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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176권, 광해 14년 4월 18일 계미 1번째기사 1622년 명 천계(天啓) 2년

양 감군이 서울에 들어오다

양 감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왕이 모화관에서 칙서를 맞이하고 감군을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감군은 이름이 지원(之垣), 자가 맹견(孟堅), 호가 단애(丹崖)이며, 등주(登州) 사람이다. 정미년 진사인데 이때 이르러 기복(起復)하여 하남 안찰 부사(河南按察副使)가 되어 요동 남로 감군(遼東南路監軍)으로 충원되어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천자가, 우리 나라가 적에 대항하는 의분(義憤)이 많다고 하여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서 은(銀) 3만 냥을 내려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죽은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주고 아울러 진(陣)에 있는 군병들에게 음식을 베풀어주는 데 쓰라고 하였다. 그런데 왕이 궁중에 머물려둔 채 끝내 내놓지 않았다. 이에 감군이 탐욕스럽고 염치가 없는 사람으로서 각종 명목을 만들어 교묘히 얻어낸 것이 무려 수만 냥에 이르렀다. 조정으로 돌아간 후 과관(科官)에게 논핵을 받아 삭직되고 평민으로 되었으며, 뒤미처 은 7만 냥을 징수하였다. 〈중국 사람들도 침뱉고 욕하였으며, 시를 지어 그를 조롱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60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437면
  • 【분류】
    외교-명(明)

    壬戌四月十八日癸未梁監軍 之垣 入京。 王 慕華館, 勅仍 接見監軍於仁政殿 還宮受監軍名之垣, 字孟堅, 號丹崖, 登州人也。 丁未進士, 至是起復, 爲河南按察副使, 充遼東南路監軍, 越海以來。 天子以我國敵愾, 降勅獎諭, 欽賜銀三萬兩, 使之分賜戰亡將士, 兼爲陣上軍兵犒饋之用。 王留置宮中, 竟不出。 監軍貪汚無恥, 作色目巧取, 多至累萬兩銀。 還朝之後, 爲科官所論, 削職爲民, 追徵銀七萬兩。 (華人亦唾罵, 至有作詩嘲之)云。


    • 【태백산사고본】 60책 60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4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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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