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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11월 5일 신유 2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훈신들을 인견하여 술을 내리고, 사슴 가죽을 하사하다

상이 원훈(元勳)인 병조 판서 김류(金瑬), 우찬성 이귀(李貴), 호조 판서 이서(李曙), 수원 부사 이흥립(李興立), 부총관 신경진(申景禛), 이조 참판 최명길(崔鳴吉), 좌승지 김자점(金自點), 능성군(綾城君) 구굉(具宏), 첨지 심명세(沈命世) 등을 문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여러 훈신(勳臣)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자신의 몸을 잊고 이렇게 큰 공을 이룩하였는데, 내가 임금답지 못한 까닭에 국가가 날로 위태로워지니 진실로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각자 숨기지 말고 진술하라."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상께서 정성을 다하여 정치를 잘하시려 하고 조정의 신하도 모두 한때의 인재로서 너나 없이 분주하게 직책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의 일이 엉망이 되어 성상으로 하여금 아직도 밤낮으로 정사에 대해 근심을 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전하의 영특하고 밝으심은 천고에 뛰어났으니 뭇 신하들이 의논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하시고 크게 훌륭한 일을 해보겠다는 뜻을 분발하지 못하신 탓으로 국가의 형세가 날로 약해지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전하의 허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나의 재덕(才德)이 형편없는 까닭에 대소 신하의 의욕을 잃게 하고 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나라의 일이 지금에 이르도록 안정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신이 김류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사람을 쓰는 것은 신흠에게 부탁해야 한다.’ 하니 김류도 옳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또 이귀에게 말하니, 이귀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일을 시작한 사람이 마땅히 일을 끝내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가 맡아서 해야지 어찌 남의 손을 빌리겠는가.’ 하기에, 신은 그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신흠의 사람 쓰는 것을 보니 옛날 방식대로만 하여 어려운 시대를 크게 구제할 수 있는 솜씨는 못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뒤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들은 합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당색이 같은 사람도 공신 대하기를 다른 사류(士類)와는 달리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아무리 힘을 다해 주선했어도 모두 따라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의 손에만 맡겨두었더라면 사람을 등용할 때 필시 미진한 일이 많았을 것이니,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이귀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천근 무게 터럭에 매달린 것처럼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왕좌(王佐)의 재능을 갖춘 인물이 있었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절목(節目)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습니다. 삼공은 모두 인망이 있는 인물인데도 국사를 담당할 자는 없습니다.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성덕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治道)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오윤겸(吳允謙)은 식견이 두루 통하지는 못했어도 정성을 다하려는 마음만은 상당합니다. 다만 겸직한 것이 너무 많아 전조(銓曹)의 일만을 오로지 살필수 없으니, 의금부 같은 직책은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직 그 사람의 능찰(能察) 여부에 달려 있으니, 진정 그 임무를 잘 살피기만 하면 겸직한 것이 많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판서의 겸직을 체직시키는 문제는 참판으로서 청할 성격이 못되니, 거리낌없는 행동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가 인물의 장단점을 낱낱이 논하는 것을 보건대, 또한 한 시대의 인재를 경시하여 모두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하겠다.

하였다. 명길이 또 아뢰기를,

"옛날 군신의 사이는 정의(情意)가 친밀하여 아무 구애됨이 없이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절이 너무 엄하여 서로 만나는 것조차 드무니, 옛날의 일과는 매우 다르다 하겠습니다. 말씀드릴 것이 있으면 혼자서 곧 바로 들어가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신하를 인견하는 것도 침실에서 하든 마주 앉아 식사하면서 하든 모두 소대(召對)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꼭 용상(龍床)에 자리를 베풀고 승지와 사관을 갖춘 다음에 볼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는 의당 규례를 고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할 말이 있을 때 혼자 들어가야 하는가? 혼자 들어가게 되면 말한 것이 혹 공변되지 못할 폐단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여러 훈신과 조용히 서로 말을 주고받고는 이어 술상을 차려 술을 내리고, 각각 사슴 가죽 한 벌씩 하사하였다. 이에 앞서 이미 원훈(元勳) 10인에게 각각 은 백냥·금 두냥·비단 한 필·병풍 한 개를 하사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따로 하사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65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上引見元勳兵曹判書金瑬、右贊成李貴、戶曹判書李曙、水原府使李興立、副摠管申景禛、吏曹參判崔鳴吉、左承旨金自點綾城君 具宏、僉知沈命世等於文政殿。 上謂諸勳臣曰: "卿等, 皆忘身成此大功, 而因予不辟, 國日以危, 良用愧悼。 如有所懷, 各陳無隱。" 對曰: "自上勵精圖治, 朝臣皆一時人材, 莫不奔走率職, 而國事渙散, 致令聖上尙軫宵旰之憂, 此皆臣等之罪也。" 曰: "殿下英明冠古, 非群下所可議, 而未免因循舊習, 不能奮發大有爲之志, 國勢之日漸委靡, 此乃殿下之過也。" 上曰: "然。 緣予才德蔑如, 使大小解體, 是予之過也。" 鳴吉曰: "當初, 不料國事之至今未定也。 申欽爲吏判, 臣謂金瑬曰: ‘今日用人, 須屬於申欽。’ 金瑬以爲可。 又言于李貴, 曰: ‘不可。 始事之人, 當了其事。 吾屬自當爲之, 豈付他手?’ 臣以其言爲不是也。 及見申欽之用人, 循途守轍, 非弘濟艱難之手。 厥後異色之人, 不思同寅; 同色之人, 視功臣亦異於他士類。 臣雖竭力周旋, 而皆不肯從。 若但委其手, 則用人之際, 必多未盡之事。 到今思之, 李貴之言不無所見。 目今民心未定, 國危如髮, 若有一王佐之才, 則豈至如此? 李貴好爲大議論, 而節目踈脫; 金瑬持重而未有大識見。 三公皆人望, 而亦無擔當國事者。 中外之人, 皆以爲聖德至矣, 而臣僚不能奉行。 蓋殿下未得輔佐之臣, 故治道不立耳。 吳允謙雖無達識, 頗欲盡心。 但兼帶太多, 不能專察銓曹之事。 如義禁府, 則似當遞改。" 上曰: "惟在其人能察與否, 苟善察任, 雖多何妨?"

【史臣曰: "判書之兼帶, 非參判所可請遞, 可謂無所顧忌。 且觀其歷論人物之長短, 亦可謂輕視一世之人材, 而謂皆無出其古者矣。】

鳴吉又曰: "古者君臣之間, 情意親密, 出入言語, 無所拘禁。 今則禮節太嚴, 相接亦罕, 殊異乎古昔之事也。 如有所言, 雖獨直入, 亦無不可。 引見臣僚, 雖於臥內, 或於對食之際, 皆可以召對。 何必龍床設座, 備承旨、史官, 然後見之? 自上宜改規例。" 上曰: "此言是矣。 然如有所言, 何必獨入? 獨入, 則所言或有不公之弊矣。" 上與諸勳臣, 酬酢從容, 仍設饌宣醞, 各賜鹿皮一領。 先此, 已賜元勳十人, 各銀百兩、金二兩、錦叚一匹、屛風一。 至是, 又別賜。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65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