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광해군일기[정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6일 병인 5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비방하고 문묘 종사가 부당함을 극론하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차하여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비방하니, 차자를 궐내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상이 여러번 인홍을 불렀으나 인홍이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자 상이 특별히 내의원과 예관을 보내어 문병하고, 아프더라도 참고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인홍이 마침내 상차하여 지금 맡고 있는 찬성(贊成)의 직을 사임한다는 명분에 의탁하여 언적을 심하게 헐뜯고 그 차자의 대략에,

"신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君師父) 일체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분 모두가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 찬성 이황조식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작은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 여러 해입니다.

옛날에 사마광(司馬光)맹자를 비난하고, 이구(李遘)와 정숙우(鄭叔友)맹자를】 비방하여 그 말이 극도로 패악하고 거만하였습니다. 이에 여윤문(余允文)과 주문공(朱文公)이 오묘한 것을 극도로 변론하여 밝혔습니다. 또 주문공육상산(陸象山) 학파의 비난을 받자 진건(陳建)《편년(編年)》을 지어 그 부(蔀)를 밝혔습니다. 맹자주자는 해와 달입니다. 사람이 비록 비방하고자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마는 세 분의 군자가 그래도 힘써 논변하여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조식성운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습니다. 태산 교악(泰山喬嶽) 같은 기(氣)와 정금 미옥(精金美玉)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작게는 사귀고 주고 거절하고 받는 사이와 크게는 행하고 감추고 나가고 들어앉는 즈음에 고인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바르고 바른 규모는 모두 사범(師範)이 될 만하니, 성문(聖門)의 고상한 길을 걷는 사람이며 성세(盛世)의 숨은 어진이라고 함이 옳을 것입니다. 단지 한 세상의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사이에 권면될 뿐만 아니라 백세의 후에 듣는 자들도 역시 흥기될 것이니, 구구한 문자의 학문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고상(高尙)을 일삼는다.’라고 하였는데,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 뜻이 법칙이 될 만하다.’ 하였고, 정자가 또 이에 대해 증거를 대기를 ‘이윤(伊尹)태공망(太公望)과 같은 인물의 시초이고 증자(曾子)·자사(子思)의 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윤신(莘)에서 농사짓고, 여망(呂望)이 바닷가에서 살고, 증자자사가 벼슬하지 않은 것이 과연 세상을 경멸하고 중도를 지나쳐 노장의 행동을 한 것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잠룡(潛龍)이니 쓰지 말 것이다.’와 간괘(艮卦) 초륙(初六)의 ‘첫 움직임을 그친 것이니 길이 곧다.’와 돈괘(遯卦)의 ‘잡기를 누런 소의 가죽을 쓴다.’와 절괘(節卦)의 ‘문앞을 나서지 않는다.’는 등등의 효사(爻辭) 뜻을 이황이 과연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기 위한 효이고 괴이한 행실을 하기 위한 의의라고 여긴다면, 복희(伏羲)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는 중도로 길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고 노장의 조종(祖宗)이란 말입니까. 그가 사람을 논하고 도를 논하는 것이 크게 성현의 뜻을 잃었으니 식견이 투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사사로운 뜻에 가리고 의혹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중용(中庸)》자사께서 도를 전한 책입니다. 그 책에 괴벽한 이치를 탐구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는 것은 중도에 지나친 것이고,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은 미치지 못한 것이고, 세상을 피해 있어도 근심이 없고, 인정받지 못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용에 따른 군자라고 하였는데, 어찌 도가 아닌 것을 자사께서 써서 후학에게 일러주었겠습니까. 만약 세상을 피해 있으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중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자사가 요망한 말을 하여 후인을 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사만 중도에서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임금도 깊은 산속에 살면서 나무나 돌과 이웃하였고 사슴과 함께 놀았으니 이 역시 중도에서 지나친 하나의 잘못으로서 세상에 요 임금이 없었다면 그냥 그렇게 세상을 마쳤을 것이니 어찌 중도를 쓴 대성(大聖)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빈곤한 생활을 바꾸지 않은 안자와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은 이동(李侗)·채원정(蔡元定) 등 역시 높고 뻗뻗한 노장의 무리라는 제목 가운데 들 것입니다.

