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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5월 22일 신해 1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폐세자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다 붙잡히고, 폐빈은 자결하다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가 위리 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실을 강화 부사(江華府使) 이중로(李重老)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즉시 별장 권채(權綵)와 중사(中使) 박홍수(朴弘秀) 및 데리고 있던 나인 막덕(莫德)을 붙잡아 들여 국문하였다. 막덕이 공초하기를,

"폐세자가 처음 위리 안치되었을 때 폐빈(廢嬪)과 같이 죽기로 약속하고는 미리 멱목(幎目)과 악수(幄手)를 만들어 놓고 15일이 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폐빈과 함께 목을 맨 것을 여종이 바로 풀어 주어 구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번에 가위와 인두가 서울에서 보내져 왔는데, 이것을 보고는 마침내 굴을 뚫겠다는 생각을 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빈으로 하여금 자루에 흙을 담게 하고는 방 안에 옮겨 두었는데, 시작한 지 26일만에야 일을 끝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도망쳐 나와 마니산(摩尼山)으로 가려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지니고 있던 서찰(書札)은 대개 재상(宰相)의 청탁 편지를 가탁한 것이었는데, 나루터를 통과할 때 엄중한 경계를 피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 이른바 ‘전일 우러러 호소하였다.’는 것이나 ‘서경병로(西坰病老)’등의 말은 모두가 거짓 지어낸 말들로서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위리 안치된 속에 있던 여종 향이(香伊)를 추후로 붙잡아 국문하였는데, 그 공초가 막덕의 것과 대략 비슷하였다. 권채박홍수 등은 모두 공초하기를,

"마음을 다해 철저히 엄밀하게 수직(守直)해 왔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굴을 뚫어 탈출하다니 정말 뜻밖의 일입니다."

하였다. 그때 마침 훈신(勳臣) 김경징(金慶徵) 등이, 유희분(柳希奮)의 집 종 이말질수(李末叱水)라고 하는 자의 종적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듣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체포한 뒤 국문하게 하였다. 그가 공초하기를,

"일찍이 권채와는 도감(都監)의 장졸로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그의 노비를 보내 전언하기를 ‘폐동궁(廢東宮)이 장차 굴을 뚫고 탈출하여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부디 두모포(豆毛浦) 뱃사람 가팔리(加八里)라고 하는 자로 하여금 배를 가지고 갑곶(甲串)으로 내려오게 해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배를 예약해 놓은 다음 먼저 권채가 있는 곳에 갔더니, 권채가 말하기를, ‘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폐동궁과 함께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국청에 보내어 신문하였는데, 말을 바꾸긴 하였으나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권채는 처음에 얼굴를 서로 모른다고 잡아떼었으나 대질하자 상당히 굴복하는 기색이 있었다. 권채말질수는 모두 장하에서 죽었다. 막덕향이는 형신(刑訊)한 뒤에 잔사(殘司)의 전복(典僕)으로 정속시켰다. 중사 및 사련인(辭連人) 엄향남(嚴香男) 등 4인은 모두 놓아주었다. 황해 감사 이명(李溟)은 폐인(廢人)이 소지하고 있던 서찰의 겉봉에 ‘황해 순영 서간(黃海巡營書簡)’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던 관계로 체포되었으나, 국청에서 ‘그 편지는 거짓 칭탁한 것으로 이명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니 선처하기를 청한다.’고 하자, 관작을 삭탈하여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때는 6월 5일이다.

변이 처음 일어났을 때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강화(江華)의 장계를 살펴보건대, 안과 밖에서 서로 일을 꾸민 것이 분명하니, 그 계책이 어찌 흉칙하고 참혹하지 않은가. 경들은 좋은 계책을 깊이 생각하라."

