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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 170권, 광해 13년 10월 30일 정유 3번째기사 1621년 명 천계(天啓) 1년

용천 부사 이상길이 모 총병을 설득하려한 일과 사세에 대해 보고하다

용천 부사 이상길(李尙吉)이 치계하였다.

"찬획사(贊劃使)의 군관 한 사람이 의주에서 보낸 장계를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였는데, 그 한 조항은 바로 등후우(烓後禹)가 비밀히 모 총병을 도모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총병에게 힘써 말하여 잘 처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그날 이른 아침에 접반관과 함께 객사 안에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제가 대인을 모시게 된 지도 이제 반년이 되어가 정의가 한집안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길흉화복을 마땅히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나서 등후우의 발언기록을 꺼내어 총병에게 보이니, 총병이 말하기를 ‘등생(烓生)은 글을 아는 사람이니 반드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후우가 이곳에 자주 오가니 대인이 나중에 자세히 물어 보십시오. ’ 하니, 총병이 말하기를 ‘후우가 물론 잗단 사람이기는 하지만 요민(遼民)들 가운데는 이보다 더 흉험한 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고 생사존망을 하늘에 맡겼습니다. 그러니 성공하면 천하의 다행이고 성공하지 못하면 천하의 불행일 것입니다. 요민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만약 제 한 몸만을 보존하자고 하였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들과 함께 일을 하였겠습니까. 이들은 얼마 전에도 나를 묶어 보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의 일편단심은 하늘의 밝은 태양과 같습니다.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다 보니 귀국의 충순한 뜻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진실을 터놓고 있으면, 비록 근거없는 말이 떠돈다고 하더라도 감히 의혹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형원이 또 총병에게 말하기를 ‘여기는 진강(鎭江)과 아주 가까울 뿐 아니라 머지 않아서 또 얼음이 꽁꽁 얼어붙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산(鐵山)이 매우 가까운데 거기에는 또한 창사 산성(倉舍山城)이 있어서 지킬 만한 성이 없는 이 고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대인은 잠깐 동안 철산으로 가서 관참장(管參將)과 함께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총병이 말하기를 ‘진군할 수는 있지만 퇴군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있으면서 만약 의주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마땅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갈 것입니다. 중국과 귀국은 본래 한집안인데 어떻게 아무 상관없다고 여기면서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총병이 곧 곁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는 말하기를 ‘달적(㺚賊)요성(遼城)을 함락시킨 것이 아닙니다. 장관 이하의 요인(遼人)이 노추(老酋)를 위하여 내응하고 문을 열어 적을 맞아들였기 때문에 마침내 요성이 함락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요민은 중국에 있어서 더없는 원수입니다. 귀국은 요동과 인접하여 있는데 어찌 요민의 일을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이 또 찬획사의 분부로 군량미 2백 석을 바치고자 한다고 말하고서 ‘우리 임금께서 대인이 변경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반드시 군량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시고 군량 약간 석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더니, 총병이 말하기를 ‘이것이 전날에 내가 빌려달라고 한 수량입니까?’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실상 우리 임금께서 급한 상황에서 구해주고자 하는 뜻이지 빌려주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더니 총병이 기뻐하며 사례해 마지 않았습니다. 오늘 해가 저문 뒤에 총병이 ‘내일 철산을 갔다 올 것이다.’ 하였는데 아침에 신 등이 한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4, 5일 전부터 강을 오르내리며 피난 온 요민들이 처자들을 옮기어 모두 내륙으로 향하게 해서 길에 사람들이 줄지어 있으니, 이것을 보면 그곳의 정세가 우려할 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 【정족산사고본】 38책 17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3책 41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龍川府使李尙吉馳啓曰: "贊畫使軍官一人, 賫持義州報狀示臣, 一款乃鄧後禹潛圖摠兵事也。 令臣力諭摠兵, 使之善處。 臣當日早朝, 與接伴官偕進館裏, 爲言: ‘俺得侍老爺, 今將半年, 情義有同一家。 吉凶禍福, 皆當與共。’ 仍出鄧後禹所錄, 示摠兵, 則摠兵曰: ‘鄧生識字之人, 必不出如此等語。’ 臣曰: ‘後禹頻數往來于玆, 老爺後可詳問。’ 摠兵曰: "後禹固是細人, 而遼民之兇, 亦有甚於此者, 俺則不信。 俺旣以身許國, 死生存亡, 付之於天。 事成則天下之幸也, 不成則天下之不幸也。 遼民之不信, 俺亦已知。 俺若爲身謀, 只欲保身, 則豈能留滯至今, 與此輩同事? 此輩頃日亦倡綁送之言。 俺一點丹心, 有如晈日。 俺之留此已久, 備知貴國忠順之意。 肝膽相照, 雖有浮言, 豈敢疑惑?’ 馨遠又謂摠兵曰: ‘玆地逼近鎭江, 氷合又不遠。 此距鐵山甚邇, 又有倉舍山城, 不比此邑之無城可守。 願老爺暫向鐵山, 與管參相議軍事如何?’ 摠兵曰: ‘可進不可退。 在此若聞義州有急, 俺當領兵馳赴天朝。 貴國自是一家, 豈有越視而不乎?’ 摠兵乃辟左右而言曰: ‘非賊陷城也。 人將官以下, 爲老酋內應, 開門迎賊, 竟使城見陷。 民之於天朝, 莫大仇讐也。 貴國與左接鄰, 豈不聞民之事乎?’ 臣又以贊畫使分付, 請納糧米二百石, 爲言寡君, 念老爺久留境上, 必有軍中乏食之患, 命納軍餉若干石云云, 則摠兵曰: ‘此是俺前日請貸之數耶, 臣對以此實寡君周急之義, 非爲假貸而送也。’ 摠兵喜謝不已。 今日日暮後, 摠兵有明日往來鐵山之計, 恐仍朝來臣等所言, 有此行乎。 且近自四五日來, 沿江上下, 避亂民等, 般移家少, 盡向內地, 相望於道路, 那邊聲息之可虞, 據此可知矣。"


  • 【정족산사고본】 38책 17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3책 41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