이로 볼 때 고상(高尙) 자체가 중용이 되는데 도리어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고가 길이 어두워져 다시는 누추한 마을에서 극도로 곤궁한 생활을 하는 안자의 시중(時中)은 있지 않고, 나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은 모르는 호광(胡廣)의 중용019) 이 세상에 도도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이황이 말하는 중은 자못 성현의 뜻을 잃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조식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했다고는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한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사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이언적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을사년020)정미년021) 사이에 혹은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혹은 청직과 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 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뻗뻗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행실입니다. 어찌하여 조식성운이 행한 바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지나치게 높은 노장을 본받았단 말입니까.

대저 고상을 지나치다고 하는 말은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황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한 세상을 우롱하고 나 외에는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았으니, 그의 병통은 현자·지인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라서 화답하여 혀를 놀리는 자가 너무도 많으니 조식성운이 무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옛날 성현에게까지 무함이 미치고, 또 장차 후학을 속여 사도(斯道)를 해칠 것이니, 이는 작은 우려가 아닙니다. 신이 논변해 밝혀서 언어와 문자 사이에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황조식성운에 대하여 절개요 이단이라고 하여 다시는 돌아보지 아니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속을 좇아 세력에 붙고 이익을 탐하여 수치가 없으며 시종일관 권간(權姦)의 문객이 되어 맑은 논의에서 버림을 받은 이정(李楨)황준량(黃俊良) 같은 약간의 무리들을 도학으로 허여하기도 하고 성현으로 기대하기도 하면서 그들과 왕복한 편지가 쌓여 책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앞서서 나가고 앞서서 숨어서 명리(名利)의 마당에서 늙은 자를 하루아침에 도학의 공정(工程)과 성현의 사업으로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좋아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이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이것이 과연 천부적 본심과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 때문에 신이 더욱 마음에 불만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삼가 선대 조정에서 전하신 비망기를 보니, 하나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밝혔다고 하였고, 하나는 선비가 벼슬에 나아가고 버리는 의리를 바로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전에도 후에도 발명하지 못한 바른 의론을 발명하였다고 하고는, 이어서 무고한 왕자의 사형을 청한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선왕은 이언적의 일이라고 여기셨으나 혹자는 언적이 아니라 이황이라고 합니다. 그 일을 국가의 문적에서 비록 누구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선왕의 전교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학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지니고서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에 구하지 못하고 같이 행동을 한 수치가 있었으니, 신하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의리와 돌처럼 단단한 절개로 속히 떠나는 의리와는 또한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또 그들이 평소에 한 모든 일은 주행기(周行己)의 허물022) 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정자주행기를 너무 심하게 꾸짖은 것이 잘못이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군자가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자신을 닦는 도리로 헤아려 볼 때 너무나도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이것이 속인에게 있는 일이라면 진실로 별일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유학을 한다는 이름이 있는 자에 있어서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황이 자기를 살피는 데에는 어둡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심하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심사이겠습니까.

