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측에 군사와 선척, 마필에 관한 어려운 실정을 강력히 말하도록 대신들에 전교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이하가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감군의 아문에 나아가니, 감군은 마 도사(馬都司)로 하여금 나아가 〈신들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마 도사가 글로 써서 보여 주기를 ‘양 노야(梁老爺)가 전에 보냈던 의단(議單)은 〈모두 단지 칙서를 받들어 기록한 것으로〉 오로지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이미 며칠이 지났는데, 대로(大老)들은 의논하여 결정을 했는가?’ 하기에, 신들이 글로 써서 답하기를 ‘반이(叛夷)는 천하에서 가장 극악한 적이다. 그런데 양 노야(梁老爺)가 큰 임무를 맡고서 칙서를 받들고 동쪽으로 왔으니 좌막(佐幕)과 참모(參謀)로 있는 여러 대인들은 반드시 서로 마음을 터놓고 협력하여 〈터럭끝만큼의 틈도 없게 해야〉 족히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은밀히 방문하여 시기에 적절한 대책을 일러 주니, 감히 마음을 다해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일 보낸 의단(議單)에 대해서는 과군(寡君)이 회게(回揭)한 데에 이미 대략을 진술했다. 지금 만약 조목마다 다시 묻는다면 삼가 답을 해 올리겠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사가 말하기를 ‘지금 양 노야가 천자의 명을 받고 동쪽으로 왔는데, 이것이 어찌 다만 귀국의 병사를 빌려서 함께 진격할 것을 도모하여 요좌(遼左)를 회복하기 위해서일 뿐이겠는가. 또한 이 적들은 매우 잔인하고 욕심이 끝이 없으니 이미 요좌를 얻고나면 반드시 귀국을 엿볼 것이다. 군대를 파견해 돕는 것은 그대 나라를 위한 것이지 우리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니 대로(大老)들은 빨리 도모하여 잘 처리하기 바란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왜구는 만 리나 되는 바다 너머에 있는데도 오히려 〈우리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우리의 군읍(郡邑)을〉 도륙해 없애 버렸다. 더구나 이 적들은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데다가 포학하고 속임수 많은 것이 왜구보다 갑절이나 되니, 〈그들이 우리 나라의 근심이 된다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결코 이 적들과 양립할 수 없다. 어찌 단지 천조의 반역자일 뿐이겠는가. 실로 우리 나라의 원수이니, 이 적들이 하루 있으면 우리 나라가 하루 위태로운 것이다. 지금 중국 군대가 대대적으로 토벌을 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가 감히 뒤에서 협공하며 돕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중국은 요좌(遼左) 지역을 단지 조그만 탄환이나 사마귀 정도로 보고 있을 뿐이니, 없더라도 어찌 우리 천조에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다만 귀국이 우리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게 되고 적들과 바로 이웃하게 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길 뿐이다. 저들이 이미 감히 요좌를 범했으니, 귀국을 어찌 치지 않겠는가. 이 점을 매우 가슴 깊이 걱정하는 것이다. 귀국이 국경에서 군대를 훈련하고 있다가 일의 상황을 보아 진격한다면 이는 또한 스스로를 위해 땅을 보전하는 것이지 단지 중국을 위해서 협조하는 계책만은 아니다. 지금 중국의 각 성(省)과 진(鎭)의 군대는 〈신지(信地)009) 에서〉 싸우거나 지키기에 스스로 넉넉하다. 다만 병가(兵家)에서 이르기를 「혹은 앞에서 공격하고 혹은 뒤에서 교란시킨다.」 하였는데, 귀국은 바로 뒤에서 교란시키는 군대이다. 중국에서 바다 건너 군대를 많이 출동시키고자 하였으나 험한 파도를 헤치고 군대를 보내기가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귀국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성원으로 삼는 것이다. 귀국이 팔도의 정예병을 조발하여 강가에 나누어 지키게 하면 조석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중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오는 것과 비교하면 그 어렵고 쉬움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 지금 군대 출동하는 것을 의논했다 하니,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자세히 말해 달라.’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올빼미는 울지 않더라도 끝내 상서로운 새가 아니고, 승냥이와 범은 물지 않더라도 끝내 순한 짐승이 아니다. 