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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1월 17일 임신 1번째기사 1624년 명 천계(天啓) 4년

문회·이우·권진 등이 이괄 등의 변란을 고하다. 이에 이들을 추국하다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신의 아비가 비명에 죽었으므로 반드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여겨 지난해 7월에 신에게 저희끼리 음모한 것을 말하기를, ‘무인(武人) 성우길(成佑吉)이 일을 수창(首唱)하여 우리 5∼6인과 유생(儒生) 정돈(鄭焞)·정찬(鄭燦)·성백구(成伯耉)·정방열 등이 학업을 익힌다는 핑계로 인성군(仁城君)의 이웃집에 모여 밤이면 들어가 뵈고 모의하였는데, 추대하는 일에 언급하면 자못 겸손하게 사양하며 「그대들은 다만 큰일을 이루라.」 하였다.’ 하기에 신이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어 그 동당(同黨)을 만나게 해주기를 요구했더니, 말하기를 ‘이전은 현재 일 때문에 시골에 내려갔으니 뒤에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전복(戰服)에 쓸 호문단(虎紋緞)을 장만하게 하므로 신이 가산을 기울여 수십 필(匹)을 사서 그의 소원에 부응해주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윤인발충주(忠州)에 내려가면서 서로 도우라는 서찰을 남겨두었는데, 곧 윤인발이부치(利阜峙)에서 안개 속에 도둑을 만나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고 다시 탐지할 길이 없으므로 정돈 등을 만나려고 다시 탐문하여 그 집에 찾아갔더니, 그 아비 정인영(鄭仁榮)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시국을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뒤로는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으니, 대개 신이 그 정상을 드러낼까 의심했던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이우정돈·정방열 등과 서로 친숙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우를 찾아가 만나서 윤인발의 흉모와 정인영에게 속임당한 정상을 자세히 말하고 그 모의한 것을 탐지하게 하였더니, 이우가 곧 허락하고 정방열과 함께 몰래 서로 왕래하였습니다. 하루는 정방열을 데리고 신의 집에 와서 잤는데, 정방열이 시국을 원망하는 시를 지으면서 이우에게 시구를 채워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신과 이우가 상변할 뜻을 지니고 있는가 의심하였으므로, 신들이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먼저 고변하였습니다."

하고, 이우가 공초하기를,

"문회에게 다그침을 받아 자주 정방열을 보러 갔는데, 짐짓 난언(亂言)을 하여 꾀었더니 드디어 그 정상을 실토하기를 ‘이괄·한명련·정충신·이익(李榏) 등이 지금 연결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지난 가을에 어떤 사람이 홍 승지(洪承旨) 집에 투서하기를 「이괄·정인영·유경종(柳慶宗)이 반역을 모의한다.」 하였는데 홍 승지가 그 글을 유경종에게 보였다. 이 때문에 이괄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반역할 모의가 더욱 굳어졌다.’ 하였습니다. 또 한준철(韓濬哲)이라는 자는 한희길(韓希吉)의 손자로서 평소에 서로 친했는데, 신을 불러 윤안형의 집에서 같이 자면서 신에게 계책을 말하고 일을 같이하기를 요구하므로 신이 곧 겉으로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윤안형 등을 불러 회의하였는데 권진·문회도 참여하여 듣게 하였습니다.

