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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169권, 광해 13년 9월 9일 정미 2번째기사 1621년 명 천계(天啓) 1년

여진의 침입을 막기위해 국서를 보내지 않는 이유를 잘 이해시킬 것을 명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의 차사들이 이미 만포(滿浦)에 도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넉넉히 잘 접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인데, 이미 충신(忠信)이 국서를 가지지 않고 떠났으니, 형세로 보아 저들이 트집을 잡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어 이제는 국서를 만들어 보내기가 곤란하니, 충신에게 자신의 의견으로 말하게 하기를 ‘엊그제 소호(小胡)가 가지고 온 서신을 그가 내놓지 않고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끝내 보지 못하였다. 비록 답장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형세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우호적으로 지내는데 있어서는 신의가 중하다. 나는 벼슬이 높고 이름이 난 사람이니, 말로 전하더라도 피차의 사정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이 무방하겠으니, 파발로 하유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금일의 일은 마음이 아파 무어라 말을 못하겠다. 이 적들의 세력은 어떠한가.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무오년에 변이 일어난 뒤로 나의 의견이 일일이 다 징험되었다. 이른바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됐다.’고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치우치고 융통성없는 잘못된 의견에 불과하다. 대신들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 안정하지 못하니, 끝내는 나라가 오랑캐에게 돌아갈 것이다. 누구을 탓하겠는가. 국서는 잘 만들어 들여보내야 하겠으나 사세가 급박하니, 우선 아뢴 대로 하유하는 한편, 중국 사람들의 이목이 번거로운 것 같아 국서를 보내지 못한다는 뜻을 잘 이해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겁맹(劫盟)과 배례(拜禮) 등의 일에 대해서도 자상히 일러 주도록 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지난 무오년에 중국에서 변이 일어난 뒤로 우리 나라도 그 환란을 똑같이 받아 사기(事機)의 어려움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성상의 신묘한 헤아림은 번번이 닥쳐올 일들을 맞추셨습니다.

〈옛적 요(堯)임금은 곤이 명을 어기고 동족들을 학대한 것을 알면서도 사악(四岳)들이 그의 능력을 써보자고 거듭 청하여 이를 받아들였는데, 그뒤 9년 동안 치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위로는 요임금같은 밝으심이 있고 아래의 신들은 곤과 같은 잘못이 있는데〉 조심할 것을 심상히 하여 나랏일을 그르쳤으니, 어찌 감히 모든 것을 두려워하여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남의 일처럼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만 ‘신들은 식견이 고루하여 여러 신하들과 마음을 다해 상의해 가며 기어코 좋은 계책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나랏일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으니, 예절상의 체모만 꼭 다툴 것이 없다.’는 뜻으로 재삼 복계하였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무엇보다 투항한 소호(小胡)를 잘 접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파악한 다음, 은밀히 이간의 술책을 사용하여 홍태주(洪太主)가 우리 나라에 대해 전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싸움을 늦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뜻을 파발을 급히 보내 〈찬획사(贊劃使)와 찬리사(贊理使) 등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충신을 지휘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이렇게만 하유한다면 변방의 신하들이 어떻게 잘 조처할 수 있겠는가. 더 명백히 규획하여 일러주도록 하라."

하였다. 【홍태주는 누르하치의 셋째 아들이다. 항상 우리 나라를 침략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형인 귀영개(貴盈介)가 막았다. 뒤에 참호(僭號)를 이어받았다. 】


  • 【태백산사고본】 58책 5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40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備邊司啓曰: " 等, 想今已至滿浦當從優宴饋, 期得其歡心而已, 忠信不齎國書而行, 彼之執言, 勢似然矣。 但廷議已定, 今難修送, 忠信自以己意語之曰: ‘頃日小胡齎來之書, 因其徑還, 終不得見, 雖欲修謝, 其勢末由。 兩國好和, 信義爲重。 以我官高名聞之人, 可以口傳, 通彼此之情。’ 云云, 無妨, 以此說話, 開諭偕往之意, 撥上馳諭。" 何如傳曰: "今日之事, 尙忍言哉? 此賊勢如何? 果可以我國兵力, 其能守禦乎? 自戊午生變以後, 予見一一皆驗矣。 所謂廷議已定者, 不過賣國偏塞之誤見耳。 大臣亦畏首畏尾, 不得安, 國家將未免終爲左袵之歸。 誰執其咎乎? 國書不可不善措入送, 而但事勢甚急, 姑依啓下諭, 而唐人耳目似煩, 不得送書之意, 使之善諭。 且劫盟、拜禮等事, 竝詳指授。" 回啓曰: "自戊午中國生變之後, 我國亦等受其禍, 事機之難, 日益千萬。 聖謨神算, 動符將來。 (昔, 帝堯方命圮族, 四岳以試可申請, 而九載績用不成。 今者上有帝堯之明, 下有試可之誤,) 尋常恐懼, 致僨國事, 其安敢首尾畏懼, 秦越安危乎? 只以‘臣等識見孤陋, 欲與諸臣竭心商確, 期得其善策而已, 國書之不可爲, 禮貌之不必爭’, 再三覆啓矣。 今計莫如善待投 (小胡), 揣摩其實情, 密密行間, 使洪太主, 不得專管東事, 則似足以款兵緩禍。 此意從撥上, 急急密諭(於贊畫、贊理等使, 使之指揮忠信)。" 傳曰: "依啓。 只如是下諭, 邊臣何以善圖乎? 更加明白, 規劃指授。" 【洪太主奴酋第三子。 每有東搶之意, 其兄貴盈介止之。 後襲僭號。】


    • 【태백산사고본】 58책 58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40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