이 적들은 장차 반드시 우리 나라를 침략할 것이니, 이들을 하루 빨리 쳐부수는 것은 한편으로는 천조를 위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를 완전히 지키는 계책이 된다. 〈무릇〉 매우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계책은 반드시 지혜로운 법이다. 우리 나라의 군신들이 서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있는데 이 적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한 순간이라도 잊었겠는가. 남쪽 변방에서 왜적을 방어하는 것은 논할 것도 없이, 경흥(慶興)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 되는 〈땅이〉 모두 여진(女眞)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곳곳마다 적의 침입로이고 방수(防守)해야 할 곳이니, 〈천조가 구변(九邊)을 방어하는 것에 비하더라도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무오년010) 이래로 5년 동안 변방을 방어하느라 여염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지고 나라 안이 피폐된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자니 기가 막힌다. 지금 별도로 군사를 조발하기는 어려우나 변방에 가서 여기저기 나뉘어져 지키고 있는 군사들을 다 모은다면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앞뒤에서 서로 협력해 호응하는 것이라면 있는 힘을 다할 수 있을 것이나 우리들이 단독으로 후방을 교란시키는 것을 담당하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없을 듯하다. 대인(大人)의 묘산(妙算)을 하찮은 우리들이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요동을 조그만 사마귀 정도로만 보아 있으나마나하게 여기는 것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때에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도 양평(襄平)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도(帝都)가 연경(燕京)에 있으니, 그렇다면 요동은 왼쪽 팔뚝에 해당된다. 천하의 대병(大兵)이 요광(遼廣)에 모였는데도 끝내 함락되고 말자, 우리 나라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듯이 밤낮으로 슬피 울부짖으며 오직 적을 죽여야겠다는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으되 다만 힘이 부족해서 못했을 뿐이다. 칙서는 작년에 나온 것으로 그때는 대병이 하서(河西)에 모여 있으면서 바야흐로 양쪽에서 협격하려고 했던 때이나 오늘날의 상황은 전과 다르니, 앞에서 공격하는 거조도 없는데 가벼이 후방을 교란시킬 군사를 출동한다면 어떠할지 모르겠다. 마땅히 칙서의 뜻을 받들어 국경가에 군사를 늘려서 방수(防守)를 엄히 하고 성원(聲援)을 도와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사가 말하기를 ‘〈내가 요좌(遼左)를 탄환이나 사마귀같이 하찮다고 한 것은 천하의 대세를 들어 말한 것이지 그곳을 버리려고 한 말은 아니다.〉 귀국이 군사가 적은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다만 귀국은 다른 변경이 없고 단지 남쪽으로 왜적과 이웃하고 있고 북쪽 국경에 이 적이 있을 뿐이니 약간의 군사를 남겨 두어 왜적을 방비하고 또 약간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 적을 방비하였다가 훗날 적의 후방을 교란시킬 군사로 삼으라는 것이지 〈지금 바로 적의 후미를 교란시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형세는 지난해와 약간 다른데, 이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재삼 말했다. 다만 회복하라는 칙서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확고한 의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찌 단지 군사를 더 보태는 데 따른 두 가지 일만 말하여 책임을 메우려고 하는가. 잘 헤아려 알려주기 바란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대인의 훌륭한 뜻에 대해서는 이미 다 잘 알고 있다.〉 군사는 정예화하기를 힘써야지 숫자만 많은 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그 수의 많고 적은 것은 성패에 관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반드시 이기는 군대는 없지만 좀처럼 패배하지 않는 장수는 있는 법이니 훌륭한 장수 한 명을 얻어 삼군을 거느리게 하고 싶은데 우리 나라에는 인재가 없다. 비록 변방에 한두 명의 장리(將吏)가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못하니, 이 점이 염려된다. 