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사 심돈을 인견하고 변방의 일과 강도의 보장책 등에 대해 의논하다
〈오시에〉 왕이 선정전에 나아가 검찰사 심돈(沈惇)을 인견하였다. 우부승지 정규(鄭逵), 가주서 정양필(鄭良弼), 기사관 안응로(安應魯)·신게(申垍)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조가 징병하는 일은 어떠한가?"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소굴과 가까운 까닭에 천조에서 오랑캐를 정벌하러 징병하는 일을 말할 때마다 우리 나라를 책망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지원 군대를 들여보내고자 하나, 당초의 주문에 기꺼이 응하려 하지 않는 기색을 현저히 드러냈던 까닭에 깊이 근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박정길(朴鼎吉)이 가는 것을 잠시 정지하고 자문을 고쳐 보낸다면 이로부터 물정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 적들이 양병한 지가 거의 40년 가까이 되니 비록 천하의 군사로 대적하더라도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저번에 천조의 통보를 보니 또한 어렵게 여겼습니다. 비록 천조의 군사로도 섬멸을 기약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옛날에 건주위(建州衛)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할 때 우리 나라가 윤필상(尹弼商)·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을 장수로 삼았었다. 모르겠지만 지금도 이러한 장수들이 있는가?"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이 적은 이만주와는 같지 않습니다. 이만주는 이 오랑캐들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이 적이 천조와 서로 겨루고 있으니 비록 한 부대가 우리의 변경을 침범하더라도 필시 깊이 들어올 리는 없습니다. 지금의 징병에 군사를 보내지 않으면 또 천조의 견책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삼고자 하여 이미 요량해두었는데 강도 외에 보장으로서 합당한 곳이 어디인가?"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강도는 땅이 넓고 수륙으로 길이 통하였고 종사(宗社) 판적(版籍)과 예악(禮樂) 문물(文物)도 갖출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충청 수영이 지세가 가장 좋고, 호남은 부안이 강화와 맥로가 서로 통하여 있으니 또한 예비할 만한 곳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강도는 수륙로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가. 강도로부터 수영(水營)으로 가려면 어느 길을 경유하는가?"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강도로 가는 육행은 양천(陽川)에서 출발하여 통진(通津)을 거쳐 갑곶(甲串)에 이르며, 배를 타면 한강을 따라 김포·양천·통진을 지나서 연미정(燕尾亭)에 이릅니다. 강도에서 호서로 향하는 육행은 진위(振威)·수원(水原)·평택(平澤)·덕산(德山)을 경유하여 수영에 이르며, 뱃길로는 안흥량(安興梁)을 지나서 면천에 이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강도는 이미 헤아려 처리하였고 강도로부터 바다로 내려가는 것은 어떨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일이 만약 이같은 데 이르면 항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국사의 어려움과 위태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강도는 호종하는 군사들과 피난하는 사람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만약 뱃사공의 지휘가 없다면 진흙땅과 밀물 썰물에 절대로 뛰어 넘어 건널 수가 없습니다. 또 오랑캐의 장기는 다만 말 달리기인데 그 장기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더구나 강도는 여러 섬들이 총총히 포열돼 있어 서로 도와서 성원할 수 있습니다. 진강 목장(鎭江牧場)을 백성들에게 경작하여 먹고 살 수 있도록 한다면 다만 도성 사민(士民)을 다 안집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내(畿內) 백성을 다 들어와 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지금 내려가서 형세를 살펴보고서 좋은 쪽으로 처치하는 것이 좋겠다. 또 강도가 비록 보장이라 하지만 군기·군량을 미리 조처하여 갖춘 연후에야 보장이라 할 수 있다. 축성하는 공력이 반드시 어려울 것이니 목책을 먼저 만들어 세워서 난리에 임하여 의귀(依歸)할 곳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심돈이 아뢰기를,
"전에 하교를 보니, 목장을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하는 일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두장(豆場)은 말을 기를 수 있고 진강장은 경작할 만하니 지금 비록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허락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다시 말을 기르도록 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강도가 비록 보장이라 하지만 서북 관방도 불가불 갖춰 놓아야 하며 경성을 수어하는 일도 또한 헤아려 처리하여야 하는데 우리 나라의 일은 자못 착실히 거행하는 일이 없어서 극히 염려된다."
하니, 심돈이 아뢰기를,
"상의 전교가 지당합니다. 나아가서 지키는 것이 상책이고, 물러나 보존하는 것은 말단의 계책입니다. 비국의 신하들이 지금 계책을 세우고 있습니다만, 병력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변방 방비가 어려운 이 시기에 정승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고 우상이 비록 있으나 출사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심돈이 아뢰기를,
"소신이 영건 당상으로 재직하고 있는 지가 이제 4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궁궐을 짓는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지난번 징병하는 자격(咨檄)이 왔을 때 소신이 망령되이 소회를 진달하였는데 도리어 너그러이 용납하셔서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소신의 뜻은 양궐을 짓는 일을 모두 정지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포(米布)가 다하고 재력이 이미 궁핍하게 되었으니 먼저 한 궁궐을 수축하고 그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형세를 살펴 보아 다시 수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도감 제신의 뜻도 다 이와 같으므로 감히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형세를 살펴 보아 하겠다."