신의 구구한 견해가 대개 이와 같았기 때문에 일찍이 조식성운이 무함을 입은 것에 대해 변론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일들을 언급하여 후학의 의혹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시배(時輩)의 분노를 사서 무리지어 욕하고 배척하여 팔도에 알림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나라 안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비망기의 묵이 아직도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유생이 소를 올리고 대신이 의논하고 전하께서 들으시어 문묘에 배향함에 높여짐이 지극하고 명성이 매우 성하여 그 기세가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와 재야의 유생들이 서로 이끌고 나서서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이 추켜세운 자를 전하께서 이미 추켜세우셨으니, 그들이 좌절시킨 자들 역시 전하께서 당연히 좌절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식성운의 무함은 더욱 두터워지고 무상한 신을 배척하는 것은 장차 전날 하던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아, 성현이 도학을 논한 뜻과 후학에게 일러준 의미를 위와 같이 진술하였으니, 하늘의 해처럼 명석하고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성현의 교훈을 믿지 않고 이황의 한마디 말에 의혹되어 티를 가리고 옥이라 하여 마치 바람에 쓰러지고 물결에 밀리듯이 하고 있으니, 백세의 뒤에 어느 누가 다시 이황의 허물을 알 수 있으며 조식성운이 노장이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부득불 입을 열어 할 말을 다함으로써 감히 맹자를 높인 고사의 의의에 따라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려 놓고 해방하는 피해 따위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신이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문학은 본시 성인의 일체(一體)입니다. 그런데 근원이 멀어지고 세대가 오래됨에 문학이 크게 그 진실을 잃어서 인심을 함닉시키고 세도를 떨어뜨려 그 해가 홍수보다 심하여 구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범영(范寧)왕필(王弼)의 죄를 꾸짖은 것과 불행히도 근사합니다. 그 해로움이 도리어 노장보다 적지 않으리니 어찌 훗날 근심이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신은 바로 노장의 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일세의 나아가고 버림이 정해졌고 조정의 호오(好惡)가 결정되었고 전하의 향하는 바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다른 파당의 시기를 취하겠습니까. 지난번에 곽재우(郭再祐)가 한번 도성에 들어가서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는데, 구설이 분분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고 기롱하고 비난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위로 성상을 번거롭게 했으니, 신은 이것을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신으로 하여금 기어이 한 번 가서 가까이에서 성상을 뵙고 감히 아는 바를 다 말하게 할 경우 헐뜯고 배척하여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자 하는 자들이 단지 곽재우에게 했던 정도로만 하고 말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더욱 감히 명에 달려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한두 가지 나아가기 어려운 뜻을 대략 진술하여 성명께서 불쌍히 여겨 살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여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체직하시고 다시 부르지 마시어 얼마 남지 않은 이 목숨으로 하여금 낭패스러움을 면하고 전리에서 죽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이는 진실로 천지의 생성(生成)해 주는 은혜입니다만 감히 바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감에 조야가 놀라고 분개해 하였다.

인홍이 이러한 논변을 한 것은 대개 이황이 일찍이 자기의 스승인 조식에 대해 논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이다. 선배의 장단은 후학이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남긴 글이 모두 있으니, 그들의 논저를 살펴보면 이황조식의 잘잘못을 알 수가 있다. 조식의 학은 의리를 강론하는 것을 크게 꺼려하였으니 이는 주자육씨(陸氏)를 공격한 바였고, 경(敬)을 논함에 심식(心息)이 서로 의지하는 것을 요체로 삼았으니 이는 도가의 수련법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유가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공부의 과정이 없었다. 그 외에 시골에서 살면서 끼친 폐단이나 임금에게 불손하게 아뢴 말들은 모두 지나치게 미워하고 지나치게 곧은 잘못에서 나온 것으로 자못 유학자의 기상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문사(文辭)는 괴벽하고 깊고 어두워 결코 명도 달리(明道達理)의 말은 되지 못한다.

대개 그 사람이 절개가 높고 기상이 곧아 자부심이 태과하였으나 실상은 한번도 학문의 공부에 깊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이황이 높고 뻗뻗한 노장으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어찌 본 것도 없이 함부로 말하였겠는가. 벼슬하지 않은 절개는 바로 그의 장점이므로 이황이 애초에 이 점을 비난한 적은 없었다. 이황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를 표준삼아 논변과 저술에 크게 발명함이 있었고, 또 그의 기상이 화평하고 신밀(愼密)하여 자연히 도에 가까웠다. 이른 나이에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못한 상태에서 벼슬길에 올라 비록 조금의 후회가 있음을 면하지는 못하였으나 역시 몸을 잃어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만년에 학문이 진전되고 덕이 이루어져 우뚝하게 수립함에 성명(誠明)이 둘다 지극한 데에 이르고 행실과 견해가 함께 도달하였다. 그가 사문에 기여한 공이 매우 컸기 때문에 학자들이 우리 동방의 주자라고 일컬었으니, 대체로 근사하다 하겠다.

