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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 165권, 광해 13년 5월 1일 임인 1번째기사 1621년 명 천계(天啓) 1년

조사 유홍훈·양도인이 서쪽으로 돌아가다

조사(詔使) 유홍훈(劉鴻訓)양도인(楊道寅)이 서쪽으로 돌아갔다. 왕이 모화관에서의 전송연회를 마치고 나서 그대로 경덕궁에 들렀다가 신시에 돌아왔다. 【홍훈은 제남(齊南) 사람이고 도인은 영남(嶺南) 사람인데, 탐욕스럽기가 비길 데 없었다. 인삼 값을 은으로 치르는데 명색이 매우 많았다. 심지어 개인의 은을 발급하여 수천 근의 인삼을 팔도록 하고는 삼을 받은 다음에 곧바로 본은(本銀)까지 추징하였다. 양서(兩西) 지역과 송도(松都), 그리고 서울에서 상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큰 도시에서 은 7, 8만 냥을 거두어들이니 우리 나라의 재물이 바닥이 났다. 우리 나라에 왔던 중국 사신 가운데 장녕(張寧)이나 허국(許國)과 같이 청렴한 기풍과 높은 지조를 지닌 이는 비록 쉽게 볼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학사나 대부로서 풍류가 있고 문채가 있는 이는 앞뒤로 연이어 있어 왔다. 은삼과 찬품값을 요구하는 일은 고천준(顧天俊)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유홍훈과 양도인은 더욱 심하였다.】


  • 【정족산사고본】 37책 16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3책 374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행행(行幸) / 무역(貿易)

○朔壬寅/詔使劉鴻訓楊道寅西還。 王餞于慕華舘, 仍過慶德宮, 申時乃還。 【鴻訓, 濟南人; 道寅, 嶺南人, 貪墨無比, 折價銀參名色極多。 至於發給私銀, 要貿人參累千斤, 捧參之後, 旋推本銀。 兩西、松都輦下商賈, 號泣徹天。 大都收銀七八萬兩, 東土物力盡矣。 詔使之至我國者, 如張寧、許國, 淸風峻操, 雖未易見, 而學士大夫之風流文采, 前後相望。 至於要討銀參饌品折價, 則自顧天俊始, 而劉、楊尤甚焉。】


  • 【정족산사고본】 37책 16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3책 374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행행(行幸)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