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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5월 7일 병신 7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예조 판서 이정구를 불러들여 사묘에 대한 전례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예조 판서 이정구를 명소하여 이르기를,

"두 사묘(私廟)의 선비(先妣) 신위에 대해 아울러 고제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밖에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미처 강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생각으로는 고제를 병행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여겨집니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에게 고제하는 것도 꼭 예에 합치되는지의 여부를 모르는 판인데, 더구나 덕흥 대원군의 선비는 대수도 더 멀고 선왕의 후궁에 불과했으니, 어찌 꼭 고제를 병행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통 때 기일제의 경우에는 제사지낼 신위를 받들어 모시고 나와 거행하는데, 같은 사당 내에 모시고 있으면서 어떤 분에게는 행하고 어떤 분에게는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이나 예의상 모두 미안한 일이니,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될 듯싶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이번의 제사는 정침(正寢)에 모시고 나와 행해야 되는데, 어찌 사당 내에서 제사지낼 수 있겠습니까. 덕흥 대원군은 지금 만약 세상에 계실 경우 북면하시는 반열에 계셔야 마땅하니, 본래는 고제하는 예가 없습니다. 다만 선묘(宣廟)의 사친이시기 때문에 상께서 선묘의 뜻을 미루어 높이려고 하시는 까닭에, 감히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에게만 고하지 않고 고제를 병행하는 것이니, 이 뜻은 좋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비의 경우는 대수도 더 멀고 사가의 부인일 뿐이니, 고제를 아울러 병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하지 않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이번에 사묘의 선비 신위에 대해 친제한다면 결단코 고제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은 내가 친제를 드려야 마땅한데 먼저 관원을 보내 고제하고 다음에는 친제를 행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고제가 이처럼 지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친제를 드리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 바깥 의논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옛적에 선묘께서 덕흥의 묘(廟)에 제사지내려 하자 그 당시 삼사가 논집하였는데, 이이(李珥)만은 ‘친제를 드려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소신의 의견도 이이의 주장을 통론(通論)이라고 여기니, 오늘날 친제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신은 학문에 어두운데 마침 변례(變禮)를 강론해야 할 때를 당하여 제대로 절충하지 못하고 이론이 있게 하였으니, 정말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은 평생을 예학에 몰두해 온 사람인데 신과는 서로 절친하기 때문에 일찍이 더불어 이 일을 논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에는 지극히 난처해 하다가 고(考)라고 칭해 보려고도 하고 숙(叔)으로 칭해야 된다고 하기도 하다가 끝내는 ‘한 선제(漢宣帝)가 예를 잃었다.’는 정자(程子)의 의논에 마음이 움직였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남의 후계가 된 자는 그 사람의 아들이니 본생(本生) 부모에 대해서는 백숙(伯叔)의 의리를 지녀야 마땅하다.’는 별론(別論)이 있었습니다.

소신이라고 해서 어찌 또한 그가 말한 ‘남의 후계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되니, 손자가 할아버지를 잇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든 간에 부자 관계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자못 알지 못할 것은 전하께서 선묘의 아들이 되면 정원 대원군은 전하에 대하여 형제간이 되어야 마땅한데, 어떻게 백숙으로 부를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전하께서 선묘에 대해서는 부자의 도리는 있지만 부자의 이름은 없고, 정원 대원군에 대해서는 부자의 이름은 있지만 부자의 의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생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또 뒤를 잇는 그 가계(家系)에 아버지라고 부를 대상이 없게 되었고 보면, 천륜이 결여된 것이니, 이런 일은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정말 그렇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김장생이 생부에 대해 고(考)라고 칭하면 안 된다고 한 이면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의견이긴 합니다. 이는 대체로 친가에 대해 편중된 나머지 뒷날에 혹시라도 더 높이려는 의논이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이렇게 미리 예방하려는 논의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의견은 다릅니다. 이미 대원군으로 봉한 위에 현고(顯考)라고 신주에 쓰고 지자(支子)를 세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전하의 제문에도 고(考)라고만 쓰고 황(皇)자는 붙이지 않으며 또 자(子)라고만 쓰고 효(孝)자를 칭하지 않는다면, 큰 강령(綱領)이 이미 바르게 된 것입니다. 