그리고 언적의 경우는 처음과 끝의 출처가 비록 이황에게 미치지 못하는 감이 있고 그의 심사가 분명하므로 결코 의심할 것이 없다. 일시의 명인(名人)과 거유(鉅儒)들이 그의 학문을 추존하여 모두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여겼으며, 이황 역시 끊어진 학문을 전하였다는 것으로 그를 높였는데, 사람들에게 이러한 인정을 얻은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어찌 인홍이 용이하게 비방할 수 있겠는가. 주행기의 허물을 들어 비방한 것과 같은 것은 더욱 군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군자가 사람을 논함에는 항상 충후(忠厚)에 근본을 두어야 하는 법이니, 이와 같은 추잡한 말은 비록 향당의 자기만 아끼는 자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인데 더구나 두 선비에 대해서이겠는가. 허물이 있는 가운데 허물이 없기를 구하는 것이 본디 군자의 마음이니, 때를 씻어 흉을 찾는 것이 도리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그리고 인홍이 문학의 폐단을 극구 말하면서 인심을 함닉시키고 세도를 무너뜨리는 해가 홍수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는데, 대저 한갓 문학만을 일삼아 실행하는 알맹이가 없다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학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학조차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또한 그보다는 우수한 것이다. 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본래 실천하기 위한 것이니, 외적인 것에 힘쓰고 내적인 것을 버려두는 것은 바로 학문을 잘 하지 못하는 자의 죄이지 애초에 문학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니다.

대저 문학만 알고 실천이 없는 자는 또한 실천을 말로만 하고 실지로 얻는 것이 없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진실하게 공부를 해나가면 문학은 진실로 도에 들어가는 계단이 될 것이고 실없이 말만 한다면 실천이라는 두 글자 역시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요컨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문학으로 죄를 돌릴 수 있겠는가. 인홍이 방자하고 기탄없이 이론(異論)을 선창하여 만세의 학자를 그르쳤으니, 세상을 의혹시키고 백성을 속인 죄는 양자(楊子)와 묵자(墨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선비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벼슬하지 않는 의리를 결단한 것에 있어서는 더욱 무리한 짓이다. 설사 두 선비가 과연 진유(眞儒)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 죽어서 황천에 있는 사람의 영욕(榮辱)이 애당초 자신의 진퇴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이 시기에 임금이 덕을 닦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어진이와 사악한 자가 뒤섞이어 외척들이 용사를 하고 있으니, 군자로서 벼슬하지 못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유독 이 문제를 가지고 거취를 결정한단 말인가. 더구나 세상이 두 선비를 존숭한 지가 오래 되었고 배향을 청한 것이 몇 해째인데 어찌하여 전에는 묵묵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운운하는 것인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임금을 협박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 인홍의 사람됨이 편협하고 사나우며 식견이 밝지 못한데 방자하게 함부로 지어내어 다시금 돌아보고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르는 현인 군자치고 그의 비방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일찍이 자기편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을 헐뜯었고 또 이이(李珥)를 매우 심하게 비방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다시 두 선비를 이처럼 힘써 공격하였다. 저 인홍 같은 자는 사문의 쓸데없는 가라지나 사류(士類)를 해치는 좀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정족산사고본】 10책 39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612면
  • 【분류】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

  • [註 019]
    호광(胡廣)의 중용 : 호광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후한 예우를 받았지만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 직언(直言)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호광의 중용’이라고 기롱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44 호광열전(胡廣列傳).
  • [註 020]
    을사년 : 1545 인종 1년.
  • [註 021]
    정미년 : 1547 명종 2년.
  • [註 022]
    주행기(周行己)의 허물 :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 잘못을 말함. 주행기는 정자(程子)의 문인으로 기생과 관계하였는데, 정자가 금수만도 못하다고 하였다. 《이정전서(二程全書)》 권39 외서(外書) 제12 전문잡기(傳聞雜記).