안형이 말하기를 ‘기자헌(奇自獻)이 반정(反正)한 처음부터 이시언(李時言)과 함께 이미 이 모의를 하여 이성(李𢜫)으로 하여금 주상(主上)의 명수(命數)를 논하게 하고, 또 한 왕자(王子)와 함께 이시언의 집에 모여 은자(銀子) 2천 냥을 이시언에게 주고 1천 냥을 성우길에게 주어 혹 도감(都監)의 군사를 모으기도 하고 무리를 불러 모으게도 하였다. 동참한 자는 성준길(成俊吉)·현즙(玄楫)·정충신·유비(柳斐)·안륵(安玏)·한명련(韓明璉)·한겸(韓謙)·김복성(金復性)·한계(韓誡)이문빈(李文賓)의 다섯 아들과 권충남(權忠男)의 아들인 권이균(權以均)·권필균(權必均)성효량(成孝良)과 그 아들 성철(成哲)한욱(韓頊)·윤상철(尹商哲)·허익(許䄩)·한흥국(韓興國)·한창국(韓昌國)·김극전(金克銓)·김극명(金克銘)이고, 문신(文臣) 전유형(全有亨)·윤수겸(尹守謙)·이용진(李用晉)·유공량(柳公亮) 등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한창국·한흥국·이광호(李光澔)·신득지(愼得智) 등은 기자헌이 흉격(凶檄)을 투입하였을 때에 십삼학사(十三學士)라 부르던 자이다. 이시언이 고변(告變)한 것은 본심이 아니라, 신득지가 그 모의를 누설하였으므로 일이 발각될까 염려하여 먼저 이유림(李有林) 등을 고하여 스스로 신임을 받으려 한 것일 뿐으로 그 모의는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전라 병사 윤숙(尹璛)은 왕자군(王子君)의 가까운 친족이므로 서방에 부방(赴防)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하여 그대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윤숙이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에 차출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근일 기자헌김정(金鉦)·남염(南濂)·조희형(趙希亨)이시언에게 잇달아 보내어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재촉하게 하고 전유형·윤수겸 등이 정돈한명련에게 보내어 본도(本道)의 감사를 죽이게 하고 한명철(韓明哲)현즙에게 보내어 원수(元帥)를 도모하게 하였으며, 이미 어인(御印)을 주조(鑄造)하여 왕자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한계가 일찍이 어떤 사람이 민씨(閔氏)가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는데, 왕자의 어머니가 곧 민씨이니 그 일이 매우 기이하다.’ 하였습니다.

정방열도 말하기를 ‘광해인왕산(仁王山)인경궁(仁慶宮)을 지었으니 반드시 이 궁의 임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윤안형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2월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정하였으니 공들은 반드시 무사를 모집하여 따라야 한다.’ 하니, 권진이 그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은화(銀貨)로 돕겠다.’ 하고 1천 냥을 허락하였는데, 윤안형이 또 문회에게 1천 냥을 요구하니 문회도 허락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정방열이 그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상변할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앞서 와서 고하고 정방열과 왕복할 서찰도 아울러 상달(上達)하였습니다."

하였다. 권진이 공초한 말은 대개 이우 등의 말과 서로 부합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윤안형이 말하기를 ‘이광영(李光英)이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있을 때에 외원(外援)하려 하였으며 광영이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체임되어서는 그 군사로 도우려 하였다. 그런데 또 갈렸으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하고, 한흔이 공초하기를,

"신과 정찬은 척분이 서로 두터우므로 신이 상경하였다는 말을 듣고 와서 보고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처형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와 일을 같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서 놀라와 대답할 바를 몰라 다만 묻기를 ‘이 일은 반드시 장자(長者)를 얻어서 주장하게 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느 사람인가?’ 하였더니, 정찬이 말하기를 ‘정승 기자헌(奇自獻)인데 유경종(柳慶宗)·유몽인(柳夢寅)·유약(柳瀹)·유위(柳韡)·유흠(柳𢡮)과 무장(武將) 이시언·성우길이 다 같이 모의하고 도감의 장관(將官)도 많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였는데, 신이 평소부터 정찬이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로 시골로 내려가다가 길에서 신대지(申大枝)유흠을 만났는데, 신대지는 신의 아비의 옛날 편비(褊裨)였으므로 길가에 앉아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뜻이 없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하겠는가.’ 하였더니, 대지가 말하기를 ‘너는 아직 요즘의 일을 모르는가? 오래지 않아 거의(擧義)하여 폐주(廢主)를 복위시킬 것이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은의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유흠이 이어 신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신이 일이 있다고 핑계대고 드디어 시골에 내려 갔는데, 그 뒤에 들으니 유응형(柳應泂)이 고변(告變)하여 유흠 등이 다 죽었다 하였습니다. 저번에 맏형의 아들 한준철(韓濬哲)이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이우·문회·윤안형 등이 요즈음 큰일을 꾀한다.’ 하기에 신이 멸족될 일을 하지 말라고 매우 꾸짖었습니다. 준철이 간 뒤에 재삼 생각하니, 준철의 말은 국가에 관계될 뿐더러 사가(私家)의 큰 화(禍)가 있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와서 고하였습니다."

