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광해군일기[중초본]145권, 광해 11년 10월 3일 임자 13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천추사 이홍주 등이 서광계·장지발 등의 주본을 입수하여 급히 올리다

천추사 이홍주(李弘胄)와 성절사 남벌(南橃) 등이 연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광계(徐光啓)장지발(張至發) 등의 주본(奏本)을 입수하여 급히 알려왔다. 그 주본에서,

"좌춘방좌찬선 겸한림원검토(左春坊左贊善兼翰林院檢討) 서광계는 〈요좌(遼左)가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하여 분개하는 마음이 격발하므로 감히 부족한 생각을 진술하여 만전을 기하고 충심을 피력하기 위하여 삼가 아룁니다.〉

삼가 보건대, 노추가 병화(兵禍)를 만들어 나라를 세우고 제멋대로 무례한 호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원(開原)을 쳐서 함락하여 장수와 병사들을 몰살하였고, 요양(遼陽)광녕(廣寧)이 누란지세처럼 위태하게 되어, 관내(關內)의 인심이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의 세력이 전날의 엄답(俺答)031) 에 비할 정도가 아니고 실로 송나라 때의 올출(兀朮)완안량(完顔亮)032) 과 같은 것입니다.

변경에서 시행해야 할 사안으로서 한 조목은, 속히 사신을 보내 조선을 감독·보호하여 외세와 연합해야 될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노추가 여러 차례 승리하고서도 깊이 침입하지 못한 것은 뒤에 북관(北關)이 있고 앞에 조선이 있기 때문인데 저들과는 목숨걸고 복수하고자 하는 원수가 아니고 우리에 대하여는 은혜를 생각하는 부류입니다. 지금 개원이 지켜지지 못하여 북관이 따로 떨어지게 되면 채찍이 말의 배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되어 반드시 오랑캐에게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또 조선은 군사들이 한번 패배하자 혼비백산하였고, 노추가 얼마 전에 패만한 글을 보내 공갈하고 도발하니,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의 형세가 실로 낭패지경이 되어 이미 고분고분한 말로 회답하였습니다. 또 이어서 포로가 된 장졸들을 억류하여 인질로 삼고 협박하기도 하고 유인하기도 하여 드디어 그들의 손아귀에 넣었고 폐백과 희생이 서로 왕래하는 등 조선과 노추의 친교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노추가 다시는 조선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마음놓고 서로(西路)로 침입한다면 어찌 손쉽게 온 요동을 집어 삼키는 데에 그치겠습니까. 천자를 향하여 반기를 들 것도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요좌가 아직 무사하다 하더라도 진강(鎭江)관전(寬奠)을 다시 잃게 되면 조선이 또 다시 동떨어진 지역이 되고 말아, 훗날 작은 나라를 합쳐 우리를 공격하게 될 때 조선이 따르려 하지 않더라도 위협하여 길을 빌리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것입니다.

더구나 노추는 조금도 친애하는 마음이 없이 포악하고 만족할 줄 모르며 남의 나라를 집어삼킵니다. 아우와 사위같은 가까운 친척도 모두 죽이고 땅을 병합하는 판에 어찌 조선이라고 봐주겠습니까. 둘 중에서 하나에 해당만 하여도 우리의 수륙 만 리가 모두 적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晉)나라초(楚)나라정(鄭)나라를 서로 빼앗으려고 한 것이 춘추 시대에 계속된 것은 정나라가 왼쪽을 내던지면 오른쪽이 막강해지고 오른쪽을 내던지면 왼쪽이 막강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에 노추가 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이미 그들의 교활한 술책이 분명하며 따라서 우리가 조선과 연합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승산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니, 천자가 대부를 시켜 방백(方伯)의 나라를 감독하였고, 한(漢)나라하서(河西)의 네 군(郡)을 개척하여 서역(西域) 방면으로 길을 열어 호강 무기 교위(護羗戊己校尉)와 도호 장사 사마(都護長史司馬)의 관직을 설치하여 그 지역의 여러 나라를 통제하에 두고 흉노의 오른팔을 끊어놓았습니다. 여기에서 감독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형세를 살핀다는 뜻이고 호위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위기를 부축해 준다는 뜻입니다. 조선의 형세가 서역과 대략 흡사하고 노추의 난폭함은 흉노보다 더 심한데 어찌 치지도외할 수 있겠습니까.

