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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9월 14일 신축 1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주강에 《논어》를 강하다. 호패·폐조 후궁의 문제 등을 논의하다

상이 주강에 문정전에서 《논어》를 강하였다. 동지사 정엽이 아뢰기를,

"납기(納基)·납석(納石)한 무리들에게 상께서 반드시 그 값을 환급한 뒤에 그 상가를 개정하고자 하는데, 그 뜻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높은 벼슬을 받아서 오랫동안 많은 녹을 먹었는데 이제 와서 그 값을 다 보상하고서 개정하려 한다면 벼슬길이 어느 때에나 맑아지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찍이 졸렬한 계책을 진술하였거니와 백성이란 반드시 갖는 직업이 있는 것이어서 사민(四民)을 벗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교생으로서 글을 전혀 익히지 않는 자와 서얼로서 삼의사(三醫司)에 예속된 사람 가운데 쓸데없는 사람은 군역에 보충하거나 아니면 무학(武學)에 예속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상께서 전교하신 바 호패를 시행한 뒤에 군병을 뽑고 양전한 뒤에 선혜청을 설치할 수 있다는 말씀은 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패를 속히 시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점차 시세를 보아가면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검토관 김세렴(金世濂)이 아뢰기를,

"민심이 흩어진다면 백만의 정예병을 얻더라도 무익한 것입니다. 호패는 서둘러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엽이 아뢰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초두에 기강을 세워야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신은 이제 벌써 그 시기를 놓쳤다고 봅니다. 위로 성상으로부터 아래로 백관에 이르기까지 다 구습을 버리고 하나같이 당초 반교한 뜻에 따라 민력을 휴양한 뒤에야 국사를 잘 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정 초기에 폐조 때의 삼공·양사 중에 더러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는 자가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과거에 대한 일 한 가지만 해도 버젓이 사정을 두었는데도 대간이 원망을 떠안을 각오로 처리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 무오년066) 의 식년시를 적전 별시(籍田別試)에 통합한 것은 너무나 구차스러운 일인데 이는 모두 사정에 이끌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또 이경직(李景稷)은 그가 의주 부윤에 합당하다면 중신이 어찌 어버이를 그리는 사사로운 정이라는 등의 말을 상달하여 체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백창(鄭百昌)은 시장에서 일 처리를 경솔히 한 잘못이 있는데도 상께서 파직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외방 사람들이 반드시 상께서 백창를 친척이라 하여 두둔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 황정열(黃廷悅)은 한 왕손의 연고로 인하여 삼성 추국까지 하였으니 뒤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죄가 무겁다면 의금부에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의 죄를 적몰까지 하는 것은 과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성 추국에 관한 일은 경의 말이 옳다. 박자응은 그때 탐오가 심했던 자인데, 적몰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엽이 아뢰기를,

"폐조의 궁인 김씨(金氏)·임씨(任氏) 등은 죄악이 심한만큼 죽이는 것이 옳겠으나 후궁을 귀양보내는 일은 전고에 없는 일이니 법률로 헤아려 볼 때 미안한 듯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궁첩의 폐해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폐조 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김씨는 곧 이른바 김 상궁인데 일찍이 선조의 후궁으로 있다가 뒤에 폐주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무신년067) 선조의 승하 당시 약밥에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다. 적신 이이첨김씨에게 빌붙어 흉모 비계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내외의 크고 작은 벼슬이 모두 김씨와의 협의를 거친 뒤에야 낙점을 받았으므로 권세가 온 나라를 기울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대부로서 빌붙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이이첨·성진선(成晉善)의 부자·박홍도(朴弘道) 등인데, 김씨가 이들의 집을 무상 출입하였는가 하면 추한 소문이 파다하기도 하였다. 성하연(成夏衍)은 곧 진선의 아들이다. 진선이 처음에는 사류에 붙었다가 적신이 국권을 장악하자 아양을 떨며 애원하였고, 하연이위경(李偉卿)의 폐모소(廢母疏)에 가담하였다. 이 때문에 부자가 청환(淸宦)의 벼슬길에서 이름을 드날리게 된 것이다. 신유년068)이이첨이 원접사가 되어 서쪽으로 떠날 적에 진선의 손을 잡고 ‘서울의 일은 모두 공의 부자에게 부탁한다.’ 하였으나, 이첨김씨와 금이 조금 가자 진선 부자가 맨 먼저 이첨을 배반하고 남보다 더 강한 공격을 하니, 사람들이 다 더럽다고 침을 뱉았다. 김 상궁의 질서(姪壻)는 곧 이조의 서리(胥吏) 정정남(鄭正男)의 아들 정몽필(鄭夢弼)이다. 몽필이 아내를 여의고 김씨와 정을 통하였으므로 김씨가 늘 몽필의 집에 머물렀고 더러는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하였지만 폐주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몽필의 권세가 이때부터 혁혁해졌는데, 상신(相臣) 박홍구(朴弘耉)몽필에게 빌붙어 그를 마치 높은 손님처럼 대해 주었다. 이정원(李挺元)·박홍도 등은 이따금 그의 집에 찾아가도 명함을 드리지 못하였다. 정원이 이조 참의로 있을 적에 몽필을 인동 부사(仁東府使)에 의망하려 하자 몽필의 계부(季父) 정애남(鄭愛男)이 당시 이조의 정색리(政色吏)로서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마침내 의망하지 못하였다. 몽필이 남의 종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하였지만 사람들이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임씨는 곧 고 재신(宰臣) 임몽정(任夢正)의 첩의 딸이고 정씨는 곧 정사룡(鄭士龍)의 서손녀인데, 임씨·정씨의 사랑도 김씨에 버금갔다. 임취정(任就正)임씨의 숙부이고 정지산(鄭之産)정씨의 남동생이기 때문에 역시 권세가 대단하였으므로 많은 사대부들이 그에게 빌붙었다. 숙의(淑儀) 허씨(許氏)허경(許儆)의 딸이고, 원씨(元氏)원수신(元守身)의 딸이고, 홍씨(洪氏)홍매(洪邁)의 딸이고, 권씨(權氏)권여경(權餘慶)의 딸이고, 숙의 윤씨(尹氏)윤홍업(尹弘業)의 딸이다. 반정한 이튿날 김상궁몽필은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었고, 윤씨는 그뒤 문밖에서 죽임을 당했고, 정씨는 집에서 자살하였다. 임씨는 일찍이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이 고변당할 당시 두둔해 준 공이 꽤 있었기 때문에 용서받아 죽지 않았으므로 위리(圍籬)에서 폐주를 모시게 되었다. 그 나머지 홍씨·허씨·권씨·원씨는 다 중도 부처(中途付處)되었다. 이래서 정엽이 이렇게 아뢴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5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신분(身分)