하고, 정방열이 공초하기를,

"평소 이우와 서로 친했는데, 이우는 신에게 잇달아 화환이 있어 가사(家事)가 탕패(蕩敗)한 것을 보고 매우 후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신과 함께 선친의 묘소 아래에서 같이 잘 때에 이우가 말하기를 ‘요즈음 들으니 영남·호서에 큰 변이 있을 것이라 하는데, 청주(淸州) 사람 박동명(朴東明)·유대명(柳大鳴)진위(振威)의 무인(武人) 김제정(金濟鼎) 등이 고을 군사로 남쪽 군사를 응원하려 하니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나도 경중(京中)과 백운산(白雲山) 절의 중 수백 인을 불러 모아 서로 응원하겠으나 단약(單弱)한 것이 한탄스럽다. 정찬 형제는 한명련과 혼인한 집안이고 또 이전과 서로 친하니 만약 정씨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면 일이 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하였으나, 신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 반역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신이 정찬을 만나 이우의 반역을 꾀하는 정상을 말하였더니, 정찬이 말하기를 ‘오합지중은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 다른 한 곳에서 하는 일은, 철기(鐵騎) 10만이라도 못 당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그들과 합세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이우의 말을 이미 김자점(金自點)에게 고하였습니다."

하고, 윤안형이 공초하기를,

"한준철(韓濬哲)과는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준철이 천변(天變)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말뜻이 이상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네가 무슨 소견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였더니, 준철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시국을 원망하는 사람이다. 기자헌·이시언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보고 지금 거사를 꾀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너만 못해서 이런 생각을 갖겠는가.’ 하고, 이어 말하기를 ‘기자헌정명진(鄭名振)을 불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폐주(廢主)에게서 은혜를 받은 것이 두터운데 어떻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명진이 말하기를 「감히 공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드디어 이시언에게 가서 알리게 하니, 시언이 곧 허락하였다. 이튿날 스스로 시언의 집에 갔는데, 인성군(仁城君)도 미복(微服)으로 와서 동지 10여 인과 함께 통곡하고 맹약하였다. 인성은 백금(白金) 3천 냥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게 하고 기자헌유몽인은 격문(檄文)을 지어 도감의 장사(將士)에게 보냈다. 그리고 윤숙으로 하여금 호남(湖南)을 맡게 하였는데, 대개 윤숙은 거의(擧義)할 때 인성에게 뜻을 가졌었는데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마음에 불안을 품었기 때문에 인성이 비밀히 통한 것이다. 경외(京外)에서 모의에 참여한 자가 대략 3백여 인인데, 나처럼 복수하려는 사람은 이문빈·권충남의 아들들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곧 상변하려 하였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여 이제까지 참아왔습니다. 새해 들어 준철이 와서 말하기를 ‘어제 이우를 만났는데 일을 같이할 만하다.’ 하고 이어 신의 집에 함께 모여 잤습니다. 이우가 강개하여 큰소리로 심정을 토로하니, 준철이 말하기를 ‘그대가 일을 같이하려 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할 것인가?’ 하니, 이우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경성(京城)에서 불러 모은 자가 5백여 인이고 호서에서 온 자가 5백여 인이고 수원(水原)의 천총(千摠) 이승충(李承忠)이 거느리는 자가 3백여 인이고 포천(抱川) 등산(燈山)의 승군(僧軍)으로 정예한 자가 50인이니 이것으로 일으키면 족히 성공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이우가 말하기를 ‘경중에 한 장자(長者)가 있고 외방에 상신(相臣)이 있다.’ 하니, 준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리들이 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였습니다.