황상께서 수년 동안 침식을 거르면서 물자와 힘을 다 쏟아 저 강한 왜국의 손에서 거의 멸망한 나라를 쟁취하여 부축하여 세워주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들의 힘을 도움받지 않고 내버려서 적의 밑받침이 되게 하는 것은 매우 큰 실책이 됩니다.

경략 신 양호(楊鎬)가 그 나라에 자문을 보내 대의(大義)로 격동시키고 스스로 강건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대의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추가 강한 위력과 교활한 계략으로 회유와 위협이 백출하고 있으니 〈마땅히 밤낮으로 붙잡아 인도해야 되겠으나,〉 스스로 강건하게 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그 나라가 본래 문치(文治)에 익숙하여 나약하니 어찌 억지로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주(周)·한(漢)의 고사를 본떠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하고 또 감호(監護)하며, 때때로 중국과의 군신의 대의를 천명하고 〈또 날마다 경계시켜,〉 그들로 하여금 황상이 국명을 회복시킨 큰 은혜에 대하여 보답할 것을 잊지 않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노추가 교묘하게 합병을 도모하는 것은 그들의 전부터 품은 계략이니 거짓 맹약을 요구하는 것을 어찌 믿을 것인가.’라고 하나하나 설파해야 됩니다.

조선의 군신은 사리에 밝고 의리를 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직접 타이른다면〉 어찌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마음이 두 갈래가 없는 것을 살펴 함께 군사에 관한 계책을 논의하여 그들로 하여금 차츰 강하게 하여 전투와 수비를 할 수 있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만약 저들의 유인과 협박을 받아 속셈이 변한다면 마땅히 대의(大義)를 내세워 질책하고, 한편으로는 은밀하게 주문(奏聞)하여 방어하는 대책을 조치하는 데에 편리하게 해야 될 것입니다.

〈대다수 국경 밖에서의 군사 작전에 있어서는 미리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기 어려우며 그 대체적인 요지를 든다면 감독하고 호위하는 두 가지 일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혹시 재사(濟師)와 다른 신색(申索)을 합치는 일도 또한 마땅히 때에 따라 형세를 살펴 적당하게 참작하여 조치한다면〉 만족할 줄 모르는 노추의 흉모도 양면 공격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국경 안을 지키는 것도 수레 바퀴의 보조하는 나무처럼 서로 의지하게 해야 되니, 비유컨대 바둑을 둘 때 비록 한가한 점을 두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훈수를 받는 것이 반드시 이기는 방법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안에서 차견할 인물은 마땅히 대신에서 뽑아야 되겠지만, 다만 앞으로의 사태를 예측하기 어렵고 아울러 국가의 체면도 고려해야 되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명장(名將)을 뽑는 것과 같은 일은 곧 전투와 수비에 당장 급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신을 보내는 일의 중요한 것은 또한 오로지 무력(武力)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평범하게 말단 무관을 파견하는 것은 국가를 욕되게 하고 일을 그르칠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문신을 해국(該國)에 사신으로 보내는 것은 전부터 규례가 있었습니다. 신은 지금에 이 일을 제게 맡겨주기를 자청합니다. 요동의 사태가 급박하기 때문에 사졸을 많이 차출할 필요가 없고 단지 군량 보급에 대하여 논의하여 정해야 됩니다. 신에게 직접 참모를 선택하게 하고 의종(義從) 2백여 명 가운데서 재능이 뛰어난 교사(敎師)를 대동하여 사태의 추이에 따라 이용하게 하소서.

저는 본래 문학을 닦은 유생으로서 군려에 대한 일은 익히지 못하였으니 봉서선연(封胥禪衍)의 공(功)을 어찌 감히 갑자기 스스로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옛날에 훌륭한 사신이 외국에 나가 국가의 신의에 대한 말을 전하고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던 일 정도는 신이 민첩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병가(兵家)의 특수한 방법이며, 사태는 반초(班超)가 감당한 일033) 과 같다 하더라도 형세가 당시의 강한 한(漢)나라와 동등하지 못하니 기회를 암중모색하고 방법을 은밀하게 해야 되겠습니다.

