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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9일 무인 6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원종 대왕 정원군의 졸기

원종 대왕(元宗大王)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한 칭호이다. 】 훙(薨)하였다. 대왕은 어려서부터 기표(奇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어 특별히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아 전후로 선물을 내려준 것이 왕자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왕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을 꺼렸다.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훙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상이 그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객을 기찰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양주(楊州) 곡촌리(谷村里)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금상(今上)037) 이 왕통(王統)을 계승하자 대원군(大院君)으로 진호(進號)하였다. 정묘년에 김포(金浦)에 개장(改葬)한 뒤 묘호(墓號)를 흥경원(興慶園)이라 하고, 임신년038) 에 존호(尊號)를 ‘원종 경덕인헌 정목장효 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라 올리고, 비(妃)는 ‘경의정정 인헌 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라 올리고, 묘호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청사 홍보(洪靌) 등을 보내어 책명(冊命)을 추청(追請)하니, 중국에서 ‘공량(恭良)’이란 시호를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149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89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註 037]
    금상(今上) : 인조(仁祖)를 말함.
  • [註 038]
    임신년 : 1632 인조 10년.

元宗大王定遠君追稱。】 薨。 大王幼有奇表, 天性友愛, 特爲宣祖所鍾愛, 前後錫賚, 他王子莫望焉。 及王在位, 戕害骨肉, 尤忌大王。 旣殺綾昌, 奪其第爲宮。 又聞仁嬪葬地大吉, 常使人窺覘, 欲構害之。 大王悲憂鬱鬱, 飮醇酎成疾。 常曰: "吾日出知去夜之無事, 日沒知今日之幸過。 惟願早終牖下, 從先王於地下耳。" 薨時年四十矣。 王促其葬期, 使人譏察弔客。 由是寓葬楊州 谷村里。 及今上承統, 進號大院君。 丁卯改葬金浦, 墓號興慶園, 壬申追上尊號曰: ‘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妃曰: ‘敬懿貞靖仁獻王后。’ 墓號章陵。 遣奏請使洪霽等, 追請冊命, 中朝賜諡恭良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149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89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