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에서 궐 안의 서적을 존경각에 옮길 것을 청하자 규례대로 하게 하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에서 칭송을 받는 이유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고 문을 높이고 예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조사가 나올 경우 관학의 유생들이 반은 교외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반은 대궐 안에서 공경히 맞이하였습니다. 조사가 문묘 사당을 참배할 때에 〈이르면 장보(章甫)를 쓴 유생들이 청금(靑衿)으로 옷차림을 갖추고〉 역시 공경히 맞이하고 공경히 전송하였으며, 문묘 사당을 참배한 다음에 조사가 명륜당(明倫堂)에 좌정하면 유생들은 뜰에 가득 행렬을 지어 서서 재배를 올리고, 예를 다 마치고 나면 조사가 으레 말하기를 ‘훌륭한 선비들이 이처럼 많으니 문풍(文風)의 융성함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 있는 유생들이 적어서 모양을 이루지 못할까 〈이만 저만 걱정이 될 뿐만 아니라,〉 대사성 이익엽(李益燁)은 실직 당상으로 각 조항의 일을 전적으로 관할하고 있었는데 현재 휴직 중에 있으며, 지관사 이이첨(李爾瞻)과 동지사 한찬남(韓纘男)은 모두 사신으로 나가 있고, 단지 신 남근(南瑾)만 남았을 뿐입니다. 〈앞으로 본관에서는 예식을 세 차례나 연습해야 하는데〉 둔하고 용렬한 일개 노신(老臣)이 혼자서 이 일을 맡아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고 〈게다가 병이 들거나 사고가 생기는 것도 미리 생각해두지 않을 수 없으니〉 더더욱 근심스럽습니다.
그리고 명륜당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존경각(尊經閣)은 〈옛날부터 없었던 것으로〉 난리를 겪은 뒤에 겨우 복원하여 편액을 높이 달기는 하였으나 단지 낡고 더러워진 몇 권의 책이 있을 뿐입니다. 조사가 만약 혹시라도 〈편액을 보게 된다면 반드시〉 문을 열어 보고 싶어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너무도 볼썽사나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홍문관(弘文館)과 시강원(侍講院)에 있는 새 책 중에서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쓰는 책을 제외한 사서 육경(四書六經)과 백가 제자(百家諸子)와 사서(史書)를, 이단 서적과 우리 나라 서적은 빼놓고 한 질씩 우선 옮겨 놓아 만일의 근심을 대비해야 하겠기에 〈황공하오나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궐 안에 있는 서책을 어찌 옮길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반드시 선조(先朝)의 예전 규례가 있을 것이니, 일체 규례에 따라 살펴 행하도록 하라. 당상은 비록 한 사람밖에 없지만 사성(司成) 이하 많은 관원들이 있으니 어찌 온당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속히 세 차례의 의식 연습을 행하여 일일이 신칙해 놓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55권 98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369면
- 【분류】외교-명(明)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成均館啓曰: "我東方見稱於中朝者, 以其崇儒、重道、右文、守禮也。 自前詔使之來, 也館學儒生等, 一半祗迎於郊外, 一半祗迎於闕內。 (及其)詔使謁聖, 則(章甫之士具靑衿,) 亦爲之祗迎、祗送, 至於謁聖之後, 詔使坐明倫堂, 則儒生等滿庭成行, 再拜禮畢之後, 詔使例曰: ‘多士濟濟, 可見文風之盛也。’ 豈不美哉? 目今儒士之在京者乏少, 恐不成模樣。 (非但悶慮莫甚,) 大司成李益燁, 以實職堂上, 專管各項事, 而時在呈告中, 知館事李爾瞻、同知事韓纘男, 俱出使, 只有臣南瑾。 (而前頭本館習禮至於三度,) 駑劣一老臣, 獨當未安, (疾病事, 故亦不可預料,) 尤極悶慮。 且明倫堂東北隅, 有閣曰尊經, (自前古有之,) 亂離之後, 僅得復設, 扁額高懸, 而只有汚陋若干卷帙。 詔使若或(目及扁額, 必欲)開見, 則不亦埋沒乎? 請弘文館、侍講院多有新秩, 經筵、書筵件外四書六經, 及百家諸子、史, 除異端及我國之書, 各一件姑令移置, 以備萬一之虞。 (惶恐敢啓。)" 答曰: "玆 闕內書冊, 何可移置乎? 此事必有先朝舊例, 一依舊例察行。 堂上雖獨在, 亦有司成以下多官, 有何未安。 速爲三度習儀, 一一整飭以待。"
- 【태백산사고본】 55책 55권 98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369면
- 【분류】외교-명(明)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