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궁을 폄손하는 절목
존호(尊號)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르며, 국혼(國婚) 때의 납징(納徵)·납폐(納幣) 등 문서를 도로 내오며, 어보(御寶)를 내오고 휘지 표신(徽旨標信)을 내오며, 여연(輿輦)·의장(儀仗)을 내오며, 조알(朝謁)·문안(問安)·숙배(肅拜)를 폐지하고, 분사(分司)를 없애며, 【승정원·병조·도총부(都摠府)·겸춘추(兼春秋)·사옹원·위장소(衛將所)·내의원·금루(禁漏)·주방(酒房)·승전색(承傳色)·사약(司鑰)·별감(別監)·내관(內官)·궁중의 각 차비 나인(差備內人). 】 공헌(貢獻)을 없애며, 【각도(各道)의 매월 진상(進上)·각도의 삼명일(三名日) 진상·정부 및 육조(六曹)의 물선(物膳)·정부의 표리(表裏)·각사의 삼일 공상(三日供上). 】 서궁의 진배(進排)는 후궁(後宮)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翁主)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복(服)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이 의논을 할 때 〈와서 모인 자가 15인이었는데 많이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했다.〉 민몽룡이 신임 정승으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수염을 휘날리면서 흔연히 떠맡았는데, 폄손하는 절목 일체에 대하여 이이첨으로부터 익히 지시를 받은 뒤 물음에 응하여 물 흐르듯 거침없이 외워 나갔으며, 한효순은 머리를 구부린 채 ‘예. 예.’ 하고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처음에 공주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는 〈한 조목과 관련하여〉 유간이 말하기를 ‘서궁을 일단 선왕의 후궁과 똑같이 대한다면 공주도 옹주로 낮추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으나, 이이첨이 따르지 않고 단지 혼인과 늠료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유간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내보낸 뒤 이어 다시 의논케 하였다. 2월 11일에 도당에 모여 다시 절목을 늘려 정했는데, 〈이 내용은 유실되어 기록하지 못한다.〉 【옹주의 예에 따른다고 한 절목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자 왕이 더욱 노하여 마침내 사목(事目)을 계하(啓下)하지 않았다.】 】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0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15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
○貶尊號, 削前上本國尊號, 出玉冊、玉寶, 去大妃二字, 稱西宮, 國婚時納徵、納幣等文書還出, 出御寶, 出徽旨標信, 出輿輦、儀仗, 廢朝謁、問安、肅拜, 罷分司, 【承政院、兵曹、都摠府、兼春秋、司饔院、衛將所、內醫院、禁漏、酒房、承傳色、司鑰、別監、內官、宮中各差備內人。】罷貢獻, 【各道每朔進上、各道三名日進上、政府・六曹物膳、政府表裏、各司三日供上。】西宮進排, 依後宮例, 公主廩料、婚姻, 依翁主例, 父爲逆魁, 身與逆謀, 子爲逆徒所推戴, 旣自絶於宗廟, 身歿之後, 擧國上下不擧哀, 無服, 不得入廟, 仍進築宮墻設堡, 令武士守直。 【是議也, 來會者十五人, 而多失不記, 閔夢龍以新相, 攘臂奮髯, 欣然自當, 凡貶損節目, 熟受於爾瞻, 應口誦如流, 孝純俯首唯唯而已。 柳澗 初欲以論公主, 降爲庶人, 一欵 柳澗曰: "西宮旣與先王後宮一體, 公主宜降爲翁主。" 李爾瞻不從, 只婚姻、廩料, 依翁主例。 王聞之, 王大怒, 出 澗爲 蔚山 府使, 仍令更議。 二月十一日, 會于都堂, 復加增定, 而事逸不錄。 而翁主之例, 仍不改, 王益怒, 遂不下事目。】
- 【태백산사고본】 43책 43권 103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15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