국경을 나가는 날은 몸이 양떼 속에 들어가나 실제는 범의 입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안위(安危)가 순간에 달려 있으니 마땅히 임기응변의 방법을 써야 됩니다. 또 상황이 수없이 바뀌니 일정한 규율에 구애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만약 성명을 받아 특별히 파견된다면 명을 받고 떠난 이후로도 어느 정도 편의를 돌봐주어 일을 잘 성공시킬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성상의 재가를 바랍니다.〉"

하였고, 운남도(雲南道) 어사(御史) 장지발(張至發)이 올린 글에서는,

"〈요동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져서 국내의 일도 실로 치밀하게 대비해야 되겠기에, 삼가 방어책에 관한 한두 가지 의견을 아뢰니, 성명께서 속히 윤허하여 변방의 일을 공고하게 하고 의외의 사태를 막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군사가 세 방면에서 패전하고부터 3개월이 지나는 동안 많은 신하들이 〈매일 오랑캐의 침략을 경계하며〉 경략(經略)과 사열(査閱)과 모병(募兵)을 시행하도록 요청하였으나 황상께서 전혀 못 들은 듯이 치지도외하고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개원(開原)이 다시 함락된 뒤에 이르러서야 경략 웅정필(熊廷弼)이 올린 글이 처음으로 윤허를 받았습니다.

정필은 용맹과 계략이 본래 뛰어나 참으로 동방의 일을 처리할 만하지만, 존망(存亡)의 위급한 상황에 임박하여 참으로 눈이 있으나 깜박이지 못하고 발꿈치가 있으나 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특이한 계책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황상께서 위태로운 요동에 특별히 마음을 써서 안타깝게 여기고 조정의 신하들이 아뢰면 반드시 따르고 호소하면 반드시 응답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위태함을 반전시켜 평안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화전(文華殿)에 거둥하여 자신을 탓하는 조서를 내리고 각신(閣臣)으로 뽑은 사람을 가지고 상고하여 선발할 태성(台省)에 내리도록 윤허하고 궁내에 쌓여 있는 재물을 출급하여 위태한 시국을 돕고 사태를 극복할 수 있게 하도록 하는 일을 청하였으나 전혀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개원(開原)이 함락되고 나면 북관(北關)에서 원조할 길이 단절되고 철령(鐵嶺)과 심양(瀋陽)의 형세가 고립되면 요양(遼陽)이 더욱 위급하게 됩니다. 더구나 서쪽 오랑캐가 서로 다투어 세력을 연합하여 침략하여 삼분하(三坌河)의 요새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광녕은 완전한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요동이 적의 수중으로 가면 산해(山海)가 위험하게 되고 산해가 위험하게 되면 신경(神京)이 동요하게 될텐데, 그 상황에 이르러 천하의 일을 이루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가장 훌륭한 계책은 먼저 산해관(山海關)을 막아 통로를 굳게 차단하는 것입니다. 전에 요동 지방이 평온할 때에는 산해관이 신경의 울타리가 되었으니 지금 요동이 누란지세처럼 위태한 지경이 된 상황에서는 산해관이 가장 긴요한 관문이 됩니다. 따라서 정예한 군사 1만 명을 주둔시켜 한 명의 대장이 지휘하여 진압하게 한다면 어느 정도 군사의 위세도 웅장하고 노추가 멀리까지 침략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통주(通州)를 수비하여 내지(內地)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통주와 서울은 이와 입술과 같이 상호 의존의 관계에 있는데, 〈신이 전에 서울의 군사를 통주에 예속시켜 훈련하는 의식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해부(該部)가 총병(總兵) 이회신(李懷信)을 등용하자는 논의를 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매우 훌륭한 인물을 얻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에 계주(薊州)의 군영에 장수가 결원이 생겨 다시 그곳에 임용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통주는 특별히 노숙한 장수 한 명을 뽑고 그에게 서울의 군사 1만 명을 뽑아 주어 통주에서 훈련시키게 하여 군사들의 기개를 진작시킨다면 경사(京師)의 위급한 상황에 대한 대비책은 물론 계주의 유사시에도 충분히 성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천진(天津)을 방어하여 조운(漕運)의 통로를 안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진은 조운을 함에 있어서 사람의 목구멍과 같아 천진이 막히는 것은 사람의 목구멍이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방면에 이미 진영 유격(津營遊擊) 한 명을 두었으니, 마땅히 그 군사가 얼마인지를 조사하여 수군 2천 명을 증원하되, 지혜와 용맹이 있고 날랜 자를 선발하여 자격을 논하지 말고 방비를 전임하는 천총(千總)·파총(把總)의 직책을 주어 수군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고 또 유격의 지휘를 받게 한다면, 수로나 육로 모두 어느 정도 완전하게 되어 조운하는 길이 걱정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 노추가 새로이 조선을 위협하여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는데 조선의 군신들이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보전하기에 바쁘니 그들이 앞으로 겉으로는 태연한 체하면서 몰래 영합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몰래 영합하는 날엔 적의 배가 남쪽까지 이르러 계속 전진하여 등주(登州)와 내주(萊州)까지 엿보게 되고 더 깊이 들어가 서주(徐州)·연주(兗州)를 엿보게 될 것입니다. 또 산동(山東)과 회남(淮南)에서 강물을 따라 남하하여 조운하는 길이 막히게 되면 경사는 꼼짝없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속히 도신(道臣) 한 명을 더 늘려 수군 중에서 바람과 물결의 형세를 잘 아는 자와 배를 조종하는 데에 뛰어난 자 1천 명을 선발하게 하고, 또 절강(浙江)과 민강(閩江)의 수군 수천 명을 모집하여 수전(水戰)에 능한 남쪽의 장수를 뽑아서 통솔하게 하고, 도신으로 하여금 오로지 훈련을 감독하게 한다면, 어느 정도 적의 배가 남쪽을 엿보지 못하게 되고 해양에 위급한 일이 생기지 않아 신경(神京)이 저절로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지금 서광계 자신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임명해 주기를 스스로 천거한 내용의 상소문 등본을 천추사가 먼저 보내온 것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분통스럽고 기가 막혀 곧장 바다를 달리고 땅을 뚫고 가서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으나 할 길이 없었다.