하루는 이우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모이기를 청하므로 가보니, 좌상(座上)에 두 사람이 있는데 문회·권진이었습니다. 신이 권진에게 묻기를, ‘이우의 말은 이미 들었는데 그대가 얻은 것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권진이 말하기를 ‘나는 심복같은 벗이 1백 인이 있으니 1백 인이 각각 친병(親兵) 10인을 거느리면 1천 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월 15일 저녁에 신이 이웃 사람과 달을 보고 돌아가는데 성탁(成琢)이 시국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에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우리 외삼촌 전회(全晦)는 평소 이용진과 서로 친한 사이인데 지금 이용진·윤수겸·전유형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한준철의 말과 서로 부합하였습니다. 신이 이우·권진에게 말하기를 ‘이용진 등 여러 사람의 모의를 우리가 알게 되면 함께 모의할 길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한준철이 신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이 일은 장차 드러날 것이므로 우리 얼숙(孽叔)이 상변하여 잡류(雜類)를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막으려 한다. 그런데 윤수겸 등이 꾀하는 것은 매우 크므로 장차 그 쪽을 따를 것이니, 너도 함께 상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따르지 않고 홀로 고하려 하였는데 이우·권진 등이 함께 상변하므로 한꺼번에 와서 고하였습니다."

하였다. 애초에 한흔김광소(金光熽)에게 역모를 누설하자 광소가 훈신들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광소를 나문(拿問)하였는데, 공초하기를,

"한흔은 신의 아내의 동생인데, 신의 병이 심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시골에서 문병하러 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신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근래 유응형·이시언의 두 옥사(獄事)에 대해 사람들이 다 부실하다고 의심하고 국청(鞫廳)에서도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끝까지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흉도(凶徒)가 법망에서 빠져나가 그지없이 난을 모의하고 있다. 하루는 유흠·신대지가 와서 나를 보러 와서는 느닷없이 말하기를 「이번 반정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서 인심이 따르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장차 다시 거의할 것이다. 너희 아버지도 죄없이 죽었으니 우리들과 일을 같이 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는가?」 하기에, 내가 그 모계(謀計)의 대강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문신(文臣)은 기자헌이 대장이고 유몽인·유경종이 다음이며, 무신은 이시언·현즙·성우길 등이 대장인데, 이시언은 여러 차례 도감의 대장이 되었으므로 뭇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 항왜(降倭) 50여 인이 그의 심복이며 반정 뒤에 죄받은 사람의 자제·노복으로서 서로 약속한 자가 매우 많고 도감의 장관(將官)도 많이 호응하고 있다. 우리들이 각각 초군(哨軍)을 거느리고 사사로이 훈련한다고 핑계대고 동쪽은 살곶이[箭串]에 주둔하고 서쪽은 연서(延曙)에 주둔하였다가 동서에서 함께 종가(鐘街)에 들어가 진치고 복수기(復讐旗)를 세우고서 도하(都下) 사람들을 타이르고 무리를 나누어 보내어 공신(功臣)들을 제거하면 기세가 웅장할 것인데, 조정에서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는가. 폐주를 맞이하여 복위하고 몇 달 뒤에 왕자 중에서 평소에 어질다고 일컬어진 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오늘날의 큰 계책이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한흔에게 묻기를 ‘왕자 중에 어진 자란 누구인가?’ 하니, 한흔이 말하기를 ‘인성의 아우 인흥(仁興)인데 인흥이 즉위하면 국가가 태평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흔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장차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에게 알려서 노병(奴兵)을 이끌고 경상(境上)에 와서 진압하며 조정을 협제(脅制)하여 구주(舊主)를 복위시키게 하고 우리들이 안에서 일어나면,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흔이 또 말하기를 ‘이선철(李先哲)·위정철(魏廷喆)이 반역을 꾀하다가 석방되었는데, 그들이 서방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겉으로 은혜에 감격하여 목숨을 바치는 체하면서 실은 그 간계를 부리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반역을 꾀한 무리가 살을 찔러 피를 내어 맹세하기를 「우리들이 불행하게 되더라도 맹세코 각자 스스로 죽고 서로 끌어대지 않는다.」 하였으니, 전후의 옥사에서 사실을 고한 자가 아주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흔이 신이 그 아비를 거두어 묻어준 것을 감사하게 여겨서 화기(禍機)를 알려 난병(亂兵)을 면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초에서 끌어댄 사람들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이괄·유비·정충신·윤숙 등은 나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갇힌 죄인 중에서 정인영·정찬·성백구·성철(成哲)·한준철·김정·성탁·한창국·한흥국·신승남(申承男)·신경남(申慶男)·이담(李澹)·이항(李沆)·권이균(權以均)·권필균(權必均)·성대익(成大翼)·윤상철(尹商哲)·민유장(閔有章)·한명철(韓明哲) 등은 모두 형신하였다. 정찬이 공초하기를,

