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건 도감에서 요포 마련에 공명첩과 부인첩 등의 판매를 건의하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신들은 요포(料布)를 마련하는 일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만일 이런 계책을 가지고 와서 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록 아주 하찮은 말이라도 또한 다 듣고서 살폈습니다. 일전에 행 사용 지응곤(池應鯤)과 송경신(宋敬臣), 무겸선전관 이현충(李顯忠), 전 부장 유화춘(柳和春)이 도감에 글을 올리기를, ‘오늘날의 형세로는 재물을 모으는 길을 널리 여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난리가 난 이후로 무릇 당상의 첩지를 받은 사람들은 실직(實職)과 영직(影職)을 막론하고 몇 천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정도이지만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자기 자신만 영화롭고 귀할 뿐이지 그 집안 식구에게는 미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 처의 평생 소원은 오직 부인첩(夫人帖)에 있으며 혹 처가 죽고 아들이 있으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죽은 뒤의 영화를 얻을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부인의 공명첩을 대량으로 만들어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그 공사천(公私賤)의 잡된 부류로서 부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전후의 갖가지 당상을 받은 사람을 남김없이 성책(成冊)하고 그 첩지를 나누어 주되, 그 중에 처가 죽고 남편이 살아 있거나 남편이 죽고 처가 살아 있는 자 및 남편과 처가 모두 죽고 아들과 손자만 현재 살아 있는 사람, 그리고 공으로 인해서 당상관에 추증된 사람에 대해 모두 남김없이 낮은 값으로 징수한다면 누군들 흥기하여 그 소원을 이루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당상관이 된 사람은 비록 통정 대부의 품계를 얻고 임시로 첨지(僉知)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더라도 실제는 직임이 없는 품계이기 때문에 비록 이미 품계를 받았더라도 도리어 스스로 후회하며 한탄하고 있으니, 지금 불러 모을 즈음에 거의 모두 피하고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절충 장군(折衝將軍)이란 군직(軍職)의 고신(告身)을 많이 만들어 각도에 가지고 가면 원근의 보고 듣는 자들은 고신이 빈 품계와 다르고 군직이 실직이 없는 것과는 다른 것을 알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서 가선 대부 이상에 대해서도 군직의 고신을 써서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준다면 누군들 앞다투어 모집에 응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난리 뒤에 군사적 공로가 있는 자와 곡식을 바친 자에 대한 임금의 교지에는 으레 군공(軍功)이나 납속(納粟)이라는 두 글자를 쓴다고 하는데, 이번에 진휼청의 곡식을 모으는 공명첩에는 임금의 도장을 찍을 곳에 납속이란 두 글자를 쓰지 말고 단지 첨지 이하 등의 관직명만 써 넣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영직(影職)이 아니고 바로 실직(實職)입니다. 일전에 또 당상 3품 실직 이하의 공명첩 및 면향첩·면역첩·허통첩 등을 부지런하고 민첩한 문관에게 넉넉하게 주어보내서 속히 팔아서 쓰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또한 도감의 초기(草記)를 인하여 종2품 이하부터 직장까지의 실직을 추증하는 공명첩 및 부인 공명첩을 내려보내어 곡식을 모집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신들은 지금 당상 실직 첩지는 무명 몇 필이고, 당하 3품 실직부터 직장 실직까지는 각각 무명이 몇 필이며, 종2품 실직 이하부터 직장까지의 벼슬을 추증하는 데는 무명이 몇 필이라는 것을 헤아려서 종전의 계하사목(啓下事目)을 상고하고 참작하여, 모두 장수(張數)와 더불어 장차 별록(別綠)을 만들어 계품하겠습니다.
