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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148권, 광해 12년 1월 5일 갑신 1번째기사 1620년 명 만력(萬曆) 48년

전 대사헌 정구의 졸기

전 대사헌 정구(鄭逑)가 졸하였다. 그는 성주(星州) 사람으로 한훤 선생(寒暄先生)의 외손이다. 어려서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스승으로 모셨고, 겸하여 퇴계(退溪)남명(南冥)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퇴계는 덕우(德宇)가 혼후(渾厚)하며 행실이 독실하고, 남명은 재기(才氣)가 호걸스럽고 고매(高邁)하여 우뚝 서서 홀로 행하는 어른이다." 하였는데, 그가 마음에 정한 견해가 그러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선묘조(宣廟朝)가 여러 번 불러 들이고서야 등대(登對)하고서 맨 먼저 ‘근독(謹獨)은 제왕이 다스림을 내는 근본이 된다.’고 진달하니, 선조가 칭송하기를 "그대 이름은 헛되이 얻어진 것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그는 주(州)·군(郡)을 두루 맡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지평·승지가 되었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광해군 때에는 불러들여 대사헌에 제수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옥사 때에 상차를 올려 맨 먼저 골육의 은혜를 온전히 할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아름다움을 훔치고 이름을 산다고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상의 뜻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축옥(癸丑獄)이 일어나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유치(幽置)하자, 공이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춘추(春秋)》를 인용하기를, "왕자 영부(佞夫)가 죽자 공자가 쓰기를 ‘천왕(天王)이 그 아우 영부(佞夫)를 죽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죽음이 애당초 경왕(景王)이 한 것은 아니지만 다만 금지하지 못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해 좌씨(左氏)는 ‘죄가 왕에게 있다.’ 하였고, 곡량자(穀梁子)는 심하다고 하였으며, 두예(杜預)는 ‘골육을 잔상(殘傷)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영창 대군이 어리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비단 영부가 알지 못했던 것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정의 의논이 그치질 않아 반드시 처치하고자 하고 있으니, 또한 경왕이 금하지 못한 것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봉사의 말이 수천 자나 되었는데, 말의 뜻이 명백하고 절실하여 사람들이 다 그를 위하여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그때 공의 아들 장(樟)이 서울에 있었는데, 시의(時議)가 날로 험해지는 것을 보고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 상소를 숨기고 올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또 상소하였는데 말이 더욱 절실하였으며, 전에 쓴 상소도 아울러 올렸다.

공은 본디 정인홍(鄭仁弘)과 동문수학한 처지로 서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흉염(兇焰)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그를 피해 거처를 옮겼다. 학자들은 그를 한강 선생(寒岡先生)이라고 하였다. 백매원(百梅園)을 돌보면서 행실을 편안하고 곧게 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저서가 매우 많았는데, 만년에 화재를 만나 방실(放失)되었고, 오직 《심경발휘(心經發揮)》·《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심의제도(深衣制度)》 등의 책이 세상에 행하고 있다.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찬하였는데, 늙어 병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상고와 교열을 그치지 않았다. 소시(少時)에 오덕계(吳德溪)의 소개서를 가지고 퇴계 선생을 예안(禮安)으로 찾아뵈었는데 퇴계 선생이 덕계에게 답한 편지에 "이 사람은 후대에 견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부화(浮華)하고 경솔한 하자가 있을까 우려될 뿐이다." 하였는데, 늙어서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이 병증(病證)에 대해 따끔하게 경계하신 한 말씀을 종신토록 갈고 닦았으나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사람의 타고난 병통은 변화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상(泗上)지경재(持敬齋)에서 일생을 마치니, 나이가 78세였다.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4백여 명이나 되었다. 선생이 별세하기 전 해에 가야산(伽倻山)의 북쪽 산부리가 무너졌으며, 세상을 뜨던 날에는 목가(木稼)의 이변001) 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선생이 별세할 징조라고 하였다.

계해 반정(癸亥反正) 뒤에 관리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리고 문인(門人) 이윤우(李潤雨)가 등대(登對)하여 시호를 청하자, 마침내 문목공(文穆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91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사상-유학(儒學)

  • [註 001]
    목가(木稼)의 이변 : 대신이나 현인의 죽음을 예고하는 재변을 지칭하는 말로 겨울 추위에 나무가지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 현상을 말함. 《당서(唐書)》 예종제자전(睿宗諸子傳), 《석림시화(石林詩話)》.

庚申正月初五日甲申前大司憲鄭逑卒。 , 星州人, 寒暄先生之外裔也。 少師德溪吳健, 兼遊退溪南冥之門。 嘗言: "退溪德宇渾厚, 踐履篤實; 南冥才氣豪邁, 特立獨行", 其所定見然也。 自少藏修不勌, 宣廟朝屢徵, 乃至登對, 首陳‘謹獨爲帝王出治之本’, 宣廟稱之曰: "爾名不虛得也。" 歷典州郡, 入爲持平、承旨, 觀察江原道光海時, 召拜大司憲, 臨海之獄, 上箚首陳全恩之請, 光海以爲掠美沽名。 由是忤旨還鄕。 癸丑獄起, 幽置永昌大君, 上封事, 引《春秋》"王子佞夫之死, 孔子書之曰: ‘天王殺其弟佞夫。’ 其死初不出於景王, 特莫之禁也, 而左氏則曰: ‘罪在王也。’ 穀梁子則曰: ‘甚之也。’ 杜預則曰: ‘殘骨肉也。’ 今大君稚昧無識, 則非但佞夫之不知也。 廷議不已, 必欲處置, 則又甚於景王之莫之禁也。" 凡數千言, 辭旨明切, 人皆爲之危懼。 時, , 在都下, 見時議日峻, 恐禍不測, 遂匿其疏。 又上疏, 語益切, 竝與前疏上進。 素與鄭仁弘, 同門相善, 至是畏惡兇焰, 移居避之。 學者稱爲寒岡先生。 治百梅園, 蹈履安貞, 以誘掖後學爲事。 所著書甚多, 末年遭火放失, 唯《心經發揮》《五服沿革圖》《深衣制度》等書, 行于世。 尤邃禮學, 撰《五先生禮說》, 至老病革, 猶考校不輟。 少時, 介吳德溪書, 謁退 禮安, 退溪德溪書曰: "此生後來無比, 但慮有浮率之疵耳。" 及老, 嘗語人曰: "老先生證砭一言, 終身切磋不得, 乃知人所受病處, 未易變化"云。 至是, 終于泗上持敬齋, 年七十八, 會葬者四百餘人。 前歲伽倻山北角崩卒之日, 有木稼之異, 人以爲徵焉。 癸亥反正後, 遣官賜祭, 贈吏曹判書。 因門人李潤雨登對請諡, 遂諡文穆公


  • 【태백산사고본】 52책 5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91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