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21일 신해 3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윤휘가 관직에 계속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하교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휘(尹暉)는 아첨으로 광해를 섬기면서 백성을 괴롭힐 줄만 알고 김순(金純)과 어울려 비루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관작을 보전하고 있으므로 내 괴이하게 여긴다. 정원은 알고 있으라."
하였다. 윤휘는 사람됨이 비루하고 탐욕스러우며 대궐에 붙어 사사로이 헌상하거나 뇌물을 바치는 짓을 일삼았다. 폐주가 오랑캐의 서신의 답하는 일로 재신에게 수의(收議)할 때 휘만이 유독 ‘천조가 미약하니 의당 노적(奴賊)과 더불어 기미(羈縻)해야 한다.’고 대답하여 폐주의 비위를 맞추었다. 영건 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가 되어선 영합하고 아첨하는 데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고, 백성을 해치는 일은 거의 다 팔을 걷어붙이고 담당하였다. 김순을 추천하여 해서(海西)로 보내 그곳 백성들을 괴롭히면서 그와 더불어 이익을 나누니 사람들이 타매하며 더럽게 여겼다. 휘는 고 정승 윤두수(尹斗壽)의 아들로서 그 형인 윤방(尹昉)은 문닫고 들어앉아 정도를 지켰는데, 휘의 소행이 이와 같았으므로 모두들 그 부형을 욕되게 한다고 하였다. 교화를 새롭게 하는 처음에 양사가 한 마디의 언급이 없으므로 위에서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511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