변방의 각처에서 파수하는 군사를 통틀어 계산해 보건대, 겨우 1만여 명이 넘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귀국은 예로부터 인재가 많다고 일컬어져 왔는데, 어찌하여 금일에 이르러서는 그토록 인재가 부족하게 되었는가. 지금 비록 군사를 조발하더라도 아직 나아가 치지는 않을 것이니,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하다가 천천히 사람을 택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파수하는 군사가 1만여 명이라고 했는데 이는 지금 더 증원해 파견하는 군사이거나 아니면 해당 지역에 있는 군사의 숫자일 것이다. 만일 더 증원한 것이 겨우 1만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창성(昌城)·의주(義州)와 같은 곳들은 귀국의 요해지가 되는데, 어찌 전혀 방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 군사를 동원했다가 적에게 들킬까 두려워하여 굳이 아끼는 것인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고금 천하에 적에게 들킬까 두려워 군사 출동하는 것을 아끼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비유컨대 승냥이와 이리가 문 앞에 있으면 다만 마땅히 방패와 창을 정리해서 〈반드시 베어 죽이려고 해야지〉 어찌 물러나 움츠리고 두려워하다가 도리어 화를 재촉해서야 되겠는가. 서북쪽에 늘 주둔하고 있는 군사의 수효는 1만여 명에 불과하고 이밖에 여러 곳에서 징발하여 모은 군사가 1만 명으로 더욱 엄하게 방수(防守)하면서 칙서의 뜻을 받들어 따를 뿐이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회복하라는 칙서의 뜻을 대충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창성(昌城)의 여러 곳에는 원래 약간의 병력이 있어 지금 칙서의 뜻을 받들고 있고, 거기에 또 약간의 병력을 보태어 지금 모장(某將)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여 모처에서 훈련하게 하고 있는데, 대병이 치러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진격하는 데 협력할 것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게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귀국에서 의심 많은 쥐처럼 망설이며 근거없는 말만 계속한다면, 이는 절대로 조정에서 귀국에 기대하는 마음이 아닐 뿐더러 귀국의 충순(忠順)하는 대의(大義)도 아닌 것이다. 먼저 1만여 명을 파견해 지킨다고 하였고 나중에 별도로 1만 명의 병력을 징발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모두 합해서 2만여 명의 병력이 된다. 2만여 명의 병력이 만일 정예병이고 거기에 다시 천조의 대병을 보태어 한마음으로 함께 일을 한다면 이 적들을 박멸하는 것은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 적들을 없애 버려야 귀국은 편안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은(謝恩)하는 표문(表文) 안에는 「즉시 존의(尊議)대로 군사 2만 명을 보내겠다.」고 성지(聖旨)에 답하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사은하는 표문에는 삼가 가르침대로 하겠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병력에 대해서는 타결되었으니, 다시 군량에 대해서 의논하자. 군량에 대해서는 귀국에게 우리 군사들의 군량을 끝까지 다 대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은으로 시장에서 싸게 사 시가(時價)에 따라 은을 내어줄 것이니 단지 바다로 어렵게 운송하는 수고를 덜려는 것일 뿐이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지세(地勢)는 지금 대인이 친히 돌아다녀서 자세히 알 것이다. 서북쪽의 외진 지역은 산이 많고 땅이 좁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화전(火田)으로 농사를 짓고 벼농사를 짓는 땅은 매우 적다. 그래서 매년 수확하는 것으로 자기 지역의 군사들을 먹이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들에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두는 땅이 매우 많아 가을에 수확이 크게 줄어들었다. 남쪽 지방에 약간의 양곡이 있기는 하지만 천 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 〈수송해 오기가 매우 어려워〉 매양 실어오고 나면 냄새가 나곤 한다. 지금 서쪽 변방 지역은 한결같이 현재 있는 군량이 다 떨어졌다. 그렇지만 삼가 부지런히 수습해서 중국 군대의 군량을 도와 우리 나라 군병과 주리고 배부름을 함께 하도록 하겠다. 다만 몇 달이 가지 않아 다 떨어지게 될까 걱정이다. 