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눌·오백령·신경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안눌(李安訥)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안눌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가정에서 효우하였으나, 거칠고 도량이 좁으며 소행이 괴이하였으므로 동류들이 경시하였다. 그러나 문장에 힘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시가 더욱 청건(淸健)하고 침울하여 두보(杜甫)의 법을 깊이 터득하였다.
오백령(吳百齡)을 도승지로, 신경진(申景禛)을 공조 참의로 삼았다. 경진은 사람됨이 굳세고 지려가 있었다. 일찍이 변방의 수령을 역임하여 그 치적이 드러났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무신 중 으뜸이라 일컬었다. 상의 근친으로 맨 먼저 의거를 획책함으로써 정사 원훈(靖社元勳)에 책록되었다.
정온(鄭蘊)을 사간으로, 이경여(李敬輿)를 헌납으로 삼았다. 경여는 사람됨이 정민(精敏)하고 용모도 단아하다. 일찍이 혼조 때에 군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이이첨의 근친이면서도 끝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아 청의(淸議)가 존중하였다. 이에 이르러 으뜸으로 삼사(三司)에 발탁되었다.
윤황(尹煌)을 군기시 정으로 삼았다. 황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기개가 있었다. 선조(宣祖) 때 출신하여 관직을 수행함에 여유있게 위력을 보였다. 광해 때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시골에 은퇴하여 환도에의 뜻을 끊었었는데, 이에 이르러 으뜸으로 기용되었다.
김세렴(金世濂)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세렴의 사람됨은 단중하고 재주가 있었다. 광해 때 장원으로 급제하고 유희발(柳希發)의 사위로서 바로 정언(正言)이 되었다. 끝내는 흉도들의 의논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서도로 귀양가니, 사론이 그를 허여하였다. 이에 이르러 옥당(玉堂)에 추천되어 들어갔다.
김시언(金時言)을 예조 정랑으로 삼았다. 시언의 사람됨은 걸출하고도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기세를 부리며 의논을 좋아하므로 사람들이 그 점을 흠으로 여겼다. 광해 때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어 선비를 시험하면서 ‘사호가 유씨를 멸망시키다.[四皓滅劉]’로 논제(論題)를 내었으므로 정인홍이 몹시 질시하여 그의 무리를 사주하여 논박해 귀양보냈었는데 이 때에 와서 기용하였다.
심기원을 형조 좌랑으로, 김자점을 호조 좌랑으로, 송영망을 공조 좌랑으로, 심명세를 형조 좌랑으로, 김원량을 사평(司評)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16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以李安訥爲禮曹參判。 安訥爲人淸疎, 好施與, 居家孝友, 而粗率量狹, 行事頗詭, 儕流以是輕之。 攻文甚力, 詩尤淸健沈鬱, 深得工部之法。 吳百齡爲都承旨, 申景禛爲工曹參議。 景禛爲人沈毅, 有智慮。 曾歷邊郡, 頗著聲績, 人稱之以武臣中翹楚。 以上近親, 首畫義謀, 錄靖社元勳。 鄭蘊爲司諫, 李敬輿爲獻納。 敬輿爲人精敏, 姿容端雅, 曾在昏朝, 陸沈郡縣, 以爾瞻近族, 終不染跡, 淸議重之, 至是, 首擢三司。 尹煌爲軍器寺正。 煌爲人剛毅, 有氣節, 出身宣祖朝, 當官擧職, 綽有風力。 光海政亂, 退歸鄕曲, 絶意仕宦, 至是, 首被起用。 金世濂爲副修撰。 世濂爲人, 端重有才華, 光海時, 占魁科, 以希發女壻, 卽爲正言, 遂立異於兇徒之論, 竄配西塞, 士論頗許之, 至是, 薦入玉堂。 金時言爲禮曹正郞。 時言爲人魁偉, 有幹局。 但使氣好議論, 人以是病之。 光海時, 爲全羅都事, 試士以四皓滅劉爲論題, 仁弘深嫉之, 遂嗾其徒而論竄。 至是, 起而用之。 沈器遠爲刑曹佐郞, 金自點爲戶曹佐郞, 宋英望爲工曹佐郞, 沈命世爲刑曹佐郞, 金元亮爲司評。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16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