하니, 대신이 회계하기를,

"안과 밖에서 서로 일을 꾸민 점에 대해서는 과연 성상께서 언급하신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최근에 도하에서 유언비어가 날로 생겨나는데, 어떤 이들은 ‘역적 집안의 노복들이 아직까지 소속되지 못해 모두들 반측(反側)할 생각을 품고 이런 일을 빚어냈다.’고 합니다. 해당 원(院)으로 하여금 속히 이 일을 처리하게 하소서. 폐조의 외척이나 근속들로서 도성 안에 있거나 근도(近道)에 유배된 자들은 먼 변방으로 옮겨 보내야 합니다. 박승종(朴承宗)의 첩자(妾子) 3인이 현재 서울 안에 있으니 먼저 붙잡아 구속하고, 기타 근도에 있는 역적의 족속들은 모두 조사하여 유배지를 옮김으로써 밖에서 호응하는 음모의 씨앗을 근절토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감의 대장(大將)에게 영을 내려 더욱 엄하게 호위(扈衛)하도록 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는데, 호위는 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박승종의 아들 박자전(朴自全) 등 3인이 모두 함께 수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자응(朴自凝)의 예에 따라 나누어 정배되었다. 부사(府使) 이중로(李重老)는 대간의 논핵으로 말미암아 붙잡혀 왔다가 공초한 뒤에 풀려났다. 탈출하는 폐세자를 붙잡아 보고한 정병(正兵) 최득룡(崔得龍)은 통정 대부로 승진하고, 충순위(忠順衛) 김준남(金俊男)은 상당한 직에 제수되었는데, 이들 모두에게 종신토록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폐세자 가 체포된 지 3일째에 폐빈이 스스로 유배지에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는데, 호조로 하여금 옷과 이불을 보내게 하여 염습하고 여가(閭家)에 옮겨 빈소(殯所)를 차리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3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역(軍役)

○辛亥/廢世子, 自圍籬中掘地七十餘尺, 通於棘城之外, 乘夜跳出, 爲邏卒所捉。 江華府使李重老馳啓以聞。 卽拿致別將權綵、中使朴弘秀及所率內人莫德, 鞫問之。 莫德供稱: "廢世子初入圍籬, 與廢嬪約以同死, 預造瞑目、握手, 勺水不入口者十五餘日。 一日與嬪結項, 婢卽救解而免。 頃日, 剪刀引刀, 自京下來, 以此遂生穿穴之計, 親自掘土, 使嬪持囊盛土, 移置于房內, 積二十六日始畢, 卽爲跳出, 欲往摩尼山, 仍轉向伽倻山。 所持書札, 蓋假托宰相請簡, 欲免津渡防禁之計也。 書中所謂, 前日仰訴之言, 西坰病老等語, 皆是假稱, 實無其事。" 圍內婢子香伊追後拿鞫, 則所供與莫德大略相同。 權綵朴弘秀等, 皆供稱渠等盡心守直, 十分嚴密, 而自圍內穿穴跳出, 實出慮外云。 會勳臣金慶徵等, 聞希奮家奴李末叱水爲名者, 蹤跡可疑, 使補盜廳跟捕鞫問, 則供稱: "曾與權綵爲都監將卒, 有相知之分。 頃送其奴傳言, 廢東宮將掘穴而出, 乘船逃走, 須使豆毛浦舡人加八里爲名者, 將船下來于甲串, 依其言約船。 後先往權綵處, 言待船來到, 將與廢東宮登舡逃走云云。" 遂送于鞫廳訊問, 則變其辭說, 而猶不大異。 初言不相識面, 面質之時, 頗似屈伏。 末叱水, 皆死杖下, 莫德香伊刑訊後, 定屬殘司典僕。 中使及辭連人嚴香男等四人, 皆放送。 黃海監司李溟, 以廢人所持書札, 外面書黃海巡營書簡, 故被逮, 而鞫廳以爲: "其書似是假託, 非所知, 請加睿裁。" 乃命削職放送。 六月初五日也。 變生初, 下敎曰: "昨觀江華狀啓, 必是內外相應之事, 其計豈不兇且慘乎? 卿等宜深思善策。" 大臣回啓曰: "內外相應, 果有如聖慮所及。 近日都下訛言日興, 或謂逆家奴僕等, 未有所屬, 皆懷反側, 以致如此。 令該院急速區處, 廢朝外戚近屬, 或在都下, 或配近道, 宜移送荒裔。 朴承宗妾子三人, 方假息京中, 請先拿囚。 其他逆屬之在近道者, 竝査出移配, 以絶外應之萠。 且令都監大將, 嚴加扈衛。" 上從之, 而命勿扈衛。" 承宗自全等三人, 竝被囚。 至是, 依自凝例分配。 府使李重老, 因臺論被拿, 供招後放送。 捕告人正兵崔得龍, 陞通政階, 忠順衛金俊男除授相當職, 竝復其戶役終身。 廢被捕後三日, 廢嬪自縊而死於圍中。 令戶曹, 備送衣衾歛襲, 移殯于閭家。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3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역(軍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