〈민간에도 사적으로 저축해둔 것이 없어 비록 양곡을 살 은(銀)이 있더라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단지 이번에 귀국에 와서 귀국의 도리(道里)와 민정(民情)을 알았을 뿐만이 아니라 이전 왜적을 정벌할 때에도 감원 군사(監院軍事)로 참여하여 3년이란 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귀국의 사정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쌀이 서북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동남쪽 지역에서 생산된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다만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에서 운송해 오자면 길이 험해서 운반하기가 어려우나 전라도는 길이 가까워서 운반하기가 쉽다. 그리고 등주·내주에서는 군사와 말을 싣는 데에도 오히려 배가 없어 고생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미 차관이 배를 사왔는데, 이를 귀국에게 번거롭게 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천하의 인정은 다름이 없어 군사들이 와서 양곡을 사면 쌀값이 반드시 조금 비싸질 것이다. 그렇지만 비싸게 되면 그 값을 주지 그 실정을 억누르고 값을 조금 쳐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군사들이 너무 많게 되더라도 귀국에게 너무 어려운 청을 해서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이의정(李議政)을 통해 들으니, 대인은 석루공(石樓公) 오야(吳爺)의 일가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전에 우리 나라에 왔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군량을 내어 천병에게 공급하는 것은 애당초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임진, 정유년 간에 황상께서 산동(山東)에 있는 양곡 10만 섬을 풀어 우리 나라의 군병들을 먹여 살려 주었으니,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백성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터럭끝만큼이라도 모두 황제의 힘이다. 우리 나라의 군신 상하가 감히 힘을 다해 명한 것을 따르지 않겠는가. 다만 서북 지역에서 곡식이 잘 생산되지 않는 것은 앞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전라도 등은 해마다 큰 가물이 드는 바람에 운송되어 오는 세곡(稅穀)조차 감축되어 우리 나라의 관원들도 녹봉을 받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실정으로, 통관(通官)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고 〈이러한 내용으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이번에 오는 병사들의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앞에 의논하면서 귀국의 병사들과 주리고 배부름을 함께 하겠다고 했는데, 생사고락을 함께 하려는 의리에 깊이 감동하였다. 뒤에 오는 병사와 같은 경우에도 어찌 차마 주리게 할 수 있겠는가. 산에 올라가 함성을 외치는 것을 본다면 귀국이 차마 하지 못할 것임은 물론 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 왜적을 정벌하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임진년에 10만 명이나 되는 우리 군사가 귀국에서 군량을 공급받았는데, 이때는 병화를 겪은 뒤라 마을은 썰렁하고 창고는 텅 비어 있었는데도 귀국은 이를 지탱해 내었다. 두 번이나 왜적을 정벌하느라 우리 군사들이 거의 20만 명이나 출동하였는데, 비록 군량을 바다로 운송해 오기도 했지만 반 이상 물에 빠뜨려 군량의 반수 이상은 귀국에서 나왔다. 지금에는 군사들이 와도 결단코 10만이나 20만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국은 20년 동안이나 국력을 양성했으니, 돌이켜 지난날과 비교해 보면 재물의 넉넉함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흉년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있다. 이것은 우리 군사들이 정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양곡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되돌아 가란 말인가. 이는 내가 지나치게 헤아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거듭 헤아려 보아도 실정이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우리 나라와 귀국은 의리가 한집과 같고 〈정이 골육과 같으니,〉 의당 없을 때는 물자를 서로 소통해 쓰고 급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그 중에 대처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다고 해서 굳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대로(大老)들은 자세히 헤아려 주기 바란다.〉 ’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군대가 출동할 때에 군량을 공급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어렵게 여겼던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임진년은 전성하던 때와 그리 멀지 않았고 정유년에는 하늘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대풍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행하게도 충청도와 전라도가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어 〈거의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되었다.〉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소주(蘇州)에 풍년이 들면 천하 사람들이 배부르고, 소주에 흉년이 들면 천하 사람들이 굶주린다.」 하였다. 우리 나라의 운반해 오는 양곡은 오로지 남방에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남방의 양곡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감히 우리 나라의 실정을 진달한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싫어한다는 말까지 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더욱 면목이 없어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원래 중국과 같이 매매를 하지 않기 때문에 쌀을 사기가 어렵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 나라에서 이미 차관을 각 도에 파견해서 미곡(米穀)을 모아 서쪽 변방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바닷길이 험하고 멀어 쉽게 도달하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군대가 머무는 곳에는 가시덩쿨이 난다고 하니, 전쟁을 싫어하는 것이 어찌 귀국만 그러하겠는가. 내가 말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운운한 것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의당 내가 실언(失言)한 것에 대한 견책을 받겠다.〉 전라도에서 선천(宣川) 등의 지역에 이르기까지는 바닷길이 그다지 멀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전에 순천(順天)을 갔다온 적이 있어 바닷길에 대해서도 꽤 상세히 알고 있는데 만일 동남 지역의 미곡을 모으려고만 한다면 바닷길은 염려할 것이 없다. 군량에 대해서는 대략 정리가 되었으니 배를 사는 데 대해서 말하자. 요동의 백성들이 난을 피해 귀국에 와 있는 것은 잠시일 뿐 오래 머무는 것은 본래 불편한 것인데, 더구나 그런 가운데 소요스런 일을 일으키니, 반드시 잘 조처하겠다. 양 노야는 칙서에서 말한 「내지(內地)로 오기를 원하고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 원하는 대로 보내든지 머무르게 하든지 하라.」는 뜻을 받들어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지로 보내는 것은 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인데 배에는 병사들만 실을 수 있지 백성들까지 데려다 줄 수는 없다. 원래 은을 내어 배를 사려고 하였지만, 배를 살 수 없으면 나무를 사가지고 공인을 고용하여 만들게 하려고 했다. 만일 귀국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배 1백 척을 사준다면, 곧 등무(登撫)에서 사는 배로 요동 백성들을 싣고 갈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바로 한 가지 일로 둘 다 편리하게 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노와 닻줄 등의 물품은 의당 우리가 자체적으로 준비하여 절대 귀국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다. 그러니 얼마 정도 사려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면 바로 〈그에 해당하는〉 값을 보내주겠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내려준 세 가지 조목 가운데에서 배를 사는 것이 쉬운 것 같다. 다만 배 만들 재목이 깊은 산속에나 있으니, 지금과 같은 농사철에는 베어 오는 것이 쉽지 않다. 개인 소유의 배 가운데 좀 완전하고 견고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을 모집하기도 하고 사기도 하면 약간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모으지 못해서 그 수효를 확실히 알기 어렵다. 요동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우리 나라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성지(聖旨)를 내려 내지로 옮기도록 하였으니, 우리로서는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해 그 뜻을 받들어 주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삼가 잘 알았다. 