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의 침입에 대항한 중국장수들의 절개에 대한 보고
오랑캐의 진영에서 보낸 글에,
"성을 지킨 것은 청하성(淸河城)이 제일이었으며, 야전(野戰)을 가장 장렬하게 한 것은 흑산(黑山)의 싸움이었습니다. 강 총병(姜摠兵)은 심양(瀋陽)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것을 보고는 자기의 본채(本寨)를 버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마침 흑산의 오랑캐가 심양을 공격한 적들과 힘을 합해 맞이해 싸웠습니다. 강 총병은 천병(川兵) 6, 7천으로 오랑캐의 기병 10만을 상대해 싸워 비록 수효의 부족으로 끝내 모두 섬멸당했으나, 오랑캐들의 사상자 수효도 그와 엇비슷하여 오랑캐들은 지금도 간담이 서늘해 하고 있습니다. 오랑캐 병사들은 청하성을 공격하면서 이영방으로 하여금 성주(城主)를 불러 항복시키게 하였는데, 성주가 갑옷을 입고 성에 올라가 말하기를 ‘너는 이미 저들에게 항복하였으니, 친구의 의리가 없다. 빨리 돌아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화살로 쏘겠다.’ 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굳게 지키며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퍼부었습니다. 오랑캐의 병사들은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여덟 차례나 거듭하는 동안 사상자가 매우 많았고, 아침부터 싸워 별이 나올 때까지 끝이 안난 때도 여러 날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성주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고 병사들도 투항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특히 개원성(開元城)에서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적들이 성에 들어오자, 사람들이 다투어 목을 매고 죽어서 집집마다 빈 들보가 없고 나무마다 빈 가지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한 집안 식구 모두가 절의를 지켰는가 하면, 5, 6살 된 아이들도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강 총병과 청하·개원의 성주는 모두 이름을 잃어버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 오랑캐들은 요양에 이르러 성지(城池)가 험하고 견고하며 병사들의 수효도 아주 많은 것을 멀리서 보고, 사기가 저상되어 물러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본 노추가 말하기를 ‘한발이라도 물러서면 나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먼저 나를 죽이고 물러가도록 하라.’ 하고, 말을 타고 단신으로 나아갔습니다. 명나라 군사들은 성의 서쪽에 진지를 치고 있다가 오랑캐를 보고 움직였는데 오는 것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 오랑캐들도 감히 가볍게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버려, 10여 리 사이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승세를 탄 오랑캐들은 동쪽 성으로 진격하여 함락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는 진원루(鎭遠樓) 위에 앉아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고는 군수(軍需)를 모두 누 아래에 쌓은 다음, 의관을 갖추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오래도록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뒤 누에 불을 지르고 불에 타 죽었습니다.