우리 나라와 저 노추가 과연 서광계의 상소문에서 꾸며댄 것과 같은 점이 있는가? 이 사람이 모함한 정도는 정응태(丁應泰)가 한 것보다 더 참혹하다. 선왕께서는 응태의 변고를 당하여서도 정사를 살피지 않은 채 깊이 우려하고 고민하였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이 일찍이 천고에 없던 큰 변고를 당한 처지이니 그 통분하고 민망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서광계가 한 말은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이니 만약 속히 처리하지 않을 경우 광계가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다시 광계와 같은 자가 있게 될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리를 가지고 말하면, 선조(先朝)에서 이항복(李恒福)이 들어갔던 사례에 따라 대신이 속히 달려가서 황제의 뜰에서 호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대신이 모두 늙고 병이 있어 형편상 가기가 어려우니 다른 사신을 십분 잘 선발하여 들여보내 엉터리 모함을 단호히 변명하도록 하는 일을 당일 내로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니,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서광계의 상소문에서 우리 나라와 노추가 우호 관계를 맺었다고 한 말을 〈종이에 장황하게 늘어놓았는데,〉 한 번은 ‘공손한 말로 회답하였다.’ 하고, 한 번은 ‘드디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고, 한 번은 ‘폐백을 서로 주고받았다.’ 하고, 한 번은 ‘이 상황을 내버려두어 적이 조선을 취하여 밑천으로 삼게 하면…’이라 하였으며, 심지어는 감호(監護)라는 두 글자로 나올 사신의 명칭까지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하기를 ‘조선의 태도가 변하면 마땅히 대의(大義)를 거론하여 책망하는 한편 비밀리에 상주(上奏)하여 대책을 세우는 데에 편리하게 하겠다.’ 하였습니다. 이는 지난번 호인의 서찰이 왕복한 것이 요동광녕 지방에서 유언비어로 나돌았기 때문이며, 경략이 김치(金緻)이병(李覮) 등에게 질문한 내용도 바로 이 유언비어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서광계의 모함도 역시 이것을 인하여 나오게 된 것인데, 허다한 말이 매우 음험, 참혹하고 근거없는 말과 망측한 계략이 문자간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 조금도 꺼리거나 아랑곳하는 바가 없으니, 그는 이미 조선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에 신 등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지극히 분통스러움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 패전한 이후로 두 장수가 항복하여 적의 수중에 있으면서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면서 저 적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편지를 보내게 하고 중국에 이간질을 행하도록 조종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차츰 전파되어 의심이 의심을 낳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통보(通報)와 전후의 사신의 장계를 보건대,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를 의심하는 것은 서광계 한 사람의 사례만이 아닙니다. 구경(九卿)이 회의하여 황상에게 올린 글에서도 그 뜻이 똑같았으니 어찌 크게 두려워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에 사신을 차견하여 전말을 아뢰고 철저하게 해명하지 않을 경우 의심과 모함이 반복되어 결국 황상이 사실로 믿게 될 일이 절대로 없으리란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앞으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화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진주사(陳奏使)를 속히 차임하고 승문원으로 하여금 속히 주문(奏文)을 마련하게 하여 치계토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모든 일은 기회가 있으며 기회를 잃으면 만사가 모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더구나 모함을 해명해야 될 이 일은 더 중요하다. 문서를 마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사신을 차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시국에 어찌 평상적인 규례에 구애되겠는가.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비록 죄가 있다고는 하지만 2년 동안 녹봉을 감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징계되었다. 또 임진란이 일어났던 초기에 선왕께서 정철(鄭澈)·정언지(鄭彦智)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에게 체찰사의 직책까지 제수하기에 이르렀는데, 하물며 단지 논계에 그친 인물의 경우이겠는가. 지금 무함을 변명하는 데에는 국가 최고의 문필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고, 이정귀는 선조에서도 무함에 대한 변명을 잘 하였으니, 그를 상사(上使)로 차임하고 부사로는 윤휘(尹暉)를 차송하라. 윤휘는 지략이 있어 그 일에 적합하다. 서장관은 삼사에 출입한 경력이 있고 지략이 있는 인물을 엄선하여 차임하라. 이들을 이달 그믐께나 내달 초승에 더 지연시키지 말고 출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 때에, 이정귀가 폐모에 대한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양사가 먼 지역으로 유배시키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도성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복귀시켜 사신으로 파견하게 된 것이다. 】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7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註 031]
    엄답(俺答) : 명대(明代) 달단(韃靼)의 추장. 가정 연간에 많은 군사를 가지고 중국을 침략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하였다. 《명사(明史)》 권327 별전(別傳) 달단(韃靼).
  • [註 032]
    완안량(完顔亮) : 올출은 금(金) 태조의 네째 아들 완안종필(完顔宗弼). 완안량은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 모두 강력한 군사력으로 송나라와 잦은 싸움을 벌인 인물들이다. 《금사(金史)》 권77.
  • [註 033]
    반초(班超)가 감당한 일 : 반초는 후한 명제(明帝) 때의 명장. 31년 동안 서역에 머물면서 후한을 배반한 구자(龜玆)·고묵(姑墨) 등 50여 국을 평정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열전(列傳) 권37.