다만 확실한 배의 숫자가 있으면 매 척의 해당 가격이 얼마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달라. 그러면 즉시 그 가격만큼의 은을 내겠다. 만일 너무 늦게 된다면 시기를 놓쳐 버리게 될 것이다. 요동의 백성들이 귀국에 오래 머무는 것은 〈피차간에 서로 매우 힘들고〉 귀국에게도 불편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찍 보내는 것이 피차간에 서로 편할 것이다. 과연 마음과 힘을 다해 준다면 어찌 요동의 백성들만 재생(再生)의 은혜를 받는 것이겠는가. 양 노야도 이를 힘입어 복명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수비(李守備)도 이를 힘입어 도 노야(陶老爺)에게 보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불러 모으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나을 것인데, 사고서도 부족하면 즉시 그만큼 만들어 채워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지만 농사철이라 멀리 가서 일하기는 불편할 것이다.〉 들으니, 안주(安州)의 상류 지역에 재목이 수만 그루가 있다고 하던데, 지금 농사짓는 백성들을 쓰지 말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은으로 고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 배는 빨리 준비해야지 늦게 해서는 안 된다. 대강 어느 정도의 배를 구하게 되면 의당 양 노야에게 말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 다음날 즉시 은을 보내 줄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원래 배나 수레에 수를 매기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 소유한 배의 크기와 숫자에 대해 잠깐 사이에 쉬이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만일 강제적으로 산다면 무지한 백성들에게 원망을 받을 것이다. 불러 모아 모여진 뒤에야 그것들의 크기를 알 수 있고, 또 그 배들의 견고한 정도를 알아야 그 가격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도 더욱 빨리 받들어 행하고 싶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며칠이 지나야 회답할 수 있을 것이다. 관 참장(管參將)이 철산(鐵山)에 있으면서 배를 만들었는데 많은 공력을 들여 겨우 세 척을 만들었다. 안주의 상류에 비록 재목이 있기는 하지만 다듬어서 만들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그곳 포정사(布政使)로 있는 박엽(朴燁)의 의견이 타당하니, 그렇게 시행하는 것이 무방하겠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세 가지 일이 대략 두서가 갖추어졌으니, 의당 양 노야에게 품달해서 재결받아 처리하겠다. 이밖의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는 감히 번거롭게 국왕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양 노야가 또 의단(議單)이 있으니, 당신들이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분명하게 말해 주기 바란다.’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어제 들으니, 노야가 창성(昌城)과 의주(義州)를 순시하러 오려고 한다던데, 이는 진실로 칙서의 뜻을 받들어 따르려는 뜻일 것이다. 다만 요즘 듣건대, 노적(奴賊)이 진(陣)을 셋으로 나누어 탕(湯)·봉(鳳) 사이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니, 반드시 간첩들을 널리 풀어 놓아 노야의 동정을 샅샅이 엿보고 있을 것이다. 지금 〈물이 말라〉 여울이 얕아졌는데 철기(鐵騎)가 비바람보다도 빨리 돌진해 와서 만일 갑작스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노야의 일신에 관계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안위에 관계된 것이니, 우리 나라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고하지 못한 죄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노야는 안주(安州) 동쪽의 바다와 접한 지역에서 머무르며 통어하고 있다가 사세를 보아 나아가거나 물러난다면 매우 좋겠다. 그리고 변방에 파견한 군대와 차관(差官) 등을 모두 우선 철수시켜 적들로 하여금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하니, 도사가 말하기를 ‘의주는 가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도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노야에게 여쭈어 의논하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도 마땅히 죽기를 각오하고 쟁론해야 하거늘 하물며 이것은 천하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임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보건대, 요즈음 크고 작은 〈중국 관원이나〉 중국 장수들이 하는 짓이 전혀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는 것은 없고 오직 공을 탐내어 가벼이 움직이는 것만을 능사로 삼고 있으니 밤낮으로 걱정이 된다. 