하였다. 심돈이 아뢰기를,
"사목을 마련한 것 안에 나주(羅州)를 적간하는 일은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박자흥(朴自興)의 헌의에 부안(扶安)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는데 이곳도 적간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부안도 적간하여 오라."
하였다. 〈표피 1장, 환도 한 자루를 하사하였다. 자리를 파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90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121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교통-육운(陸運) / 교통-수운(水運) / 왕실-종사(宗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午時, 王出御宣政殿, 引見檢察使沈惇。 右副承旨鄭逵、假注書鄭良弼、記事官安應魯・申垍入侍。 上曰: "天朝徵兵之事, 何如?" 惇曰: "我國與奴穴密邇, 故天朝征奴徵兵之事, 言言皆責望於我國。 我國群情, 皆欲入送, 當初奏文, 顯有不肯之色, 故深以爲悶。 朴鼎吉之行, 姑爲停止, 改送咨文, 自此物情歡喜矣。" 王曰: "此賊養兵, 幾四十年, 雖以天下之兵當之, 勝敗未可知矣。" 惇曰: "頃見天朝通報, 則亦以爲難。 雖以天朝之兵, 難期殲滅矣。" 王曰: "昔者, 建州衛 李滿住征討時, 我國有尹弼商、康純、魚有沼、南怡輩爲將。 未知此時, 亦有如此之將乎。" 惇曰: "此賊與滿住不同, 滿住之强, 不至如此奴也。 此賊與天朝相較, 雖或一枝兵馬, 來犯邊上, 必無深入之理, 今徵兵不送, 亦恐被譴於天朝也。" 王曰: "江都欲爲保障, 已爲預度, 而江都之外, 可合保障, 何處耶?" 惇曰: "江都地廣, 水陸路通, 宗社、版籍、禮樂、文物, 亦可具矣。 其次忠淸水營, 形勝最好, 湖南則扶安與江華, 脈路相通, 亦可預備。" 王曰: "江都水陸程途, 向何方? 自江都往水營, 由何路耶?" 惇曰: "江都, 陸行, 則自陽川、通津, 抵甲串乘舟, 則自江頭, 過金浦、陽川、通津, 抵燕尾亭, 自江都向湖西, 陸行, 則由振威、水原、平澤、德山, 到水營, 舟行, 則過安興渡, 抵沔川矣。" 王曰: "江都, 已爲料理, 自江都下海之擧, 則未知如何?" 惇曰: "事若至此, 無異航海。 國事艱危, 有不可言矣。" 王曰: "江都則扈從之士, 避亂之人, 皆可容接乎?" 惇曰: "若無舟子之指揮, 則泥濘之地, 潮汐之水, 萬無飛渡之理。 且奴之長技, 只在馳騁, 棄其長技, 渡海何爲? 況江都諸島, 星羅碁布, 可助聲援。 鎭江牧場, 許民耕食, 則非特都城士民, 亦皆安集, 畿內百姓, 盡可入居矣。" 王曰: "卿今下去, 察見形止, 從長處置, 可也。 且江都, 雖曰保障, 軍器、軍糧, 預爲措備, 然後可以謂保障矣。 築城之功力必難, 木柵爲先設造, 以爲臨亂依歸之所。" 惇曰: "前見下敎, 牧場許民之事, 以爲持難。 豆場可以牧馬, 鎭江場則可以耕種, 今雖許民耕食, 待時還收牧, 未爲不可。" 王曰: "江都雖爲保障, 西北關防, 不可不備, 京城守禦, 亦可料理, 而我國之事, 殊着無 實擧行之事, 極爲可慮。" 惇曰: "上敎至當。 進守爲上策, 退保爲末計。 備局諸臣, 今方料理, 而非但兵力脆弱, 當此邊虞孔棘, 台席久曠, 右相雖在, 而不爲出仕, 群下之情, 深用憂悶。" 惇曰: "小臣備位於營建堂上, 于今四載矣。 今此宮闕之役, 非不知出於不得已, 而頃日徵兵咨檄之來, 小臣妄陳所懷, 反承優容, 不勝感激。 愚臣之意, 非欲竝停兩闕。 米布垂盡, 財力已匱, 先修一闕, 待其完畢, 觀勢更爲。 故都監諸臣之意, 亦皆如此, 敢爲冒瀆。" 王曰: "觀勢爲之。" 惇曰: "事目磨鍊內, 羅州摘奸事已下, 而朴自興獻議, 扶安似好, 此處亦摘奸乎?" 王曰: "扶安亦摘奸以來。" (豹皮一令、環刀一柄賜給。 罷出。)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90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1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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