이번의 경우는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낼 때의 앞머리 말에 사용할 명칭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은 절목 사이의 일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관계된 것이 너무도 중할 일이고 보면 처음부터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도 예경(禮經)을 훤히 살피고 계시니 한(漢)·당(唐)·송(宋) 때처럼 사친에 편중되었던 잘못된 규례에는 구애받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쓰는 일은 겨우 초기(草記)를 만들었습니다. 한번 살펴보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으로는 먼저 제주(題主)에 대한 고제부터 행하고 바로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쓴 뒤에 비로소 관원을 보내 고제를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온당한 순서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비(聖批)에 ‘제주에 대한 일은 우선 정지하고 먼저 고제를 행하라.’고 분부하셨는데, 신은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주에 대한 일을 우선 정지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대원군의 봉호에 대해 전번 경연에서 관교(官敎)를 낼 것 없이 바로 신주에 쓰기로 결정했다 합니다. 도대체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쓰기도 전에 어떻게 고제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방제(傍題)에는 봉사(奉祀)하는 사람을 성상의 휘(諱)로 써넣어야 하는데, 지금 제문에는 효(孝)자를 쓰지 않으면서 여기에만 ‘효자 모가 봉사한다.[孝子某奉祀]’고 그대로 둔다면, 매우 어긋나게 되니 이것이 더욱 미안한 일입니다. 대체적으로 대원군이라 쓰지 않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도 역시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하기 어려운 일이면 잠시 정지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내간(內間)에서 봉사자(奉祀者)를 정하기 어렵다면 우선 방제를 쓰지 말고 기다리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먼저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쓰고 방제는 우선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제문의 앞머리 말에 정원 대원군에게는 ‘아들 국왕 휘가 삼가 신 모관 모를 보내어 고 정원 대원군에게 고제합니다. 삼가 살피건대……[子國王諱 謹遣臣某官某 告祭于考定遠大院君 伏以……]’라 하고, 덕흥 대원군에게는 ‘국왕이 신하 모관 모를 보내어 덕흥 대원군에게 제사드립니다.…….[國王遣臣某 祭于德興大院君……]’라고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덕흥의 선비(先妣)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지금 선묘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는 아울러 제사하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일이 매우 중대한 만큼 물러가 대신과 상의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32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上命召禮曹判書李廷龜, 謂曰: "兩私廟先妣位, 不可不竝行告祭, 未知, 如何?" 對曰: "自外全未知之, 未及講定。 然小臣之意, 恐難竝行告祭。 德興大院君前告祭, 亦未知必合與否, 況德興之先妣, 則代數漸遠, 只是先王後宮, 何必竝告乎?" 上曰: "常時忌日祭, 則奉出所祭之位而行之, 同在一祠, 或行, 或否, 情禮俱未安, 似不可不行。" 廷龜曰: "此祭, 當奉出正寢而行之, 豈可祭於祠中? 德興今若在世, 則當在北面之列, 固無告祭之禮。 但以宣廟私親, 上推宣廟之意而尊之, 故不敢獨告於定遠, 竝行告祭, 此意則好矣。 其先妣, 則代數漸遠, 只是私家婦人, 恐難竝告。" 上曰: "然則勿爲亦可。 今私廟先妣位, 若親祭, 則決不可不爲竝祭也。 此事予當親祭, 而欲先遣官以祭, 次行親祭, 不料告祭之如是遲筵也。" 廷龜曰: "親祭事, 今之外議, 未知如何, 而昔宣廟欲祭德興廟, 其時三司論執, 李珥獨以爲親祭無妨, 小臣之意, 亦以李珥之論爲通論, 今日親祭, 亦無不可。 第臣以蒙學, 適當變禮講論之際, 不能折衷, 致有異論, 誠極惶恐。 金長生一生沈潛禮學之人, 與臣相切, 故曾與論辨此事, 始則極以爲難, 或欲稱考, 或欲稱叔, 終乃動於程子 失禮之議, 且以爲人後者爲之子, 爲本生當爲伯叔之義, 有此別論。 小臣亦豈不知其所謂爲人後者爲之子, 雖以孫繼祖, 或以叔繼姪, 當爲父子云。 而殊不知殿下爲宣廟之子, 則定遠於殿下, 當爲兄弟, 何得謂之伯叔? 殿下於宣廟, 有父子之道, 而無父子之名; 於定遠, 有父子之名, 而無父子之義。 旣不得以所生爲父, 而於所後, 又無稱考之地, 則天倫闕矣。 決不可爲也。" 上曰: "此則固然矣。" 廷龜曰: "金長生以稱考爲非者, 蓋有深意, 是亦好意思。 蓋慮偏重於所生, 而後日或有加隆之議, 有此防微之論。 臣意則不然, 旣封大院君, 立支子, 以顯考書神主, 而以主其祀, 殿下祭文, 書考而不加皇宇, 書子而不稱孝字, 則大綱領已正矣。 此則不過遣祭時頭辭名稱而已, 似是節目間事矣。 然而關係則甚重, 初頭不可不愼。 且聖上洞觀禮經, 修不拘泥於爲私親之謬規矣。 改題主事, 纔爲草記, 未知, 下覽否?" 上曰: "未及見之矣。" 廷龜曰: "臣等之意, 先行題主告祭, 而卽改題主後, 始行遣官告祭, 次序甚順。 聖批以姑停題主, 先行告祭爲敎, 臣未知聖意所在。" 上曰: "題主事, 姑停何妨?" 廷龜曰: "大院之封號, 頃日筵中, 以不出官敎, 直書神主爲定云。 不爲改題之前, 何可爲告祭? 況其傍題奉祀, 應以聖諱書之, 今於祭文, 不稱孝字而仍存孝子某奉祀, 甚爲妨礙, 此尤未安。 大槪不書大院而行祭, 亦甚未安。" 上曰: "有難定事, 姑停何妨?" 廷龜曰: "內間若以奉祀爲難定, 則傍題姑且勿書, 以待亦可。" 上曰: "然則先爲改題主, 姑勿傍題爲當。" 廷龜曰: "祭文頭辭, 定遠大院, 前則曰: ‘子國王諱, 謹遣臣某官某, 告祭于考定遠大院君, 伏以云云。’ 德興前則曰: ‘國王遣臣某官某, 祭于德興大院君云云。’ 未知, 如何?" 上曰: "然矣。 德興先妣, 則不祭亦可; 今私廟, 則何以爲之。" 廷龜曰: "小臣之意, 則似不當竝祭。 然事甚重大, 退與大臣相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32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