비록 좋은 말을 해 주어도 마치 한강에 돌을 던지듯이 조금도 귀담아 듣지를 않으니,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는 것도 하늘이 하는 것이다. 미리 패문(牌文)을 내어 창성과 의주를 순시한다고 떠들어 놓았으니 저 적들이 필시 미리 알 것이다. 이번에 마 도사가 말한 것을 보면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다. 어찌 훈련되지 않은 우리 군사들로 저 수십 만이나 되는 오랑캐 군사들을 대적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배 만들 재목에 대한 것은 내가 이미 ‘전란을 겪은 뒤라 나무가 다 고갈되었다.’고 말했는데 경들은 단지 ‘깊은 산속에 있다.’고만 말했으니, 서로 어긋나게 얘기한 것 같다. 네다섯 번 접견하고도 저쪽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핑계대고서 내 뜻을 얘기하지 않았으니, 경들은 다시 만나 강력하게 말하고 우물쭈물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61권 8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444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농업-농작(農作) / 교통-수운(水運) / 무역(貿易)
○領議政朴承宗以下啓曰: "臣等俱詣監軍衙門, 則監軍令馬都司出接。 (臣等) 馬都司書示曰: ‘梁老爺前送議單, (皆適奉記勅,) 專爲兵餉。 今已(越)數日(矣), 諸大老有成議否?’ 臣等書答曰: ‘叛夷, 天下劇賊。 梁老爺擔當大務, 奉勅東來, 諸大人佐幕、參謀, 必須肝膽相照, (毫髮無隔,) 足以成大功。 (今承密訪機宜, 敢不悉心以對?) 前日議單, 寡君回揭, 已陳大略, 今若逐節更詢, 謹當奉答。’ 都司曰: ‘今日梁老爺銜命東來, 豈止籍貴國之兵, 共圖進取, 以恢復遼左矣? 亦以此賊殘忍酷烈, 貪婪無厭, 旣得遼左, 必窺貴國助兵之說, 爲楚非爲趙也。 惟諸大老早圖利之。’ 臣等答曰: ‘倭寇隔滄海萬里, 猶能虔劉(我士女), 屠滅(我郡邑)。 況此賊與我比隣, 暴虐兇譎, 倍於倭寇, (其爲小邦之憂, 不待智者而知之,) 小邦決不可與此賊兩立。 豈特天朝之叛逆? 實亦小邦之讎怨, 此賊存一日, 則小邦危一日矣。 天兵大擧征討, 小邦敢不猗角協助?’ 都司曰: ‘中國視遼左, 只彈丸、黑子耳, 安能爲我天朝有無? 獨惜貴國隔越海外, 隣賊咫尺。 彼旣敢犯遼左, 亦何有貴邦? 深爲隱憂。 貴國治兵境上, 相機進取, 此亦爲自完地, 非特爲中國 協助計也。 今以中國各省鎭兵, (信地)戰守, 自有餘矣。 但兵家謂「或擊其前, 或撓其後」, 貴國(此)正撓後之兵也。 中國欲多發兵渡海, 波濤之險, 甚爲不便, 故徵兵貴國, 以爲聲援。 貴國調八道精銳, 分守江上, (又)可朝夕至, 視中國越海冒險, 難易又若天淵。 今議發兵多寡幾何, 可詳言之。’ 臣等答曰: ‘鴟梟不鳴, 終非祥禽, 豺虎不噬, 終非仁獸。 此賊將必加兵於小邦, 滅此朝食, 一則爲天朝, 一則爲小邦自完之計。 (凡)人雖下愚, 自爲計則未嘗不智。 小邦君臣, 西望切齒, 欲殺此賊之心, 曷嘗斯須忘哉? 無論南徼防倭, 自慶興至義州數千里(之地), 皆與女眞爲隣, 處處賊路, 處處防守, (擬諸天朝九邊之防, 不是過矣。) 自戊午以來, 五年防戍, 閭左盡散, 國中殘敗, 言之硬塞。 今難別地調兵, 就邊上聚合分防之兵, 可得若干數, 協助掎角, 庶可盡力, 獨當撓後, 恐未易言。 大人妙算, 非鯫生所可蠡測, 若以遼東爲黑子之地, 而不能爲有無, 則恐不然也。 漢、唐都長安, 尙爭襄平, 帝都在燕京, 遼東卽左臂也。 天下大兵, 聚集遼、廣, 終末免失守, 小邦若孺子之失慈母, 日夜悲呼, 唯以殺賊爲心, 特力不給耳。 勅書發於上年, 其時大兵, 集於河西, 方圖夾擊。 今日事局, 與前有異, 未有擊前之擧, 而輕發撓後之兵, 未知如何當欽奉勅(內事)意, 添兵境上, 以嚴防守, 以助聲援。’ 都司 (事)曰: ‘(不佞之遼左爲黑子、彈丸者, 特擧天下大勢言之, 非欲棄之也。) 貴國兵寡, 亦稔知之。 但貴國無他邊, 只南隣桑夷, 北界此賊耳, 留若干以備倭, 發若干以備賊, 卽爲日後撓後之師, (非責今日卽撓賊後)也。 今日勢局, 與去年稍異, 昨已再三言之。 但回復勅書, 須有確議, 豈可止言添兵兩事, 便圖塞責乎? 幸酌量示之。’ 臣等答曰: ‘(大人盛意, 已盡領會。) 兵務精、不務多, 其數之多寡, 不關於成敗。 兵無必勝之兵, 將有難敗之將, 欲得一員良將, 以領三軍, 小邦人才眇然。 雖有邊上, 一二將吏, 未足倚仗, 是用關慮。 摠計邊上各處派守, 僅過萬餘矣。’ 都司曰: ‘貴國古稱多士, 豈至今日而乃苦乏人耶? 今雖調兵, 尙未進勦, 或分防要害, 徐爲擇人, 亦未爲晩。 派守萬餘, 或是今日加增之兵, 或是該地方額兵也。 如謂加增, 僅足萬餘, 則昌城、義州諸處, 爲貴國要地, 豈竟無防守乎? 意者發兵恐爲賊所覺, 而固吝之耶?’ 臣等答曰: ‘古今天下, 安有怕賊之覺, 而吝兵之發乎? 譬如豺狼當戶, 但當整理干戈, (期於斬殺,) 豈可退縮畏懼, 反促其禍乎? 西北常額, 止於萬餘, 此外合調諸處萬兵, 益嚴防守, 以遵奉勅旨耳。’ 都司曰: ‘回復勅旨, 不宜含糊。 亦須明白申說可言「昌城諸處, 原有兵若干, 今遵奉勅書, 又益兵若干, 今以某將統之, 見在某處訓鍊, 聽候大兵進勦, 協力進取。」 如首鼠兩端, 游辭活套, 殊非朝廷屬望之心、貴國忠順之大義也。 先言派守萬餘, 後言別調萬兵, 則摠計亦二萬有奇。 