○辛丑/上晝講《論語》文政殿。 同知事鄭曄曰: "如納基納后之類, 自上必欲給還其價而後, 改正其賞加, 此意甚盛。 而此類旣愛高官, 久享豐祿, 今欲盡償而改正, 則仕路何時可淸乎? 且臣曾陳拙計, 凡民必有所業, 而不出於四民之中, 如校生全不習文者及庶孽三醫司無用之人, 或充軍役, 或屬武學可也。 聖敎所謂號牌而後抄軍, 量田而後宣惠, 可行者極當矣。" 上曰: "號牌非不欲速行, 宜稍觀時勢而行之。" 檢討官金世濂曰: "民心若渙散, 則雖得百萬精兵, 亦無益耳。 號牌不可遽爾行之也。" 曰: "凡事必於初頭立紀綱, 可以做得。 臣以爲今已失其時也。 上自聖躬, 下至百僚, 皆革舊習, 一如當初頒敎之意, 休養民力, 然後國事可爲也。 且反正之初, 廢朝三公兩司, 或有仍行其任者, 寧有是理乎? 如科擧一事, 公然行私, 而臺諫不思任怨, 仍爲置之。 如戊午式年, 合於籍田別試, 甚爲苟且。 此皆率私而然也。 如李景溭若合義尹, 則重臣豈可以戀親私情之語, 上達遞改乎? 且鄭百昌有試場輕處之失, 而自上不許罷職, 外方之人, 必以爲聖上以百昌親屬而護之也。 且罪人黃廷悅, 以一王孫之故, 至於三省推鞫, 恐有後弊。 若罪重, 則自禁府嚴治可也。 朴自凝之罪, 至於籍沒, 亦似過矣。" 上曰: "三省事, 卿言是矣。 朴自凝其時貪汚之甚者, 籍沒何不可之有?" 曰: "廢朝宮人金氏任氏等罪惡甚重, 殺之可矣。 至如後宮被竄, 前古未有之事。 揆諸典律, 似爲未安。"

【史臣曰: 宮妾之害, 何代無之! 未有甚於廢朝者也。 金氏卽所謂金尙宮者也。 曾在宣廟後宮, 後爲廢主所寵, 戊申宣廟昇遐之日, 有藥飯置毒之說。 賊臣李爾瞻附托於, 兇謀秘計, 無不與同。 內外大小除拜, 皆圖於然後受點。 權傾一國, 士大夫之無恥者, 無不攀附, 而其中尤甚者, 如爾瞻成晋善父子、朴弘道之徒是也。 往來於此類之家無常, 或至醜聲騰聞。 夏衍之子也。 晉善初附於士類, 及賊臣當國, 搖尾乞憐, 夏衍參於李偉卿廢母之疏, 以此父子顯揚淸路。 辛酉爾瞻爲遠接使西行也, 執晋善手曰: "洛中之事, 一以付公父子。 及爾瞻少忤於金氏, 晋善父子, 首叛爾瞻, 攻擊甚於他人, 人皆唾鄙。 金尙宮之姪女夫, 卽吏曹書吏鄭正男之子夢弼也。 夢弼喪其妻, 與通, 恒留於夢弼家, 有時引入宮中, 而廢主不悟也。 夢弼權勢, 自此隆赫。 相臣朴弘耉附於夢弼, 待之如尊客。 如李挺元朴弘道之類, 時往其家, 不得通刺。 挺元爲吏曹參議, 欲擬夢弼 仁同府使, 夢弼季父愛男, 時以吏曹政色吏, 抵死爭之, 竟不擬。 夢弼奪人臧獲, 生人殺人, 惟意所欲, 人莫敢抗。 任氏卽故宰臣夢正之妾女也。 鄭氏士龍之孽孫女也。 之寵, 亞於任就正任氏之叔父, 鄭之産鄭氏之娚, 權勢亦盛, 士大夫多附於其家。 淑儀許氏 之女, 元氏 守身之女, 洪氏 之女, 權氏 餘慶之女也。 淑儀尹氏, 弘業之女也。 反正翌日, 斬金尙宮夢弼於軍門。 其後又賜死尹氏於門外, 鄭氏自死於家, 任氏曾於李貴金自點之被告時, 頗有救護之功, 故貸以不死, 得侍廢主於圍籬。 其餘, 皆配中道, 故鄭曄有此啓。】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5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