鄭仁弘, 上箚譏斥文元公 李彦迪文純公 李滉從祀之非, 箚留中。 先是, 王屢召仁弘, 仁弘稱病不來, 王特遣內醫及禮官問疾, 諭令力疾上來。 仁弘, 遂上箚, 托以辭所帶贊成職名, 極毁彦迪。 其箚略曰:

臣少事曺植, 重被開發之恩, 事有如一之義, 晩知於成運, 開心相與, 不視爲後輩, 分義雖有輕重, 俱可謂之師生也。 臣嘗見故贊成李滉, 誣毁曺植, 一則曰傲物輕世, 一則曰高亢之士, 難要以中道, 一則曰爲祟。 目成運以淸隱, 認爲偏小一節之人。 臣心嘗憤鬱, 思一辨明, 許多年矣。 昔司馬光, 非孟子, 李覯鄭叔友誣毁孟子, 辭極悖慢。 余允朱文公辨明, 極其底蘊。 朱文公受誣於學, 陳建 《編年》, 以明其蔀。 孟子文公 , 日月也。 人雖欲誣毁, 亦何傷焉? 三君子猶且力辨而不置, 況其下者乎? , 生同一世, 志同道同。 以山喬嶽之氣, 精金美玉之質, 加學問篤實之功, 小而交與辭受之間, 大而行藏出處之際, 無愧古人。 井井規模, 皆可師範, 謂之聖門之高蹈, 盛世之逸民可也。 不但一世之人, 聳動於觀感之間, 百世之下, 聞者亦宜興起, 有非區區文字之學所能致者。 與二人, 共生王國, 又同一路, 平生未嘗識其面目, 又無一席麗澤之和。 而一向誣毁, 至於已甚, 臣嘗爲之辨曰, 李滉, 以科目發身, 不全進不全退, 依違譏世, 自以爲中道。 , 早廢科業, 鏟彩山林, 守道不撓, 被召不起。 爲詭異之行、之道, 殊不知。 《易》不云乎? "不事王侯, 高尙其事。" 孔子曰: "志可則也。" 程子又爲之引證曰: "伊尹太公望之始, 曾子子思之徒是也。" 伊尹之耕, 呂望之居海, 曾子子思之不仕, 果是輕世過中, 爲之行者乎? 況乾初之潛龍勿用, 艮初之艮趾永貞, 遯之執用黃牛之革, 節之不出戶庭爻義, 果以爲索隱之一爻, 行怪之一義, 而伏羲文王周公孔子, 亦當爲不中之指南、之祖宗耶? 其論人論道, 大失聖賢之旨, 若非見識之未透, 其爲私意之蔽明矣。 且《中庸》, 子思子傳道之書。 其曰索隱行怪, 過中者也, 中途而廢, 不及者也, 遯世無悶, 不見是而不悔, 依乎中庸之君子也, 夫豈非道而子思書之, 以詔後學哉? 若以遯世不悔, 爲非中道, 則是子思爲謬妄之說, 以欺後人。 不獨子思自不免過中, 居深山之中, 木石之與鄰, 麋鹿之與遊, 是亦過中之一, 而世無唐堯, 終焉而已, 豈得爲用中之大聖? (簟)〔簞〕 瓢不改之顔子, 終身不仕之李侗蔡元定諸人, 亦且入於高亢之題目中矣。 此見高尙, 自爲中庸, 而反斥爲異端, 將恐天下萬古, 長夜冥冥, 陋巷屢空, 不復有顔子之時中, 而知進而不知退, 胡廣之中庸, 滔滔於世代間。 以此而言, 之所謂中, 殊失聖賢之旨, 灼然可見矣。 況曺植成運, 雖曰肥遯, 往在先朝, 被召趨朝, 一伸在君之志, 累上封章, 眷眷以治安時務爲言, 此果隱僻之理, 詭異之行乎? 年垂七十矣, 豈肯以致之秋, 爲筮仕之日乎? 舍車還山, 賁趾而沒, 此果過中行怪之事乎, 輕世之學乎? 臣竊惑之。 