之, 至於附賊中愚下之民, 雖不當論, 而至於士夫附賊者, 則不可赦也。 且臺諫若每事稟於大臣, 則亦非諫官風采, 而上敎至謂之妄言, 甚非優待諫官之道也。" 上曰: "從逆之人, 若一一治罪, 則恐與廢朝時無異, 何以處之?" 曰: "固宜寬假蕩滌, 而士夫從逆者, 似難容貸。 大明 太宗時, 誅殺甚多, 豈無怨懟者, 而太宗屢度出師, 親討戎庭, 威稜震疊, 故民不敢動。 至於光廟時, 亦以誅殺爲威武, 而末年李施愛之變, 旋卽底定。 至於成廟時, 亦有文城君之變, 終乃討平矣。 大槪國勢堂堂之時, 則朝廷施設, 雖或有不中者, 而民不敢怨。 若其衰微之世, 則一事失誤, 民輒怨咎。 今之時勢, 如人老病, 氣息奄奄, 偶得微恙, 則輒至於死矣。 當廣布惠澤, 急速完獄也。" 鄭經世曰: "奇益獻之罪, 必當誅之。 其送款之書, 不過爲後日之地, 其心必以爲, 事成則富貴, 事不成則猶可免死。 是以, 始則贊助兇逆, 無所不至, 而及其勢窮之後, 始爲斬來, 其初設心, 不過如此。 今若不誅, 則亂臣賊子, 將接迹而起矣。 申欽所謂以誅殺鎭服者此也。 今日之事有二焉, 務悅人心, 寬假民力也。 擧義之初, 號令失信, 故民至今怨咨。 今聞祭享進上, 皆已減損, 此寬民之政也。 且其人價布, 當初以臣之言, 已有蠲減之令, 而只除半匹, 仍存三匹, 所減太少, 今又更減可也。" 元翼曰: "臣嘗聞, 先朝內人輩, 皆言: ‘士夫家婢僕, 尙處溫堗, 以內人而處板房可乎?’ 自此關內多溫堗。 若代以板房, 則可省冗費。" 上曰: "其人之木, 非特闕中, 所用處多也。 至於先王後宮及未嫁娶王子家, 亦皆分送矣。 前日所減已多, 而價布只除半匹, 何若是少耶?" 上又曰: "大妃殿御供, 不可減損。" 元翼曰: "慈殿有曰: ‘宗廟祭享, 猶且減之, 予何心獨受進上?’ 云者, 至矣盡矣。 不可不承順。" 上曰: "慈殿之敎, 甚盛意也, 而在下之道, 似難奉承。" 吳允謙曰: "凡人事親之道, 宜無所不用其極, 慈殿供奉之物, 似不當減損也。" 尙容曰: "臣之所見, 與吳允謙無異。" 經世曰: "慈殿進上不爲減損者, 所謂養口體也。 減損進上者, 所謂養志也。" 上曰: "遠方進上, 依慈敎減損, 猶之可也。 至於日用間供上, 則不可減也。" 上曰: "扈從之人, 不可不錄功。" 元翼曰: "錄功則決不可爲也。 年少新進, 則別施賞典無妨。" 沈悅金瑬鄭經世皆曰: "不可錄也。" 曰: "金孝信, 以明璉中軍, 至斬康綽, 歸順於臣, 柳舜懋李𤣯李愼李允緖等, 以四千兵, 一時來歸, 賊之大勢, 自此摧沮。 此輩不可不錄勳也。" 上曰: "至於錄勳則似不可矣。" 晩曰: "金孝信, 何以處之?" 上問諸大臣, 元翼曰: "金孝信元不陷賊, 而秉忠至死, 比諸柳舜懋等, 尤可嘉矣。" 承旨洪瑞鳳曰: "李施愛之亂, 以被拘死節之人, 亦參勳籍。 金孝信, 似當依此錄之也。" 曰: "李時發與臣, 終始同事, 固無輕重。 金起宗以臣從事, 最有功勞。 如李敏求金時讓南以雄崔晛等, 皆可錄功也。 此人等若不得錄, 則臣何以獨參勳籍?" 上曰: "大臣之意如何?" 三公皆曰: "錄勳事, 當委元勳, 臣等何知戰陣間事乎?" 上曰: "雖然, 商議爲之可也。" 上又曰: "初欲下送元帥, 料理邊事矣。 但驅馳之際, 疾病如此, 今已解氷, 邊事稍緩, 待秋下送如何?" 尹昉金瑬曰: "可以居中節制, 不必下送也。" 經世曰: "頃在行朝, 答尹煌等箚, 至有謀害勳臣之敎, 目見宗社播越, 不勝憤憤, 有此陳箚, 謂之過中, 則可矣; 謂之謀陷, 則實非本情。 王言豈可若是哉!" 上曰: "李貴非領兵之將, 不當用律, 而如是陳箚, 故有是言矣。" 經世曰: "古人舟中, 猶講《大學》《論語》六七件。 今已裒聚, 可以趁今開筵。" 上曰: "可爲之矣。" 上謂承旨洪瑞鳳曰: "前者都元帥, 欲以賜銀, 分于副體察, 予答以別爲賜給之意矣。 其以銀三十兩, 賜副體察使李時發, 以二十兩, 賜督戰御史崔晛。" 後三公請依張晩之言, 李時發等六人, 竝錄勳。" 上不許曰: "只錄陣上力戰之人可矣。" 張晩復上疏曰: "李時發赤心徇國, 約束鞍峴之戰, 一軍所共知也。 從事官金起宗, 鞍峴交戰之日, 單騎馳入, 親督諸將, 克成大功。 南以雄運餉不絶, 使諸軍不至饑餓。 如李敏求金時讓崔晛等, 亦不可謂無竭誠盡心之效, 而或先事出使, 或在人幕下。 若嫌於太多, 則容或可議, 前此三人, 其功勞如此, 臣獨何顔, 敢當鍾鼎之榮? 伏乞下臣此疏于大臣, 特減臣勳名而追錄三人。" 答曰: "疏辭, 當議處焉。"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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