○千秋使李弘冑、聖節使(南撥)[南橃] 等在燕京, 以徐光啓張至發等奏本馳聞。 其奏曰:左春坊左贊善兼翰林院檢討徐光啓, (謹奏爲左阽危已甚, 職心感憤益切, 敢陳愚慮, 以圖萬全, 以攄忠悃事。) 伏見逆稔禍, 建國僭號。 攻陷開原, 將士覆沒, 遼陽廣寧, 岌岌不保, 關內人心, 惶惶靡措。 此其勢, 非昔年之俺答, 實宋朝兀朮完顔亮也。 因條邊上事宜, 其內一款 一, 亟遣使臣, 監護朝鮮, 以聯外勢事也。 臣竊惟逆累勝, 未遂深入, 後有北關, 前有朝鮮, 非彼貿首之讐, 則我懷恩之屬也。 今開原不守, 北關隔絶, 鞭長不及馬腹, 必且入于朝鮮則師徒喪敗, 魄悸魂搖, 昨傳謾書, 恐喝挑激, 之君臣, 事勢狼狽, 旣爲遜辭復之。 繼以敗將俘軍, 羈留爲質, 且怵且誘, 遂入牢籠, 贄幣餼牽, 交酬還往, 之交已合, 當然無復東方之慮矣。 從此安心西路, 奚止唾手全? 射天逆圖, 殊未可量。 卽使左尙存, 而鎭江寬奠, 再一有失, 朝鮮又爲異域, 後來合小攻大, 鮮或不從, 脅求假道, 易于反掌。 況之狼戾無親, 鯨呑莫厭。 弟壻至親, 皆殺而倂之, 何有哉? 二者居一焉, 卽我水陸萬里, 皆爲寇場矣。 , 終春秋之世者, 爲其左投右重, 右投左重也。 今結好朝鮮, 旣是之狡謀, 則聯屬朝鮮, 卽爲我之勝算。 臣考古制, 天子使大夫, 監方伯之國, 河西四郡, 通西域, 置護羌戊己校尉、都護長史司馬, 以控制諸國, 斷匈奴右臂。 監者察其情形, 護者扶其顚危也。 朝鮮形勢, 略似西域, 寇氛之惡, 亟於匈奴, 安可置之度外乎? 皇上數年宵旰, 殫財竭力, 爭滅國于强之手, 挈而與之, 今者不賴其用, 而棄以資敵, 失策之甚者也。 經楊鎬, 咨行該國, 激以大義, 勉以自强是矣, 大義彼所熟諳, 其强威狡計, 誘脅百出, (宜須日夕提撕,) 至於自强之策, 則該國素習文弱, 豈能强勉? 臣之愚計, 謂宜倣古事, 遣使宣諭, 因以監護, 其國時與闡明華夏君臣, 天經地義, 加以日逐警醒, 使念皇上復國洪恩, 無忘報答。 再與點破奴賊之巧圖惡倂, 是其故智, 要盟僞約, 豈足依憑? 之君臣, 明理蹈義, (如此面命耳提,)感動奮發? 察彼心神無二, 就與商略戎機, 令其漸强, 可戰可守。 若被誘脅, 情形變動, 便當責以大義, 一面密切奏聞, 以便措置防範。 (大都出疆機事, 難可豫擬, 摠其大指, 不出監、護二端。 儻合濟師及他申索, 亦宜隨時度勢, 斟酌聽許如此,) 卽狂謀無厭, 可以掎角成功。 若暫守封疆, 亦是輔車相依, 譬之奕碁, 雖布閑着, 實得外執, 必勝之術也。 此項差遣, 宜用大臣, 但恐事機難料, 仍須回顧國體。 若選取名將, 乃是戰守急需。 