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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138권, 광해 11년 3월 12일 을미 1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평안 감사가 중국군과 조선군이 심하에서 패배했다고 치계하다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심하(深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回軍)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부차(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 나라의 오랑캐말 역관인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 ‘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교 유격이 아군에게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강화를 맺으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태도가 달라져 작은 쪽지에다 글을 써서 자신의 가정(家丁)에게 주면서 요동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고는 즉시 활시위로 목을 매었는데, 우리 나라의 장수가 구해내자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홍립 등이 중국 군사를 다 찾아내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적은 그들을 마구 때려서 죽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홍립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경서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오랑캐 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는데, 적은 홍립경서로 하여금 삼군(三軍)을 타일러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백(白)씨 성을 가진 호남(湖南)의 무사가 이민환(李民寏)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항복할 뜻을 이미 정했다면 공은 막부의 계책에 참여했었으면서 어찌하여 군막으로 나아가 대의로써 꾸짖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두 원수를 목베어 삼군을 격려하여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노추에게 무릎을 꿇어 천하 만세의 욕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지만, 민환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부하 장수 이일원(李一元)·안여눌(安汝訥)·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께 제각기 거느린 군졸과 말을 인솔하여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은 채로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항복했는데, 적은 홍립경서와 장수들로 하여금 군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고 적병으로 둘러싼 채로 노추(奴酋)의 목책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추홍립경서만 목책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밖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성밖에 두고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싸움에 개철 총병(開鐵摠兵) 두송(杜松)이 공을 탐내어 경솔히 전진하는 바람에 전군이 패몰함으로써 적병이 동쪽 방면에 전념하게 되어 끝내는 사방의 군대가 모두 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후 오랑캐에게 잡혔던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달아나 동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굶주림으로 골짜기에서 뒹굴거나 오랑캐에게 잡혀 거의 다 죽고 돌아온 자는 겨우 수천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7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1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

    己未三月十二日乙未平安監司馳啓: "天朝大兵及我三營兵, 以初四日敗績於深河。 時遊擊喬一琦, 領兵前行, 都督居中, 我國左右營繼進, 元帥領中營在後。 賊旣敗, ·撫順兩路兵, 回軍東出, 先鋒設伏於山谷, 喬遊擊 先行卒遇 伏於富車地方, 一軍敗沒, 僅以身免。 都督見前軍不利, 督兵進薄, 賊大兵奄至, 彌滿山野, 鐵騎隳突, 勢莫敢敵。 蹂躙廝殺, 一軍就盡, 都督 以下將官坐於火藥包上, 放火自殺。 我國左營將金應河繼進, 布陳于野次, 設拒馬木, 兵纔數千。 賊乘勝薄之, 應河令火砲齊放, 賊騎中丸死者甚多。 再進再退, 忽西北風大起, 塵沙晦冥, 藥飛火滅, 砲無所施。 賊以鐵騎蹙之, 左營兵遂敗, 死亡殆盡。 應河大樹, 以三大弓迭射, 應弦穿札, 死者甚衆。 賊不敢逼, 乃從後剌之, 鐵搶洞胸, 猶執弓不釋, 虜人亦皆嘆惜, 相謂曰: ‘若有如此數人, 實難抵當。’ 稱之曰‘依柳將’。 右營兵未及陣, 俱被殲滅, 元帥將中營, 登山據險, 形孤勢弱, 士卒不食, 已兩日。 賊悉衆合圍, 士卒知必死, 憤慨欲戰, 賊乃招我國河瑞國, 語以通和解兵之意。 金景瑞先往虜營, 結約賊將而還, 景瑞 又要弘立俱盟。 天朝敗兵數百, 屯據原阜, 賊呼我軍中曰: ‘漢人之在爾軍者, 悉出之。’ 又呼曰: ‘人之在陣者, 皆歸之。’ 時喬遊擊來投我軍, 以爲庇身之所, 見我國與 連和情態卽異, 書小紙, 付其家丁, 以傳其子之在遼東者, 卽以弓弦繫項, 我國將官救之, 乃挺身墮崖而死。 弘立等盡搜天兵, 送于虜陣, 賊縱擊盡之。 翌朝, 弘立着便服, 景瑞脫盔甲, (豎旗下,) 詣虜陣, 賊乃令弘立景瑞, 曉諭三軍, 解甲來降。 湖南武士白姓人, 言于李民寏曰: ‘元帥降意已定, 公旣參幕籌, 何不卽帳下責以大義? 斬兩元帥, 激勵三軍, 一戰而死, 不猶愈於屈膝 庭爲天下萬世戮耶? 民寏不從。 遂與部下諸將李一元安汝訥文希聖朴蘭英鄭應井金元福 吳信男 等, 各率所領兵馬, 投戈釋甲, 詣虜陣降, 賊令弘立景瑞諸將官率兵先行, 賊兵擁入寨。 奴酋只令弘立景瑞入寨中, 其餘將領軍兵, 皆置城外, 監守是役也。" 摠兵 貪功輕進, 全軍敗沒, 以致賊兵之專意東路, 終致四路。 其後將士之陷虜者, 率多逃竄東還, 而飢餒塡壑, 且被虜中拘執, 死亡略盡, 得歸者(纔數百人云,) 不滿 千云。


    •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75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1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