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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23일 정미 2번째기사 1624년 명 천계(天啓) 4년

예조가 종묘 사직의 제사와 공물을 줄이는 것에 대해 건의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큰 변란을 치른 뒤에는 반드시 절약을 한 다음에야 재물이 손상되지 않고 백성이 해를 받지 않아서 광복(匡復)의 사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위 문공(衛文公)이 초구(楚丘)에 있을 때에 거친 베옷을 입고 거친 깁으로 만든 관을 쓰고서 재물을 증식하기에 힘쓰고 농사를 힘쓰도록 가르쳤는가 하면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임진년의 변란을 당하고 환도한 뒤에 궁부(宮府)의 용도를 죄다 줄여서 중흥의 공렬을 이루셨으니, 이것은 오늘날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국가가 혼란을 겪은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어 도탄 속에서 울부짖는데 반정한 뒤에도 정령(政令)이나 시설이 민심을 크게 위안시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군사를 일으키고 기근이 잇따랐으므로 중외가 몹시 빈곤하여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났습니다. 이어 역적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송하기에 팔로(八路)가 잇달아 소요하였고, 대가가 지나는 일로와 주필하는 곳에서 지공하는 비용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왔으므로 공사(公私)의 재물이 바닥이 나서 열흘 동안 먹을 저축도 없습니다. 더구나 가뭄이 혹심하여 봄갈이의 시기를 잃었으니, 앞날의 사세가 갖가지로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장(更張)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온갖 용도를 전일과 한결같이 한다면 살아남은 백성이 결코 지탱할 희망이 없을 것이니, 이제부터 종묘·사직·능침(陵寢)의 제향과 삼전(三殿)의 어공과 진상하는 방물과 아래로 모든 관원의 녹봉을 죄다 줄여서 한결같이 임진년 이후의 전례에 따르소서. 삭선(朔膳)의 진상은 본디 국초의 법제가 아니므로 평소에 있어서도 변통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이런 어지러운 때에는 더욱이 일체 혁파해야 하는 것이니, 모두 대신과 유사들에게 빨리 감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국가에서 명분이 없는 과거를 시행하여 선비들이 요행을 바라는 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대가가 주필한 곳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를 뽑는 것은 한 도(道)를 위로하여 기쁘게 하고 선비들의 마음을 용동(聳動)시키는 방도이므로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호종한 사인(士人)들의 경우는 혹 부형을 따라 간 자도 있고 직명을 띠고 간 자도 있어서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보답하는 법이 본시 있을 것인데 어찌 따로 한 과거를 실시하여 과목이 혼잡해지는 폐단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전일 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사자들에게 상께서 과거를 보이라는 명이 있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옳지 않다 하여 강력히 간쟁하여서 그만두었습니다. 이번에 대가를 호종한 사인은 그 충성스러움을 논하면 의병을 일으킨 일보다 못할 것인데 특별히 과거를 보이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인 듯합니다. 대가를 호종한 사인에게 과거를 보이는 일을 거행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종묘 사직의 제향은 줄이기 어려울 듯하다. 진상하는 일은 유사로 하여금 적당히 줄이게 하겠다. 과거를 보이는 일은 결코 식언(食言)할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자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8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재정-상공(上供) / 재정-진상(進上) / 재정-국용(國用) / 인사-선발(選拔)

○諫院啓曰: "自古, 國家承大亂之後, 必須痛加節約, 然後財不傷、民不病, 以成匡復之業。 如衛文公之在楚丘, 大布之衣, 大帛之冠, 務財訓農。 我宣廟値壬辰之變, 還都之後, 宮府調度, 悉皆減損, 以致中興之烈。 此今日之所當法也。 國家自經昏亂以來, 民窮財盡, 嗷嗷於塗炭之中。 反正之後, 政令施設, 未有以大慰民心者, 而加之以師旅, 仍之以饑饉, 中外赤立, 怨讟朋興。 經以逆竪稱兵, 徵兵運餉, 八路繹騷, 而大駕所經一路及駐蹕之所供頓之費, 皆出於民, 公私掃地, 無旬日之儲。 況旱乾方酷, 春耕失時, 前頭事勢, 萬端可憂。 今若不思更張之宜, 凡百用度, 一如前日, 則孑遺之民, 決無支保之望。 請自今廟社、陵寢祭享, 三殿御供、進上方物, 下至百僚俸廩, 悉從裁損, 一依壬辰後故事。 朔膳進上, 元非國初法制, 雖在平日, 猶當有所變通。 況此搶攘之時, 尤宜一切革罷, 幷令大臣及有司, 從速勘定施行。 國家不當設無名之科, 以啓士子僥倖之門。 大駕駐蹕之所, 設科取士者, 所以慰悅一道, 聳動士心, 猶之可也。 若扈駕士人, 則或有隨父兄而往者, 或有帶職名而行者, 其誠雖可嘉。 然自當有酬報之典, 豈可別設一科, 以貽科目混雜之弊乎? 前日擧義時士子輩, 自上有設科之命, 而朝議以爲不可, 力爭而止。 今此扈駕士人, 論其忠勤, 當在擧義之下, 而獨令設科, 事涉未妥。 請扈駕士人設科, 勿爲擧行。" 答曰: "廟社祭享, 似難減損。 進上事, 當令有司量減焉。 設科事, 決不可食言, 勿爲更煩。" 累啓, 從之。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8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재정-상공(上供) / 재정-진상(進上) / 재정-국용(國用)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