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 및 자전·중전의 피난과 대가의 호위 등에 대해 논의하다
밤에 대신과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정엽(鄭曄)이 먼저 도성(都城)을 떠나 피난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방금 기탄(岐灘)에서 패했다는 기별을 들었습니다. 사세가 전과 크게 다르니 국가의 대계는 만전의 방도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종묘 사직의 신주 및 자전(慈殿)·중전(中殿)께서는 먼저 강화(江華)로 거둥하시고, 대가는 천천히 사세가 변하는 것을 보아 진퇴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좌우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이론이 없었다. 삼공과 재신(宰臣)들이 말을 같이하여 청하기를,
"나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거둥하실 계모를 가지려면 먼저 세자를 세울 방책을 정하고서야 분조(分朝)하여 일으켜 회복할 일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니, 빨리 위호(位號)를 정하여 중외가 소망을 걸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아직 어리니 우선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영남으로 거둥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영남의 충의로운 선비 중에는 반드시 선뜻 호응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자가 있어서 이로 인하여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영남에 충의로운 선비가 많기는 하나 그 풍속은 문을 숭상하고 무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호남의 풍속은 대부분 무예를 숭상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이곳으로 거둥하시어 진무하고 수용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면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장유(張維)는 아뢰기를,
"공주 산성(公州山城)은 앞에 큰 강이 있어 형세가 매우 좋고 길도 멀지 않으니, 급히 들어가 점거하고 있으면서 형세를 보아 진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신은 자전을 호종해야 할 것이나 구구한 견마(犬馬)의 정성은 연하(輦下)를 멀리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신은 대가를 따라 조석으로 가까이 있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하였다. 정엽이 아뢰기를,
"이정구가 어찌 자전의 사신(私臣)이겠습니까.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고 또 지략이 많으니, 비국에 두어 군국(軍國)의 큰 일을 함께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어지러운 상황에 있더라도 원자(元子)의 강학은 잠시도 폐기할 수 없습니다. 강학청(講學廳)의 관원 중에서 정경세는 검찰사(檢察使)로 나가고 신과 이정구·정엽은 모두 대가를 호위하려 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원자를 모시고 그대로 강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이정구에게 자전을 호위하면서 그대로 원자를 가르치게 하라."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포수(砲手)들은 부모와 처자가 모두 경중(京中)에 있으므로 반드시 그들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떠나서 호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적이 성안에 들어오면 이들은 반드시 적에게 투항할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적병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장수에게 명하여 몰고 나가 목숨을 걸고 결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전라도의 군사에게 그대로 대가를 호위하여 가게 하면 그 형세가 순탄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장 신경진에게 도감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가서 맞아 싸우도록 명하였으나, 신경진이 가려 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신경진은 훈척(勳戚)의 무신으로서 금군(禁軍)의 사명(司命)이 되었으니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패망하면 함께 패망할 것인데, 어찌 나라가 패망하였는데도 혼자 보전할 수 있겠는가. 명을 받은 뒤에도 군사를 장악하고 지체하면서 즉시 출전하지 않았으니 그는 역시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몰랐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77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왕실-행행(行幸)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역사-사학(史學)
○夜, 引見大臣、備局諸臣。 大司諫鄭曄, 先請去邠曰: "卽聞岐灘之敗, 事勢大異於前。 國家大計, 宜思萬全之道。 廟社主及慈殿、中殿, 先幸江華, 大駕則徐觀事變, 以之進退可也。" 左右相顧, 無異辭者。 三公及諸宰, 合辭而請曰: "國事至此, 將有遷幸之計, 先定建儲之策, 然後可以分朝, 以圖興復之擧。 請亟定位號, 以係中外之望。" 上曰: "年尙幼稚, 姑徐可矣。" 鄭經世請幸嶺南曰: "嶺南忠義之士, 必有響應投袂而起者, 可以因此而恢復矣。" 金瑬曰: "嶺南雖多忠義之士, 其俗尙文而不尙武, 難以得力。 湖南之俗, 多尙武藝, 今計莫若行幸此地, 鎭撫收用, 則恢復可冀也。 張維曰: "公州山城, 前有長江, 形勢甚好。 道且不遠, 急往入據, 觀勢進退可也。" 李廷龜曰: "臣將扈從慈殿, 區區犬馬之誠, 不欲遠離輦下, 臣請隨大駕, 朝夕左右焉。" 上曰: "予亦不欲相離矣。" 鄭曄曰: "李廷龜豈是慈殿之私臣乎? 識見過人, 且多謀略, 請置備局, 共議軍國大事。" 從之。 吳允謙曰: "雖在顚沛之中, 而元子講學, 不可暫廢。 講學廳官員中鄭經世, 以檢察使出去, 臣及李廷龜、鄭曄, 皆將扈駕, 請以其中一人, 陪奉元子, 仍爲講學, 何如?" 上曰: "然則李廷龜使之扈衛慈殿, 仍爲敎誨元子。" 張維曰: "都監砲手父母妻子, 皆在京中, 必不舍去而扈從。 賊若入城, 則此輩必投賊, 此所謂藉寇兵也。 可趁此時, 命將驅出, 殊死決戰, 則猶可萬一得捷也。 且以全羅思歸之兵, 仍使扈駕而行, 則其勢順矣。" 上卽命大將申景禛統率都監軍兵, 急往迎戰, 景禛不肯行。
【史臣曰: 景禛以勳戚武臣, 爲禁旅之司命, 國存與存, 國亡與亡, 安有國敗獨全之理乎! 受命之後, 握兵逗遛, 不卽出戰, 其亦不知見危授命之義矣。】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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