"이괄이 비기(祕記)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딴 뜻을 품었는데, 남건(南楗)은 요술로 서로 친하고 남응화(南應華)는 망기(望氣)를 잘하여 이괄의 집에 가기(佳氣)가 있다 하였고, 윤수겸이괄이 갑자년 명수(命數)를 타고나 극히 길(吉)한 것으로서 한번 지휘하면 태평을 이루게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괄의 종손(從孫) 정석필(丁碩弼)에게서 들었는데, 신의 아비와 형이 다 이괄의 모계를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정인영은 이미 역모에 참여하여 들었다고 승복하였으나 실토하지 않았고, 한준철은 역모에 같이 참여한 것을 자복하였고, 성탁윤안형과 함께 모의하였다고 공초하였다. 성탁은 곧 처형하고, 정찬은 그대로 가두고서 여러 죄수를 빙문(憑問)할 바탕으로 삼고, 정인영은 미처 처형하기 전에 죽었고, 김정·한창국·한흥국 등도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정석필을 나래(拿來)하여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이괄의 내응(內應)은, 전라 감사 이명(李溟), 병사 윤숙, 강원 감사 윤안국(尹安國), 수원 부사 이경립(李景立)윤수겸(尹守謙)·전유형(全有亨)·성효량(成孝良)·오문갑(吳門甲)·김대현(金大賢)·신계영(辛啓榮)·조사언(趙士彦)·송경(宋璟)·손득일(孫得一)입니다."