李彦迪李滉, 往在嘉靖乙巳、丁未年間, 或爵位崇極, 或踐歷淸要, 其意果以爲可仕之時乎? 此固不足論也。 至其晩年, 斷然引退, 屢召不至, 此亦高之一事, 輕世之一行。 何不以曺植成運之所爲, 爲不屑, 而反效之過高? 大抵以高尙爲過中, 古未嘗有, 而俑於李滉, 愚弄一世, 視爲無人, 其爲病痛, 不待賢智而後知也。 從而和之, 弄其頰舌者, 不勝其衆, 不獨曺植成運之受誣, 誣亦及於古聖賢, 又將誑後學而害斯道, 此非細慮也。 臣之不得不辨明, 而見諸言語文字間者此也。 李滉, 於一節之異端之不復顧惜, 至於趨時附勢, 嗜利無恥, 終始爲權姦之門客, 淸議之所棄, 如李楨黃俊良等若干輩, 或許以道學, 或期以聖賢, 往復簡書, 積成卷軸。 寧有頭出頭沒, 老於名利場中者, 一朝可望以道學工程聖賢事業者乎? 其好惡取舍, 胡亂如此, 此果出於本心之天, 性情之正者乎? 此臣尤有所不厭於心者也。 伏見先朝備忘之傳, 一以明人臣事君之道, 一以正士子趨舍之義, 又以發前後未發之正論, 仍及於請殺無辜之王子。 先王認爲李彦迪事, 或以爲非彦迪也, 李滉也。 事在國乘, 雖未的指爲誰, 先王之敎, 不爲無據, 則明矣。 二人俱有儒學之稱, 而自垂明夷之翼, 致有不拯其隨之恥, 在人臣以道事君, 不可則止, 介于石不終日之義, 不亦不相似乎? 且其平居, 俱未免周行己之失。 若以程子爲失於誅之太甚則已, 不然, 揆諸君子克己自修之道, 不亦遠乎? 此在俗間人, 固是尋常一事, 稍以儒學名者, 其不爲薄物細故也審矣。 , 暗於觀己而甚於責人, 此豈亦君子之心事乎? 臣區區之見, 蓋如此, 故嘗辨之被誣, 仍以語及此等事, 庶解後來之惑。 反被時輩之忿, 群聚而詆擯, 極之於八路, 使臣無所容於國境之內。 今備忘之墨尙明, 儒生疏焉, 大臣議焉, 殿下聽焉, 躋享文廟, 崇長已極, 風聲甚盛, 氣勢可畏。 搢紳韋布, 相率而左右之, 其所右殿下旣右之, 其所左殿下亦左之。 之被誣益厚, 擯斥無狀之臣, 將不止於前日矣。 噫! 聖賢論道學之旨, 詔後學之意, 如右所陳, 明晢如天日, 易見如視掌。 今之人, 不信聖賢之明訓, 惑於李滉之一言, 掩瑕爲瑜, 風靡波蕩, 百世之下, 誰復知李滉之醇疵, 之非也? 故臣不得不矢口盡言, 竊附於尊之故, 不復避俎之害也。 抑臣之過慮則固有之, 文學固是聖人之一體。 源遠世末, 大失其眞, 陷溺人心, 墊沒世道, 甚於洪水, 莫可拯救, 則范甯之數王弼, 不幸而近之。 恐其害, 反不小於, 安保其不爲異時之憂也? 臣是之徒也。 今者一世之趨舍定矣, 朝廷之好惡決矣, 殿下之所尙, 亦可見矣。 臣何敢靦面前進, 自取異色之猜也? 頃者郭再祐一入國門, 言及時事, 唇舌紛挐, 譏詆靡有餘力, 至於上瀆天聽, 臣不得不以此爲鑑也。 誠使臣, 扶曳一行, 咫尺天顔, 不敢不盡其所知, 則詆斥擠擯, 欲得以甘心者, 不但如郭再祐而已。 此臣尤不敢趨命, 竊以爲不如略陳一二難進之義, 庶幾聖明憐察之爲愈也。 伏願殿下, 命遞職名, 不復收召, 使朝夕性命, 獲免狼狽, 死於田廬。 此誠覆載生成之恩, 而不敢望也。