부인첩에 대해서도 해조가 만들어 낸 전례가 있다고 하니, 지금 장차 필수(匹數)를 참작하여 결정해서 상의 계하를 받은 뒤에 해조로 하여금 만들어내도록 하고, 도감에서 전교에 의하여 부지런하고 민첩한 문관을 골라서 지방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지응곤 등이 진달한 것도 이런 계책입니다. 그 중에 이른바 이미 곡식을 바치고 당상이 된 자는 비록 통정 대부의 품계와 임시로 첨지의 호칭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실로 직임이 없는 품계이므로 비록 이미 관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도리어 스스로 후회한다고 한 조항은, 이런 부류는 모두 무명 필수(匹數)를 참작하여 결정해서 더 바칠 것을 허락하고 실직의 첩지를 고쳐서 주고, 실직 첨지 이하의 첩지 외에 상호군·대호군·호군의 첩지도 모두 만들어 주어서 그 바친 무명 필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선 대부 이상의 실직은 전교한 내용 중에 들어 있지 않는데, 실직 동지 첩지는 비록 경솔하게 주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지만 일전에 곡식을 바친 공로로 이미 가선 대부가 된 자는 동지 실직의 첩지를 만들어 주고 그로 하여금 무명을 더 바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추증하는 관직은 생전에 받은 관직과는 다름이 있으니, 종2품 가선 당상 이하의 실직 첩지는 필수를 낮추어 정해서 나누어 주어 모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인첩에 대해서도 생전에 받는 자와 추증되는 자를 모두 필수를 참작하여 결정해서 앞다투어 모집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윤허를 얻는다면 공명첩과 고신을 가지고 가는 문관을 보낼 때에 각 항목의 사목(事目)들을 기일보다 앞서서 마련하여 계품하여 결정한 뒤에 주어 보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2품과 3품의 부인첩은 바치는 것이 너무 가벼우니 각각 10필씩 더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공명첩을 마련할 때 신들도 부인첩에 있어 바치는 것이 약소하다고 여겼으나, 부인첩은 바로 남편의 관직을 따라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모집에 응하여 베를 바치고 동지나 첨지가 된 사람은 무명 필수가 많게는 2동이나 되고, 적어도 1동을 밑돌지 않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궁핍하고 재물이 다 없어진 때를 당하여 부자도 이미 살기에 급한데, 집에서 1, 2동의 무명을 마련하여 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부인첩의 가목(價木)까지 일시에 마련하여 내려면 그 형세가 더욱 어려워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필시 전연 없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그 아내의 부인첩은 20필로 참작하여 결정해서 입계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은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합니다.
이번에 지응곤·송경신·이현충 등을 장차 나누어 보내기 위하여 불러서 서로 의논해보니, 지응곤 등은 ‘부인첩 1장을 정목(正木) 20필로 기준을 삼으면 모집에 응할 리가 없습니다. 당상이나 가선 대부를 논할 것 없이,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물건을 바친 사람·노인직에 있는 사람·정과(正科) 출신·이미 실직을 지낸 사람·문음(門蔭)을 논할 것이 없이, 새로 관직에 제수된 사람·이미 관직에 제수 된 사람·추증된 사람을 논할 것 없이 그 처의 부인첩은 모두 정목(正目) 15필을 기준으로 삼아 각각 남편의 관직에 따라 주는 것을 허락한다면, 마련하여 바치는 자도 너무 많다고 싫어하지 않아서 거두어들이는 베도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말을〉 가지고 상의해보았는데, 지금의 사세가 과연 응곤 등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응곤 등이 이미 이 직임을 받았으니, 그가 말한 것에 의하여 책임지워 일의 공효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지응곤을 경상도에, 송경신을 전라도에, 이현충을 공흥도에 보내되, 별장(別將)이라 호칭하여 곡식을 모집하여 받아들이는 일을 나누어 관장하도록 하였다.