二萬有餘之兵, 如果精銳, 再益天朝大兵, 同心共擧, 則撲滅此賊, 何異拉朽? (滅賊而貴國可高枕矣。) 今謝表內「卽依尊議, 以發兵二萬」, 復旨可也。’ 臣等答曰: ‘謝恩表文, 謹依盛敎。’ 都司曰: ‘兵妥矣, 再議餉餉。 不敢言貴國竟餉我師。 以我之銀, 平買於市, 時價若干, 發銀若干, 只省海運艱難耳。’ 臣等答曰: ‘小邦地勢, 今大人親履詳知。 西北一隅, 山多地窄, 居民皆以火田爲業, 稻田絶小, 每年所收, 不足以養本處之兵。 自兵興以來, 野多抛荒, (秋獲)〔秋穫〕 頓減。 南方雖有些少之糧, 過海千里, (輸送極難,) 每致臭載, 卽今西邊見糧, 一樣匱乏。 然謹當拮据收拾, 以助天兵糧餉, 與小邦軍兵, 同其飢飽, 第恐不過數月而告竭也。 (民間亦無私儲, 雖有餉銀, 恐未易辦也。)’ 都司曰: ‘不特今日至貴國, 知貴國之道里、民情, 先年征倭之役, 亦曾參監院軍事, 三易寒暑, 經遊頗久, 貴國事情, 知之極熟。 米不産於西北, 而産於東南, 是誠然矣。 但運之登、萊, 道險而難, 運全羅路近而易。 且登、萊載兵、載馬, 尙苦無舡, 今已差官買之, 非欲煩告貴國也。 天下人情無異, 兵來買糧, 米價必至小貴。 貴則與之値, 必不敢抑其情而小與之也。 如兵果太多, 又必不敢苦貴國以太難也。’ 臣等答曰: ‘因李議政聽知, 大人是石樓公 吳爺一家人也。 卽承先年來莅小邦之示, 尤不勝感激。 發糧餉饋之天兵, 初非難行之事。 況壬丁年, 皇上發山東糧十萬斛, 賑濟小邦軍兵, 至今生齒不滅者, 秋毫皆帝力也。 小邦君臣上下, 敢不竭力遵依? 但西北生穀之難, 如前所陳, 全羅等道, 年比大旱, 稅運減縮, 小邦多官, 亦停祿俸久矣。 此乃小邦實情, 而諸通官亦可知也。 (以此爲問。)’ 都司曰: ‘今來之兵, 數亦不多。 先議與貴國之兵同飢飽, 深感同舟之義。 如後來者, 豈忍其枵腹? 而見其爲登山之呼, 則諒貴國不忍爲, 亦不肯爲也。 不佞曾記征倭之役。 壬辰之歲, 天兵以十萬仰給貴國, 此時正兵燹之後, 閭里蕭條, 倉庾苦匱, 貴國尙爾支撐。 二番征倭, 我兵幾卄萬, 雖有海運, 半多沒於陽候, 兵糧過半, 出於貴國。 今卽有兵來, 斷不至十萬二十萬也, 而貴國二十年生聚, 回視曩時, 殷富如何? 而乃以歲歉爲辭。 大抵厭苦我師之停泊, 謂無糧, 便當返棹耶? 此或不佞揣摩之過當, 而再四推却, 情似有之。 天朝與貴國, 義同一家, (情同骨肉,) 有無原當相通, 緩急自當相顧。 何可以中有難處之勢, 而堅意拒絶乎? (惟諸大老詳計之。)’ 臣等答曰: ‘師行糧從, 古人所難。 小邦壬辰年, 去全盛時不遠, 丁酉年, 天憐百姓, (年)年大豐。 不幸忠淸、全羅兩道, 兩年失稔, (幾於赤地。) 古語云: 「蘇州熟, 天下飽; 蘇州歉, 天下飢。」 小邦米運, 專靠於南方, 而南方匱乏, 以此敢陳小邦之情, 反承厭苦之敎, 豈有此理? (更無顔面, 不勝慙悚。) 小邦元無買賣如中國, 故恐換米之爲難也。 小邦已差官派送諸道, 募得米穀, 將送西邊。 第慮海路險遠, 未易得達也。’ 都司曰: ‘師之所住, 荊棘生焉, 則厭苦兵戎, 何止貴國? 不佞所言, 非有他腸。 (至如云云, 則不佞當受失言之責矣。) 全羅抵宣川等處, 固是海道不甚遠, 亦不甚險。 先年往來, 順天海道, 亦頗詳知。 如肯募東南米穀, 當 (尙)無慮海道也。 兵糧略有次第, 請言買舡。 遼民避亂貴國, 特其暫耳, 久住原是不便, 況中有騷擾生事, 不可不善爲處之。 梁老爺遵奉勅旨內有言「願歸內地, 聽憑遣留。」 然遣之內地, 非舡不可來, 舡只可粧兵, 不堪度民。 原欲發銀買舡, 非買船卽買木, 雇工造之。 如貴國肯爲買舡百隻, 便可以登撫所買之舡, 卽載遼民以去, 是誠一擧兩便之術也。 (各年)繩纜諸物, 當自備之, 必不敢煩貴國也。 可明言肯買若干, 以便送價(若干)。’ 臣等答曰: ‘下示三條內, 買舡似易。 但舡材在深山大嶺中, 當此農月, 斫下不易。 私舡中稍完固, 可以濟海者, 或募得或買辦, 可得若干數。 時未湊集, 難的其數。 遼民久困於弊邦, 聖旨又令其遷內, 敢不悉心竭力, 奉以周旋?’ 都司曰: ‘漢 謹聞命矣。 但船有的數, 每隻該價若干, 明以示之, 卽可奉價, 若干奉銀, 便爲買船, 如太遲則無及於事。 遼民久居, (於彼此亦甚苦, 於)貴國亦有不便, 早遣之, 彼此均便也。 果悉心竭力, 豈特遼民荷再生之恩? 梁老爺可藉此復命, 李守備可藉此, 以報陶老爺。 (如募不如買, 買而不足, 卽造添若干, 亦可農月, 不便遠出工作。) 聞安州上流, 有材木數萬, 今不以荷鍤之民取之, 而以銀雇游手之人取之, 此亦不妨。 此舡宜早不宜遲, 如約得多少, 當言之梁老爺。 明日卽當送銀。’ 臣等答曰: ‘小邦元不算舟車, 私舡大小多寡, 立談間未易知之。 如或抑買, 小民無知, 不免怨咨。 招募聚會, 可知其大小, 且知其堅脆, 方定其價直多少。 小邦尤欲急急奉行, 事勢如此, 過了數日, 便卽回話。 管參將在鐵山造舡, 多費工力, 僅造三隻。 安州上流, 雖有材木, 恐粧造未易也。 然到那邊布政使朴燁議妥, 施行不妨。’ 都司曰: ‘三事俱略有頭緖, 當奉稟老爺, 以聽裁處。 此外小事, 不敢煩國王。 梁老爺 立 又有議單, 惟諸大老裁酌以復容, 明白言之。’ 臣等曰: ‘昨聞老爺欲巡視昌、義而來, 此固遵奉勅書之意。 但近間奴賊分三陣, 屯結於湯、鳳之間, 必廣布細作, 窺覘老爺動靜, 無所不至。 目今灘淺(水枯), 鐵騎豕突, 急於風雨, 萬一有蒼黃之事, 則非但老爺一身, 係天下安危, 小邦不能先事預告之罪, 何所逭也? 願老爺駐節安州以東濱海之地, 相機觀勢, 移避進退幸甚。 邊上撥軍及差官等, 竝姑撤罷, 使賊不知天兵駐箚形止, 恐合機宜。’ 都司曰: ‘義州則不可不往見。 然亦不可不深慮, 當稟議老爺矣。’" 傳曰: "事係本國存亡, 亦當以死爭之。 況此係干天下安危者乎? 予觀近日, 大小(唐官、) 唐將所爲, 全無遠慮, 惟以貪功輕動爲能事, 日夜憂虞。 雖陳藥石之言, 如以水投石, 小無動聽, 小無動聽之事, 此亦天也。 先發牌文, 以巡視昌、義兩邑聲言, 伊賊必先知之矣。 觀此馬都司所言, 尤極無理。 安能以我不鍊之卒, 敵彼數十萬㺚兵乎? 至如船材事, 則予旣以‘兵火後, 樹木蕩盡(傷)’爲辭, 而卿等只以深山大嶺云云, 似爲牴牾。 四五度接見, 諉以彼不發端, 予意不得陳諭, 卿等更見極言, 勿爲含糊, 以危社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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