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관 원현룡이 조정에 편지를 보내다
차관 원현룡(袁見龍)이 조정(趙挺)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삼가 황제의 칙서와 하사품을 내려 죽은 자를 조문하고 부상자를 위로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고 군사들을 후하게 보살피는 조치를 취하기 위한 것일 뿐이며 특별히 간섭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고 귀국과 중국은 부자 관계와 같은데 아버지가 마음을 숨기고서 자식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솔직히 말하고 숨기지 않는 이유입니다.
노추는 2백여 년 동안 우리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고 용호 장군(龍虎將軍)이란 직함을 받아 부귀가 극도에 이르렀는데, 하루 아침에 불측한 꾀를 부렸습니다. 그가 오래 전부터 딴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을 변장이 발각하지 못하여 결국 범을 길러 장래의 우환을 끼치는 꼴이 되었고 지금에 그 화가 사정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그가 무순(撫順)을 격파하고 청하(淸河)를 함락시켜 우리 장 총병(張總兵)의 군사가 전멸당하였고, 금년에는 우리가 또 다시 네 방면에서 진격하였다가 네 곳의 모든 군사들을 잃고 말았는데, 이것이 어찌 우리 당당한 중국의 힘이 대등하지 못한 것이었겠습니까. 사실 장졸들의 지략이 좋지 못하고 〈논의가 경솔하였기〉 때문입니다. 〈금년 봄의 경우〉 국왕께서 1만여 명의 굳센 군사를 동원하고 수만 섬의 군량을 소비하였는데 이는 충성과 의리를 가진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두 장수가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사졸들도 거의 다 전몰하였으므로 우리 황제께서 마음 아프게 여겨 특별히 만금을 주어 조문하게 된 것입니다.
어제 국왕의 접견을 받았는데, 그때에 국왕께서 먼저 ‘노추에 대한 원한은 우매한 백성들도 기필코 보복하려 하고 있다.’ 하였고, 또 관전의 전투에 나갔던 군사들로서 도망하여 돌아온 자들이 매우 많은데 죽을 자는 죽고 살 자는 살더라도 기필코 원수를 갚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해를 두고 맹세하고 귀신도 울릴 만하며, 황제와 문무 백관들이 다 국왕의 성대한 뜻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두 황조(皇祖)의 영혼도 똑똑히 내려다 볼 것이기에 저희 두 사람도 마땅히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를 표할 일이었습니다. 다만 지금 개원(開原)에서 한 번 패한 여파로 요동에까지 우환이 절박하게 미치고 있고 철령(鐵嶺)과 심양(瀋陽)은 이미 누란(累卵)의 형세처럼 위급한데, 관서(關西)의 군사를 징집하는 일이 수월하지 못하고 강변의 성보(城堡)도 수비가 미약합니다. 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이 갔을 때 원도(院道)가 반복 경계하며, 기필코 귀국의 조총수 수천 명을 얻어 요동을 지키고 사천의 군사를 모두 철령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저희가 갔을 때에 그 말에 수긍하였고, 원도도 ‘조선 국왕은 참으로 사리와 형편을 알고 위급을 구원할 분이니, 말만 하면 절대로 핑계대고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연회하는 날 국왕의 어조를 보니 그다지 분개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저희가 오늘 비통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게 된 것입니다.
대개 노추의 땅은 매우 좁아서 귀국의 도(道) 하나도 당하지 못합니다. 지금에 저들이 조금 강해졌다 하더라도 귀국의 4개 도만 가지고서 대응하더라도 충분히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귀국이 총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또한 잘못된 말입니다. 귀국의 총이 세상에 이름이 난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실로 왜인의 조총에서 받은 것입니다.〉 어제 의주(義州)·안주(安州) 두 곳에 도착하여 보니 총수(銃手)가 5, 6백 명 정도이고 모두 정예하였는데, 나중에 황주(黃州)와 평양에 도착하여 보니 모두 강하면서도 약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다시는 진용을 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총수가 정말로 없는 것입니까.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의 뜻일 것입니다.