하였는데, 이경립·윤안국·이명은 나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70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壬申/前敎授文晦、許通李佑、前僉使權聄、前參奉鄭邦說、忠義尹安亨、許通韓訢等, 詣闕上變。 卽推鞫於闕內。 晦供稱: "尹仁發, 以臣父死非命, 心必怨國, 上年七月間, 語臣以自中陰謀曰: ‘武人成佑吉首事, 而吾輩五六儒生鄭焞鄭燦成伯耉鄭邦說等, 托以隷業, 聚會于仁城君隣家, 夜則入謁謀議, 語及推戴, 則頗爲遜避曰: 「君輩第成大事。」 云。’ 臣問大將爲誰, 則曰: ‘李适擧義之日, 還家憤慨, 至於乘淚曰: 「吾爲人所欺, 乃作此事。」 自是有不軌之志, 與韓明璉三父子及鄭忠信同謀。 其子(栴)〔旃〕 , 與鄭焞鄭燦, 稱以遊山, 周行外方, 締結同事之人。 安邊倅姓人, 亦知其事云。’ 臣卽密告于諸勳臣, 以往復書札爲證。 仍求見其同黨則曰: ‘(李栴)〔李旃〕 方以事下鄕, 從當相見。’ 且令臣措備戰服所用虎紋叚, 臣傾家買數十匹, 以副其願。 未幾, 仁發下往忠州, 留書相勖, 旋聞仁發, 朝霧中, 遇盜死於利阜峙。 此人旣死, 更無詗知之路, 欲見鄭焞等, 更加探問, 尋往其家, 則其父仁榮遇之甚款, 多發怨時之言。 其後諱而不見, 蓋疑臣覺其情也。 臣曾知李佑, 與鄭焞鄭邦說等相熟, 往見李佑, 細言仁發凶謀及見欺仁榮之狀, 使之探得其謀爲, 卽許之, 與邦說潛相往來。 一日携邦說來宿臣家, 邦說作怨時之詩, 使足成。 旣而, 疑臣與李佑有上變之意, 故臣等恐事泄, 先告云。" 李佑供稱: "爲文晦所敦迫, 頻頻往見邦說, 故爲亂言以誘之, 則遂盡吐其情曰: ‘李适韓明璉鄭忠信李榏等, 方連結擧兵, 而前秋有人, 投書于洪承旨家, 言李适鄭仁榮柳慶宗謀反, 而洪承旨示其書於慶宗, 故等大懼, 反謀益堅云。’ 又有韓濬哲者, 希吉之孫, 素與相善, 招臣同宿於尹安亨家, 語臣以謀計, 要與同事, 臣卽陽許, 遂招安亨等會議, 而使權聄文晦參聽。 安亨曰: ‘奇自獻自反正初, 與李時言已爲此謀, 使李𢜫論主上命數。 且與一王子, 會時言家, 以銀子二千兩, 付時言, 一千兩付佑吉, 或募都監兵, 或招集徒衆, 同參者成俊吉玄楫鄭忠信柳斐安玏韓明璉韓謙金復性韓誡李文賓五子、權忠男以均必均成孝良及其子韓頊尹商哲許䄩韓興國韓昌國金克銓金克銘, 而文臣全有亨尹守謙李用晋柳公亮等, 亦預其謀。 韓昌國興國李光澔愼得智等, 自獻投凶檄時, 號爲十三學士者也。 時言告變, 非其本心, 以得智漏泄其謀, 故恐事覺先告。 李有林等, 以自取信而已, 其謀猶未已也。 全羅兵使尹璛, 卽王子君之切親, 故約以領率赴西軍上京, 仍以擧事, 適不差領兵之任, 故事遂沮。 近日自獻連遣金鉦南濂趙希亨時言, 以促師期。 有亨守謙等, 遣鄭焞明璉, 使殺本道監司, 遣韓明哲玄楫, 使圖元帥, 已鑄御印, 藏于王子家矣。 韓誠嘗夢, 有人言閔氏當得之, 王子之母, 卽閔氏, 其事甚異。 邦說亦曰: ‘光海仁慶宮仁王山, 必有此宮之主。’ 安亨曰: ‘吾輩定以二月擧兵, 公等須爲募武士以從。’ 權聄曰: ‘諾。’ 臣曰: ‘吾則當以銀貨相助。’ 