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이 병조 판서 권진 등의 체직과 계축 이후의 파방 등을 청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 권진(權縉)은 본래 탐욕스런 사람입니다. 계축 옥사 당시 형방 승지(刑房承旨)로서 시종 담당하여 죄를 얽어 모함하는 데 한도가 없었습니다. 삭탈하여 내쫓으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권진은 성품이 본래 시기하고 포학한 데다가 탐욕스럽기까지 하였다. 궁중과 통하여 아첨으로 총애를 굳히고 권세를 빙자하여 위복(威福)을 자행하였다. 계축 옥사를 몸소 담당하여 사론(士論)에 득죄하였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침을 뱉으면서 욕하였다. 유신(維新)의 초기에도 오히려 본병(本兵)의 중지에 있으므로, 여론이 분개하였다.
또 아뢰기를,
"새로 즉위하신 처음에 각도의 방백을 시급히 먼저 선택해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탐관 오리를 색출해 내쫓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토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라 감사 황근중(黃謹中), 충청 감사 박경신(朴慶新), 강원 감사 임석령(任碩齡)은 모두 뇌물로 본직에 제수되었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시언(李時言)은 성품이 본래 간사하고 교활한 데다가 탐욕스럽기까지 합니다. 임해군(臨海君)의 옥사 때 자신이 혼자 앞장서서 담당하였습니다. 의거할 때 군대를 정비하여 변을 관망하면서 남양(南陽)의 의병을 구속하였으니,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양사가 합계하여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언이 의병을 구속한 일은 곧 그의 직분상 해야 할 것이었으니, 죄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임해군의 옥사를 독자적으로 담당했다 하니, 파직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계축년 이후에 역적의 괴수가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과거를 가지고 당파를 심는 길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정을 두거나 차술(借述)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각년의 모든 방(榜)을 일일이 조사하여 삭제하기도 하고 파방하기도 하여 선비들의 분한을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무오년에 식년 강경(式年講經)한 뒤로 물의가 거듭 일어나자 본조가 파방을 계청하였으나 광해가 끝내 허락하지 않아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참방(參榜)한 사람 중에는 정당하게 참방된 자도 있으니, 현저히 사정을 써서 얻은 자와 뒤섞어 삭과(削科)하는 것은 원통하고 민망한 일인 듯싶다.’고 합니다. 전체를 파방하거나 조사해 삭제하는 것을 본조가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그 사이에 혹은 정당하게 참방한 자가 있으니 뒤섞어 파방하는 것은 부당할 것같습니다. 삭제해야 할 사람만 삭제해야지 전체를 파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 경연에서 다시 품하여 친경 별시(親耕別試)와 함께 강시(講試)를 다시 행하고 합쳐 한 방을 만들기를 청하였다. 이 두 방은 흉도들이 가장 심하게 부정을 행한 것이어서 공론이 모두 파방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류(金瑬)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별시(別試)에 참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조와 대신이 그 형세에 견제되어, 처음엔 조사해 삭제하기를 청하더니 끝내는 다시 시험보이자고 하였다. 유신의 처음에 행사의 구차함이 이처럼 심하므로 식자들은 공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07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丁未/諫院啓曰: "兵曹判書權縉, 本以貪黷之人, 癸丑之獄, 以刑房承旨, 終始擔當, 羅織搆捏, 罔有紀極。 請削黜。" 上曰: "遞差。" 縉性本猜暴, 濟以貪饕, 交通宮禁, 媚悅固寵, 憑藉權勢, 恣行威福。 癸丑之獄, 身自擔當, 得罪士論, 人皆唾罵。 新化之初, 猶在本兵重地, 輿情駭憤。 又啓曰: "新服之初, 各道方伯, 不可不急先擇遣, 使之覈黜貪汚, 以濟塗炭之民。 全羅監司黃謹中、忠淸監司朴慶新、江原監司任碩齡, 皆以賄賂, 濫授本職, 請竝罷職。" 上從之。 又啓曰: "京畿水使李時言, 性本奸猾, 加以貪黷, 臨海之獄, 挺身獨當。 擧義之日, 厲兵觀變, 拘縶南陽之義旅, 其心所在, 有不可測。 請拿鞫。" 上曰: "遞差。" 其後, 兩司合啓以請。 上曰: "李時言拘縶義旅之事, 乃職分內所當爲者, 無可罪之事, 而臨海之獄, 獨自擔當云, 罷職。" 又啓曰: "自癸丑以後, 逆魁久據文衡, 以科擧爲植黨之路, 私情借述, 無所不至。 各年諸榜, 一一査考, 或削或罷, 以洩士子之憤。" 上下于禮曹, 禮曹啓曰: "戊午式年講經之後, 因物議重發, 本曹啓請罷榜, 而光海終不發落, 以至于今。 或以爲參榜之人, 亦有以公道得參者, 與顯然用私者, 混同削科, 似爲冤悶。 或全罷、或査削, 本曹不敢擅便, 請議大臣。" 大臣獻議以爲: "其間或有公道得參者, 混罷其榜, 似涉未妥。 削其可削, 不須竝罷。" 後於筵中申稟, 請與親耕別試, 再行講試, 合爲一榜, 此兩榜, 兇徒之最甚行私者。 公議皆曰當罷, 而金瑬之子慶徵, 亦參別試, 故該曹與大臣, 未免牽制於形勢, 初請査削, 終爲再試。 新化之初, 擧措之苟且甚矣。 識者知公道之不行焉。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507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