使事所重, 又非全在武力, 泛遣弁流冗職, 秪以辱國僨事而已。 竊考詞臣, 奉使該國, 自有成規。 臣今自薦, 願當此任。 事急切, 不必多抽士衆, 只須議定餉給。 聽臣選擇參佐義從二百餘人中, 帶巧工敎師, 以便相機應用。 臣本文儒, 未習軍旅, 封胥禪衍之功, 何敢遽爾自許? 至於古之良使, 傳其信辭, 士之有恥, 不辱君命, 臣雖不敏, 竊有庶幾之心。 但此擧, 兵家奇道, 雖事等班超, 而勢非强, 機潛深, 法應祕密。 出疆之日, 身入羊群, 實垂虎口, 安危呼吸, 宜資權變。 事情遷貿, 難拘一律。 如蒙聖命, 特遣受命以後, 仍望稍假便宜, 以求克濟。 (伏乞聖裁。) 雲南道御史張至發一本, "(爲勢已迫, 內固宜周, 謹陳一二防禦末議, 懇乞聖明, 亟賜允行, 以固藩籬, 以杜意外事。) 竊自我師, 三路喪衂, 三月以來, 諸臣(無日不氛是儆), 請經略、請閱視、請募兵, 皇上皆漠然置不報。 直至開原再陷而後, 經略熊廷弼之旨, 始得一兪。 廷弼壯猷素裕, 固足經略東隅, 然迫之于危急存亡之際, 眞有目不及瞬, 踵不及旋者, 卽有奇安施? 所恃者, 皇上軫危, 而惻然動念, 在廷諸臣, 有叩必從, 有呼必應, 幾轉危爲安之一機耳。 乃今請 文華殿, 冀罪已詔之下, 允枚卜之閣臣, 下考選之台省, 發塵積之內帑, 于以贊佐機宜, 劻勷時事, 又漠然置不報矣。 夫開原旣陷, 則北關援絶, 勢孤, 則遼陽益急。 矧西虜交訌, 合勢長驅, 三坌河之險, 賊得以有之, 廣寧無完壁矣。 全去而山海危, 山海危而神京震, 天下事, 尙可言乎? 爲今之計, 首防山海, 以嚴門戶。 向者, 全無恙, 山海神京, 爲藩籬, 今且累卵, 則山海爲緊要之門戶矣。 宜宿重兵一萬, 一大將提而鎭之, 庶兵聲赫奕, 而不敢長驅也。 次守通州, 以重堂奧。 與京, 爲唇齒, (職向有京兵隷訓鍊之議儀)頃者該部議調總兵李懷信, 甚爲得人。 今以鎭缺將, 復調之鎭矣, 則通州當另擇宿將一員, 揀發京軍一萬, 令在訓練, 以張神氣, 無論京師緩急, 足爲戎備, 卽門緩急, 亦可以壯聲援矣。 又次防天津, 以固運道。 天津爲漕運咽喉, 天津梗則咽喉塞。 該路已設有津營遊擊一員, 謂宜査其額兵若干再益, 以水兵二千, 選有智勇驍雄之人, 無論資格, 授以隄備千把之任, 令分統水兵, 以聽遊擊之指揮, 庶水陸兼備而運道無虞也。 但今奴酋, 又脅結朝鮮, 朝鮮君臣惴惴自保, 能必其不陽衡而陰順乎? 陰順, 則舲舸南至, 進而窺, 深而窺。 山之東、之南, 皆順流而下, 運道阻, 則京師有坐困耳。 亟宜添設道臣一員, 再選募海兵之善識風勢、水勢及工于舟舵者千名, 更調募水兵數千名, 擇南將之善水戰者統領, 而以道臣專督操練, 庶賊舟不得南窺, 而海洋無警, 神京 坐奠矣。" 