許以千兩。 安亨又求千兩於文晦, 亦許之。 旣而, 邦說恐其言泄, 有上變之計, 故先此來告, 而與邦說往復書札, 幷爲上達云。" 權聄供辭, 槪與等所言相符, 而又稱安亨李光英江華府使時, 欲爲外援。 光英遞爲楊州牧使, 欲資其兵, 又見遞, 故不果云。 韓訢供稱: "臣與鄭燦有族分相厚, 聞臣上京, 來見曰: ‘汝父被刑, 豈能無怨! 與我同事如何?’ 臣聞來驚駭, 不知所答, 而第問: ‘此事, 必得長者爲主, 果何人耶?’ 曰: ‘奇相自獻, 而柳慶宗柳夢寅柳瀹柳韡柳𢡮及武將李時言成佑吉皆同謀, 都監將官亦多參謀矣。’ 臣素知輕薄無狀, 不信其言, 還爲下鄕。 路逢申大枝柳𢡮, 大枝卽臣父舊日褊裨, 班荊敍話, 謂臣曰: ‘汝無報父讐之意耶?’ 臣答曰: ‘雖有是心, 其將奈何?’ 大枝曰: ‘汝尙不知近日事耶? 不久當擧義復廢主矣。’ 臣曰: ‘若然, 則其恩宜如何報也。’ 𢡮仍勸臣勿行, 臣辭以事, 遂下鄕。 其後, 聞柳應泂告變, 𢡮等皆死矣。 頃者, 嫡兄之子濬哲, 來見臣曰: ‘李佑文晦尹安亨等, 近謀大事云。’ 臣峻責之戒, 勿爲滅族之事。 濬哲旣去之後, 再三思之, 濬哲之言, 非但關係國家, 將有私家大禍, 故不得已來告云。" 鄭邦說供稱: "素與李佑相善, 見臣連有禍患, 家事蕩敗, 周恤甚厚。 臣與同宿於先墓下, 曰: ‘近聞嶺南、湖西, 將有大變, 淸州朴東明柳大鳴振威武人金濟鼎等, 欲以邑兵應南兵, 事必成矣。 吾亦招募京中及白雲山寺僧數百人相應, 而但恨單弱。 鄭燦兄弟與韓明璉連姻, 又與(李栴)〔李旃〕 相厚, 若使兩招誘同志, 則事可萬全, 須使我得見。’ 臣不許, 仍諭以不可從逆之意。 臣見鄭燦, 言李佑謀逆之狀, 則曰: ‘烏合之徒, 不足成事, 別有一處所爲, 雖鐵騎十萬, 不能當也。 何必與此輩合勢, 然後可成大事乎?’ 臣以言, 已告于金自點矣。" 尹安亨供稱: "與韓濬哲自前相識, 上年秋偶得穩敍, 濬哲語及天變, 辭意異常。 臣曰: ‘汝有何所見而云然?’ 濬哲曰: ‘我則固怨時之人。 奇自獻李時言見天時、人事, 方謀擧事。 此兩人亦不及汝而有是意耶?’ 仍曰: ‘奇自獻鄭名振, 携手流涕曰: 「吾儕受恩於廢主厚矣。 安可不爲之地?」 名振曰: 「敢不爲公效死!」 遂令往報於李時言, 時言卽許之。 翌日自往時言家, 仁城君亦微服而來, 與同志十餘人, 痛哭而盟。 仁城發白金三千兩以募士, 自獻夢寅製檄, 而投都監將士, 使尹璛主湖南, 蓋璛於擧義之日, 意在仁城, 及今上踐祚, 心懷不安, 故仁城密通之也。 京外與謀者, 大略三百餘人, 而如我復讎人, 卽李文賓權忠男諸子也。’ 臣卽欲上變, 而未得端緖, 隱忍至今歲。 後, 濬哲來言: ‘昨見李佑, 可與同事。’ 仍與會宿於臣家。 慷慨大言, 吐露心情。 濬哲曰: ‘君欲與共事, 計將安出?’ 曰: ‘吾儕招募京城者五百餘人, 從湖西來五百餘人, 水原千摠李承忠所率三百人, 抱川 燈山僧軍精銳者五十人。 以此而起, 足以成功。’ 問主謀者爲誰, 曰: ‘京中有一長者, 外方有相臣。’ 濬哲曰: ‘然則與吾輩所謀, 一體也。’ 一日, 送人要來會, 座上有二人, 卽文晦權聄也。 臣問權聄曰: ‘李佑之言, 已聞之矣。 君所得幾許耶?’ 曰: ‘我有腹心之友百人, 百人各率親兵十人, 則可得千人矣。’ 