안찰사 장창국(張昌國)은 적이 문 앞에 닥쳤으나 의자 위에 앉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홍태주에게 붙잡혀 추장 앞에 끌려가 절을 시키자 창국은 얼굴빛을 똑바로 하고 꾸짖기를 ‘나는 천자의 신하인데, 어찌 갈노(羯奴)에게 절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랑캐들이 이영방과 동양성의 사례를 말하자, 창국이 말하기를 ‘그들은 개와 돼지들이다. 내가 어찌 그들과 같겠는가.’ 하였습니다. 추장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섬기면 자녀와 옥백(玉帛)을 네 마음대로 취할 수 있고 성지와 영토를 네게 나누어 주겠다.’ 하니, 창국이 말하기를 ‘죽음만이 나의 직분이다. 빨리 죽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창국이 허리에 차고 있던 인(印)을 오랑캐 중에서 빼앗으려는 자가 있었는데 창국이 들어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금이나 옥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동인(銅印)이다. 너희들이 갖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으니, 이 물건과 함께 나를 구렁텅이에 버리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추장이 또 묻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가?’ 하니, 창국이 말하기를 ‘내 한장 글을 쓸테니, 이를 본국에 전해 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모두 너희가 싫어할 내용인데, 어찌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추장은 호장 몇 사람으로 하여금 창국을 방으로 보내어 스스로 활줄로 목매어 죽게 한 다음, 관곽과 수의를 갖추어 태자하(太子河) 북쪽 송림 가운데에 묻어 주도록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나를 섬김에 있어, 장 안찰이 남조(南朝)를 섬긴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유 총병(劉摠兵)과 교 유격(喬游擊)의 죽음도 물론 높은 절의이다. 그러나 흑산에서의 강 총병과 청하(淸河)·개원(開元)의 수장들도 이른바 ‘강개 살신(慷慨殺身)’한 자들이다. 원 경략이 여유있게 죽음에 나아간 것과 장 안찰의 굽히지 않은 절개는 조 통판(趙通判)·문 소보(文小保)에 비하더라도 크게 뒤지지 않는데, 어찌 군사를 잃고 군율을 어겼다고 하여 그보다 낮다고 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는 참으로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많으니, 가상하다. 】
- 【태백산사고본】 58책 58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403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虜中言: "守城之善, 莫如淸河; 野戰之壯, 莫如 墨 黑山。 姜摠兵見瀋陽圍急, 棄本寨而來救, 遇於 墨 黑山 虜, 竝攻瀋之兵以迎之。 姜以川兵六七千, 當虜騎十萬, 雖衆寡不敵, 終至於盡殲, 虜之死傷亦相當, 虜至今膽寒。 虜兵進薄淸河, 使李永芳招降城主, 城主被甲, 登城謂曰: ‘你旣投彼, 則無朋友之義, 可速去。 不然, 且放箭’, 乃嚴兵固守, 矢石如雨。 虜兵八進八退, 死傷極多, 朝而戰, 見星未已者累日。 及至城陷, 城主力戰而死, 士卒亦無投降者。 開元城中, 最多節義之人。 兵纔及城, 人爭縊死, 屋無虛樑, 木無空枝。 至有一家全節, 五六歲兒, 亦有縊死者。 【姜摠兵、淸河・開元城主, 皆失其名, 可惜。】 及至遼陽, 望見城池險固、兵衆甚盛, 虜皆意沮欲退。 老酋曰: ‘一步退時, 我已死矣, 你等須先殺我後退去’, 卽匹馬獨進。 漢兵陣於城西, 見虜而動, 其來甚整, 虜亦不敢輕之。 纔一交鋒, 馬首已回, 十餘里之間, 積屍如山, 進薄東城, 乘勢陷之。 經略袁應泰坐於鎭遠樓上, 知事不濟, 盡聚軍需, 積於樓下, 正衣冠北向四拜, 痛哭良久, 火其樓而燒死。 按察使張昌國坐於椅上, 兵已及門, 略不動容。 爲洪太主所執, 擁至酋前, 使之拜, 張正色叱之曰: ‘我是天子臣, 豈有拜羯奴之理?’ 虜以李永芳、佟養性之事言之, 張曰: ‘此輩特一犬豕, 吾豈與之爲伍?’ 酋曰: ‘汝事我, 子女玉帛, 惟汝所取, 城池境土, 與你分之。’ 張曰: ‘自分一死, 惟願速殺。’ 腰間帶一印, 虜有欲奪取者, 張以手擧而視之曰: ‘此非金玉, 只是一顆銅印。 汝得之無用, 願與此物, 同棄一壑。’ 酋又問曰: ‘你無所欲爲者乎?’ 張曰: ‘若使我書了一紙, 以傳於本朝則善矣。 但我所欲書者, 皆汝不好看者, 奈何?’ 酋使胡將數人, 送張至一室, 以弓絃縊殺之, 具棺槨衣衾, 葬於太子河北松林中, 謂其下曰: ‘汝等事我, 當如張按察之事南朝也。’ 【深河之役, 劉摠兵、喬(遊擊)〔游擊〕 之死, 固已卓乎其節, 而又有 墨 黑山之姜、淸河・開元之守將, 此猶所謂慷慨殺身者也。 至於袁經略之從容就死、張按察之抗節不屈, 雖比之趙通判、文少保, 亦不多讓, 奚可以喪師失律, 少之哉? 中朝信多節義之士, 吁可尙也已。】
- 【태백산사고본】 58책 58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403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