대개 요동과 귀국은 서로 우의가 깊고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요동과 귀국의 관계는 비유컨대, 요동은 귀국의 배와 같은데 강을 건너려면 꼭 배를 타야 하듯이 중국과 결합하려면 요동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동이 없으면 귀국은 중국과 사이가 단절되어 결합할 수 없는데, 귀국에서 흙으로 압록강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노추가 요양(遼陽)을 함락시키고 산해관(山海關)을 막은 다음 동쪽으로 향하여 의주로 밀고 내려온다면 귀국은 안전하게 지낼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노추는 이영방(李永芳)과 동양성(佟養性) 형제를 손아귀에 넣은 후로 더욱 갖은 간사한 술책을 다 쓰고 있는데, 혹은 이간하는 계략을 꾸며 국왕의 마음을 의혹시키기도 하고 혹은 제멋대로 요사스런 말을 퍼뜨려 백성들에게 의구심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웅 노야(熊老爺)가 새로 부임하였으니 한번 전투를 치르게 되면 노추의 운명이 점차 쇠약해지고 기세가 멀지 않은 날에 목이 베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국왕께서 기꺼이 군사 1천 명을 징발한다면 훗날 2만 명을 징발하는 값어치를 할 것이고 지금에 3천 명을 징발한다면 뒷날 6만 명을 징발하는 값어치를 할 것입니다. 방어 준비가 차츰 갖추어지고 군사와 병마를 동원하여 대군이 진격하는 날에 이르면 국왕께 얼마간의 군사와 말을 청하여 사천(泗川)의 군사들과 협력하여 한 방면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대개 사천의 군사와 조선의 군사는 의기가 서로 투합하기 때문에 모순될 걱정은 없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올 때에는 아침에 칙서와 상금을 전하고 저녁이면 작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 어찌 이처럼 군사를 청하는 일이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때문에 며칠 더 지체하게 되었는데 국왕께서 요동의 위급한 사정과 요동과 귀국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우의를 생각하고 총수 수천 명을 속히 징발하여 저희 두 사람과 함께 떠나게 하여 요동을 보존할 수 있게 한다면, 사신으로 온 저희들에게 주는 은택은 하루에 일백 번의 연회를 베풀고 온갖 예물을 주는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저희가 만약 그러한 배려를 받지 못한다면 비록 예천(醴泉)의 샘물로 몸을 씻고 황금집에서 잠자더라도 현실의 일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하찮은 몸으로서 충심에 의하여 우직하게 말씀드리는 바이니 밝게 헤아리소서."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10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53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
○差官袁見龍抵趙挺書曰:不佞此來, 敬爲齎皇勅、欽賜, 以爲弔死、問傷之資, 優恤戰兵之擧, 不宜別有所干。 然事勢危急存亡之秋, 貴國之於 天朝, 猶父子也, 父之情可隱而不告於子乎? 此二不佞之所以直陳而不諱也。 奴酋二百餘年, 受我國家豢養厚恩, 授以龍虎將軍, 富貴極矣, 一朝爲謀叵測。 久畜異志, 邊將不加覺察, 養虎貽患, 致禍滋蔓。 去年破撫順、克淸河, 張總爺全師陷沒, 今年又四路進兵, 連喪四帥, 夫以我堂堂天朝, 豈勢力之不均? 良由人謀之不臧耳, (而議之輕耳。 如今春)國王動萬餘之健卒, 糜數萬之糧餉, 非有精忠大義者不能。 兩帥之被擄未還, 士卒之殘創幾盡, 是以(我)聖心惻然, (而)特齎萬金, 以弔問也。 昨承國王枉顧, 一曰: "奴酋之仇, 卽愚夫愚婦, 亦必報復。" 一曰: "寬奠之師, 逃回者甚衆, 死者死, 活者活, 志必復仇。" 此言可矢天日, 可泣鬼神, 不啻皇上及文武臣工, 皆感謝國王之盛意, 卽二皇祖在天之靈, 實卽臨之, 二不佞所尙 當感激, 叩頭而稱謝也。 獨今遼在 東 , 自開原一失, 患切剝膚, 鐵嶺、瀋陽, 危如累卵, 關西之兵馬, 調集未齊, 沿邊之城堡, 守備單弱。 是以二不佞行時, 院道諄諄告戒, 必求得貴國鳥鎗手數千, 保守遼陽 , 將川兵馬, 盡發鐵嶺。 此是到底一着, 不佞行時, 亦頗唯唯, 院道云: "朝鮮國王誠知理勢, 而濟困扶危者, 第言之, 必不見諉。" 昨于宴日, 見國王口吻, 不多慨然, 是以今日抱痛而長臥也。 夫奴酋彈丸之地, 不當貴國一道。 卽謂稍强, 以四道處之, 綽有餘力。 若謂貴國不慣于銃, 又謬矣。 夫貴國之銃, 鳴于天下, (孰不知之? 實爲倭銃之賜。) 昨至義州至安州兩處, 銃手不下五六百, 皆極精而極銳(者), 後至黃州、平壤, 皆以强而示弱, 不復陳設, 則銃手豈眞無哉? 所言者謙也。 夫遼與貴國, 誼切唇齒, 不待智者而後辨也。 遼之於貴國, 則貴國之舟也, 欲渡江, 必假舟楫, 欲合天朝, 必假遼東。 無遼左, 則貴國與天朝, 間而不能合矣, 貴國可以泥丸塞鴨綠乎? 萬一奴拔遼, 而塞山海而東向義州, 則貴國未可安枕而臥也。 況奴酋自收李永芳、佟養性 弟兄以來, 變詐百出, 或設間謀, 以疑國王之心, 肆妖言以疑國人之聽。 目今熊老爺到任, 又是一番旗皷, 逆知奴運漸衰、奴氣漸頓, 不久當授首就戮。 國王今肯發兵一千, 可當後日二萬, 肯發三千, 當後日六萬。 至守備漸完, 人馬調集, 大兵進勦之日, 仍請國王發兵馬若干, 合川兵同進一路。 夫川兵之與麗兵, 意氣頗投, 可無矛盾之患也。 二不佞之來, 可以朝交勅賞而夕告別, 奈有此請兵事? 是以稍羈數日, 國王肯念遼左之危、唇齒之誼, 急發銃手數千, 同二不佞行, 以保遼城, 則所以賜使臣者, 勝日百宴而日百禮。 若不蒙垂念, 卽沃之醴泉, 寢之金穴, 亦何益于事哉? 不佞犬馬, 赤衷愚直若此, 幸垂鑑。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10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53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