箚入朝野駭憤。 【仁弘之爲此論, 蓋憤滉嘗論其師曺植也。 先輩長短, 非後學所易論。 然二人遺文具在, 觀其論著, 則滉、植之醇疵, 可見矣。 植之學, 以講論義理爲大忌, 此朱子所以攻陸氏者也, 論敬以心息相依爲要, 此出於道家修鍊法。 吾儒未嘗有此工程也。 其他居鄕之貽弊, 告君之不遜, 皆出於嫉惡亢直之過, 而殊無儒者氣像。 況其文辭佹僻幽晦, 決非明道達理之語。 蓋其人, 有高節直氣, 自許太過, 實未嘗深於學問之功。 故滉以高亢老、莊目之, 夫豈無見而妄言哉? 不仕一節, 乃其長處, 滉, 初未嘗以是疵之也。 滉之學, 一以朱子爲標準, 論辨著述, 大有發明, 且其氣像, 和平愼密, 自然近道。 早年學未至登仕路, 雖未免有小悔吝, 亦不至於失身, 旋卽引去。 晩來學進德成, 卓然樹立, 誠明兩至, 足目俱到。 其有功於斯文甚大, 故學者稱爲我東朱子, 蓋近之矣。 至如彦迪, 其終始出處, 雖若不逮於滉, 然其心事皎然, 決無可疑。 一時名人鉅儒, 推尊其學, 皆自以爲不及, 滉亦以得傳絶學宗之, 其得此於人者, 必有其由。 豈仁弘所可容易醜詆者哉? 若乃周行己之詆, 尤非君子所宜道也。 君子之論人, 常本於忠厚, 此等汚衊語, 雖於鄕黨自好者, 有不可輒加, 況於二儒乎? 有過中求無過, 自是君子心事, 洗垢索瘢, 不料其反損於己也。 且仁弘, 極言文學之弊, 以爲陷溺人心, 墊沒世道, 甚於洪水之害。 夫徒事文學, 而無踐履之實, 則固非爲己之學。 然比之幷與文學而懵然者, 則亦優然矣。 況文學之敎, 本爲實踐, 務外而遺內, 乃不善學者之罪也, 初非文學使之然也。 夫徒知文學而無實踐者, 亦何異於徒言踐履而無實得者哉? 眞實着功, 則文學固爲入道之階梯, 空言騰口, 則踐履二字, 亦何所得? 要之, 存乎其人, 豈可歸罪文學? 仁弘, 倡爲異論, 肆然無忌, 以誤萬世學者, 其惑世誣民之罪, 不當在楊、墨下矣。 至如以崇長二儒之故, 自決不仕之義, 則尤爲無理。 設使二儒, 果非眞儒, 其不爲小人明矣, 九原朽骨之榮辱, 初何干於己之進退哉? 方是時主德不修, 朝綱日紊, 賢邪混淆, 戚畹用事, 凡君子可以不仕者何限, 而曾無一言及之, 顧獨引此爲去就之決哉? 況世之尊二儒, 其來久矣, 從祀之請, 積有年紀, 昔何隱默, 而今何云云耶? 揣其情狀, 亦難免要君之誅矣。 蓋仁弘之爲人, 偏狹狼戾, 識見不明, 肆意妄作, 不復顧忌, 凡世之所謂賢人君子者, 無不被其詆疵。 嘗嗾其黨, 上疏毁成渾, 又極詆李珥, 至是又力攻二儒如此。 若仁弘者, 謂非斯文之稂莠, 士類之蟊賊, 何哉?】


  • 【정족산사고본】 10책 39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광해군일기31책 612면
  • 【분류】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