傳曰: "今見千秋使先來, 齎來徐光啓自薦出來上疏謄本, 不覺骨痛氣塞, 直欲蹈海鑽地而末由也。 我國與此賊, 其果有如光啓疏中所搆之辭乎? 此人誣陷之慘, 甚於丁應泰 之變也。 先王遭應泰之變, 尙不視事, 憂悶痛迫, 況此千古所無之大變乎? 其爲痛悶如何? 如何 光啓 出來云云之說, 自有東方以來, 曾所未聞, 若不急急處置, 則光啓雖曰不來, 又安知復有如光啓者乎? 以事理言之, 則依先朝李恒福入往例, 大臣所當疾馳赴訴於帝庭。 但今之大臣, 皆老病, 勢難往矣, 他使臣十分擇差, 急急入送, 快辨厚誣事, 當日內速爲議處之意言于。" 備邊司回啓曰: "臣等 徐光啓疏辭, 以我國與奴賊, 結好爲言者, 滿紙張皇而, 一則曰‘遜辭復之’, 一則曰‘遂入牢籠’, 一則曰‘贄幣交酬’, 一則曰‘棄以資敵’, 至以監、護二字, 顯作出使之名號。 乃曰: ‘情形變動, 便當責以大義, 密切奏聞, 以便措置防範。’ 云。 此由前日書之往復, 致有之流言, 而熊經略問及於金緻李覮 等之行者, 無非流言之所中, 則光啓之謀, 亦必因此而發, 許多辭說, 極其陰慘, 無形之言、罔測之計, 形諸文字, 略無顧忌, 其心已無我朝鮮矣。 臣等不忍正視, 極切痛惋之至。 一自喪師之後, 兩帥降在賊中, 尙保兇喘, 致令伊賊執而致書於我國, 行間於中朝, 轉輾流播, 疑以傳疑, 以至此耳。 近觀通報及前後使臣狀啓, 中朝之疑我, 不獨一光啓而已。 九卿會議覆題之辭, 其意亦同, 豈不大可懼哉? 不於此時, 專差具奏, 籲呼痛辨, 則市虎投杼之患, 難保其必無, 而他日無窮之禍, 將不可勝言矣。 陳奏使亟令該曹急速擇差, 奏文令承文院急急磨鍊馳啓宜當, 敢啓。" 答曰: "依啓。 凡事皆有事機, 一失事機, 則萬事皆不得順成矣。 況此辨誣之擧乎? 文書磨鍊非難, 而使臣差出不易, 此時何可拘常規乎? 廷請不參, 雖曰有罪, 二年減祿, 亦足懲矣。 壬辰亂初, 先王命放鄭澈鄭彦智等被謫人, 至授體察之任, 況只論啓之人乎? 今此辨誣, 必須擇用華國手段, 李廷龜, 先朝亦嘗善爲辨誣, 以此差上使, 而副使則以尹暉差送。 尹暉有計慮, 可合矣。 書狀官則極擇三司出入有計慮人差下。 今月晦來月初生, 勿退發送。" 【時, 廷龜不參廢母廷請, 兩司請遠竄, 待命國門之外, 起廢以遣。】


  • 【태백산사고본】 51책 51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7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