正月十五日夕, 臣與隣人看月而歸, 成琢乃有怨時之言, 試問之則曰: ‘吾表叔全晦, 素與李用晋相善, 今與李用晋尹守謙全有亨謀逆, 其言與濬哲相符矣。’ 臣言于李佑權聄曰: ‘李用晋諸人之謀, 我將知之, 合謀有路矣。’ 昨日, 濬哲密言於臣曰: ‘此事將露, 吾孽叔欲上變, 除其雜類, 以杜人疑, 而尹守謙等所謀甚大, 將密從之, 汝亦可與之上變。’ 臣不從, 而將欲獨告, 李佑權聄等, 同與上變, 故一時來告云。" 初韓訢泄其逆謀于金光熽, 光熽密告于諸勳臣。 故至是拿問光熽。 其供辭曰: "卽臣妻之同生弟也。 聞臣病劇將死, 自鄕來問, 一夕密言於臣曰: ‘近來柳應泂李時言兩獄, 人皆疑其不實。 鞫廳亦不嚴刑窮治, 故凶徒網漏, 謀亂不已。’ 一日柳𢡮申大枝來見曰: ‘今番反正, 多殺無辜, 人心不服, 吾輩將復擧義。 汝父亦死於非罪, 可與吾輩同事, 復父之讐耶?’ 吾問其謀計大綱則曰: ‘文臣則奇自獻爲大將, 柳夢寅柳慶宗爲次, 武臣則李時言玄楫成佑吉等爲大將。 時言累爲都監大將, 爲衆所服。 且有降倭五十餘人, 爲其腹心。 反正後, 被罪人子弟奴僕相約者甚多, 都監將官, 亦多相應。 吾輩各率哨軍, 稱以私鍊, 東則屯於箭串, 西則屯於延曙, 東西俱入, 陣於鍾街, 建復讎旗, 曉諭都下, 分遣徒黨, 剪除功臣, 則氣勢旣壯, 朝廷誰敢不服? 迎廢主復位, 數月讓位于王子中素稱賢者。 此吾輩今日大計云云矣。’ 臣問於曰: ‘所謂王子中賢者, 誰耶?’ 訢曰: ‘仁城之弟仁興也。 仁興若卽位, 則國家當太平云。’ 又曰: ‘吾輩將通于姜弘立金景瑞, 使引奴兵而來壓境上, 脅制朝廷, 令復舊主; 吾輩從中而起, 則雖有智者, 不能爲之謀矣。’ 訢又曰: ‘李先哲魏廷喆謀逆而蒙放, 其自原赴西者外, 若感恩效死, 而實欲售其奸計, 朝廷不之知, 誠可笑也。’ 又曰: ‘謀逆之徒, 剌肌出血而盟曰: 「吾輩雖不幸, 誓各自死, 毋相援引。」 前後獄事, 首實者絶少, 以此也。’ 蓋感臣收葬其父, 告以禍機, 使免於亂兵故也。" 於是, 遂鞫問諸招所引之人, 而李适柳斐鄭忠信尹璛等, 命勿拿問。 就囚罪人中鄭仁榮鄭燦成伯耉成哲韓濬哲金鉦成琢韓昌國韓興國申承男申慶男李澹李沆權以均權必均成大翼尹商哲閔有章韓明哲等, 竝加刑訊。 供稱: "自言得秘記, 遂有異志。 南楗以妖術相善, 南應華善望氣, 以爲家有佳氣, 尹守謙甲子年命數爲極吉, 有一麾致太平之語。 此言聞於從孫丁碩弼。 臣父及兄, 皆知謀云。" 仁榮槪服預聞逆謀, 而猶不吐實。 濬哲自服同參逆謀。 亦以與安亨同謀納供。 卽正刑, 仍囚, 以爲憑問諸囚之地。 仁榮未及正刑而斃, 昌國興國等, 亦死於杖下。 丁碩弼拿來刑訊則供稱: "之內應, 全羅監司李溟、兵使尹璛江原監司尹安國水原府使李景立尹守謙全有亨成孝良吳門甲金大賢辛啓榮趙士彦宋璟孫得一云。" 李景立尹安國李溟, 命勿拿來。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7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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