【【 계축년053) 의 큰 옥사(獄事)가 있은 뒤로 어지러워 망하게 되는 것이 이미 판가름나고, 무오년054) 의 수의(收議)한 일로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으며, 궁궐을 짓는 역사로 민생이 이미 바닥이 났다. 그러나 죽고 사는 큰 형세는 지응곤 등이 조도사(調度使)로 차출되어 파견되는 날에 결정되었다. 응곤 등은 모두 미천한 서얼로서 남을 위하여 일하면서 때를 타 악한 일을 도왔다. 조도사의 칭호를 갖게 되어서는 지방에서 한도 끝도 없이 수탈을 자행하면서 몸소 여염집에 들어가 찾아내기까지 하여 한 말 되는 곡식도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방백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친히 주객의 예로써 대하였으니, 대체로 은나라 주(紂)를 재력으로 섬겼던 비렴(蜚廉)과 악래(惡來) 같은 무리라고 하겠다. 】 】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325면
- 【분류】재정-잡세(雜稅)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營建都監啓曰: "臣等於料布措辦之事, 百思千慮, 如有以此策來告者, 則雖微末之言, 亦皆聽而察之。 頃日行司勇池應鯤・宋敬臣、武兼宣傳官李顯忠、前部將柳和春呈狀于都監曰: ‘今日之勢, 莫急於廣開生財之路。 亂離以後, 凡堂上受帖者, 毋論實、影職, 不知其幾千, 而生前死後, 身獨榮貴, 不及室家。 故其妻一生所願, 唯在夫人帖, 或妻死而有子, 願爲其母, 欲得身沒之榮。 今若量出空名夫人帖, 分送諸道, 除其公私賤雜類不當爲夫人者外, 前後各樣堂上人, 無遺成冊, 分給其帖。 而其中妻死夫存, 夫死妻存者及夫妻皆死, 而子孫見存者, 與因事功追贈堂上人, 竝令勿遺, 輕價收捧。 則孰不興起, 以遂其願? 且所謂堂上之人, 雖得通政大夫之資、假稱僉知之號, 而實是無職之資, 雖已受資, 反自悔恨, 及今召募之際, 率皆避而不應。 今若多出折衝軍職告身, 齎送各道, 遠近瞻聆, 知告身之異於空資、軍職之異於無職。 而推而至於嘉善以上, 亦用軍職告身, 俾遂平生之願, 則孰不爭先應募?’ 云云。 臣等伏聞亂後軍功、納粟官敎, 例書軍功、納粟二字。 而今番賑恤廳募粟空名帖, 御寶安印處, 不書納粟二字, 只以僉知以下等職名書塡。 此則非影職, 乃是實職也。 頃日又有堂上三品實職以下及免鄕、免役、許通等帖, 優數給送勤敏文官, 速爲貿用之敎。 又因都監草記, 有追贈從二品以下至直長實職及夫人空名帖, 下送募納之敎。 臣等今方料理堂上實職帖木幾匹, 自堂下三品實職至直長實職各木幾匹, 追贈從二品實職以下至直長各木幾匹, 從前啓下事目, 相考參酌, 竝與張數而將爲列錄啓 各稟矣。 至於夫人帖, 亦有該曹成出前例云, 今將酌定匹數啓下後, 令該曹成出, 自都監依傳敎, 擇定勤敏文官, 分送于外方矣。 今此池應鯤等所陳, 亦是此策。 其中所謂已爲納粟堂上者, 雖得通政大夫之資、假稱僉知之號, 而實是無職之資, 雖已受職, 反自悔恨云。 此類則竝爲酌定木匹之數, 許令加納, 改給實職之帖, 實職僉知以下帖外, 上護軍、大護軍、護軍帖, 竝爲成給, 隨其所納木匹之多少而分給宜當。 嘉善以上實職, 則不在於傳敎之內, 實職同知之帖, 雖不可輕易許給, 前以納粟之功, 已爲嘉善者, 則同知實職成給, 使之加納木同宜當。 追贈之職, 與生前受職有異, 嘉善堂上以下實職帖, 降定匹數, 分給募得宜當。 至於夫人帖, 生前所受及追贈者, 竝爲酌定匹數, 使之爭先募得爲當。 如蒙允可, 則空名告身齎去文官下送時, 各項事目, 前期磨鍊, 啓稟定奪後給送。" 傳曰: "依啓。 二品、三品夫人帖, 所納太輕, 各添捧十匹似當, 更爲議啓。" 回啓曰: "空名帖磨鍊時, 臣等亦以夫人帖所納爲略小, 而夫人帖乃是從夫職分給者, 而其夫之應募納布, 爲同知、僉知者, 木匹之數, 多至二同, 少小不下一同。 當此民窮財盡之日, 富者旣急, 自其家辦出一同二同之木, 誠所未易。 況與夫人帖價木而一時辦出, 則其勢尤難, 應募者必將絶無。 故其妻之夫人帖, 則以二十匹酌定入啓, 而議者猶以爲過多。 今者池應鯤、宋敬臣、李顯忠等, 將爲分送, 招致相議, 則池應鯤等: ‘夫人帖一張, 以正木二十匹爲準, 則萬無應募之理。 無論堂上、嘉善, 無論軍功、納物、老職、正科、出身、已經實職、門蔭, 無論新授者、已授者、追贈者, 其妻夫人帖, 皆以正木十五匹爲準, 各從夫職許給, 則備納者不厭其多, 而所收之布甚多。’ 云。 臣等以此(言)商議, 則卽今事勢, 果如應鯤等所言。 應鯤等旣受此任, 則依其所言, 責以成效似當。" (從之。) 送池應鯤于慶尙道, 宋敬臣于全羅道, 李顯忠于公洪道, 稱以別將, 分管募納。 【癸丑大獄之後, 亂亡已判矣。 戊午收議之擧, 人理已絶矣。 宮闕營建之役, 民生已盡矣。 然存亡大勢, 至于池應鯤等調度使差遣之日而決矣。 應鯤等皆以賤孽, 爲人服役, 乘時助惡。 至帶使號, 剝割外方, 罔有限極, 躬括閭閻, 斗粟皆盡。 至於方伯, 畏其氣勢, 親與爲主客, 蓋蜚廉、惡來之屬云。】
- 【태백산사고본】 53책 53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325면
- 【분류】재정-잡세(雜稅)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