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광해군일기[중초본]121권, 광해 9년 11월 24일 을유 10번째기사 1617년 명 만력(萬曆) 45년

의정부에 보낸 폐비 문제의 완곡한 처리를 청하는 좌의정 정인홍의 의견

좌의정 정인홍이 의정부에 의견을 보내기를,

"재상 여러분이 중대한 논의를 가지고 먼 곳까지 와서 별것 아닌 나에게 의견을 물으니 감격스러운 일이오만 늙은이의 말을 어찌 시행할 수 있겠소. 신하에게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의리가 있고 모자지간에는 바꿀 수 없는 명분이 있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그 도리를 다한 뒤에야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여러 대신들께서는 조정의 사대부들에게 널리 물어서 최대한으로 옳은 점을 취하여 거행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늙은 나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나머지는 낭관이 구두로 진술할 것이외다."

하고, 또 이이첨에게도 글을 보내기를,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신하의 큰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는 애강(哀姜)문강(文姜)이 도망갔다고 써서 가까이 여기지 않았으며, 노(魯)나라에 간 것도 오히려 도망갔다고 하였으니, 아주 심하게 관계를 끊은 것입니다. 그 후에 한 광무(漢光武)고 황후(高皇后)를 원묘(園廟)로 삭출시켰으며, 한(漢)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장릉(章陵)에다 두씨(竇氏)를 부장(附葬)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므로 호씨(胡氏)가 ‘장간지(張柬之) 등이 죄는 토벌하지 않고 도리어 존호를 올렸다.’고 기롱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의리가 있는 곳엔 예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자를 반드시 처벌하는 것은 역시 《춘추》의 의리이니 역적 음모에 참여하고 저주를 한 것은 반역을 도모한 것 중에서 가장 심한 것입니다. 결국 점차적으로 개선되게 하려는 노력이 사나운 어미와 오만한 동생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함에 큰 불효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던 날 한 궁전에서 거처할 수 없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온 나라의 신민이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자들도 포용해 는 것이 임금이 가져야 하는 큰 도량인 것입니다. 군신(君臣)과 모자(母子)의 명분과 의리는 천성에서 나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왕(寧王)같은 성인과 태공(太公)같은 현인이 3천 8백 명의 대중과 함께 잔적(殘賊)으로써 일개인이 되어버린 은 나라 주(紂)를 주벌하는 때에 백이숙제만이 유독 나서서 말을 멈추어 세우고 간하면서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단지 이 명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그를 칭송하여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성명께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신하들과 같지 않은 점도 여기에 있으며, 논의하는 사람들이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면서 간쟁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공자애강(哀姜)문강(文姜)에 대하여 도망쳤다고 쓴 것 외에 특별히 죄를 더 준 말이 없었고, 광무 황제고 황후에 대하여 종묘에는 모시지 않았으나 원릉에는 모시게 하였으며, 화제(和帝)는 부장하지 말자는 조정 신하들의 청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가지고 말한다면 성명께서도 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그에 맞는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이른바 분조(分曹)와 분부(分府)와 분원(分院)의 관리들과 모든 관리들이 아침 문안하는 것 등 일반적인 모든 절차를 한결같이 두 조정과 두 임금이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보잘것없는 나의 소견으로는 이와 같은 규례를 일제히 폐지해서 두 조정과 두 임금이 없게 함으로써 온 나라 사람에게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다는 의리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막지 않아서 이에 해를 입었다는 염려를 가진다면 한두 명의 충실한 신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서궁을 호위하게 하면서 드나드는 것을 엄하게 금하고 외부와의 접촉할 길을 막되 한결같이 대내(大內)에서처럼 한다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홀어미로 지내는 한 부인은 다만 나쁜 사람들을 포용하는 중의 일개인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의 일생을 잘 보전할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은 공자가 ‘도망쳤다.’고만 쓴 것과 광무 황제고 황후를 종묘에서 내쫓고 왕릉의 사당에서는 제사지내게 한 것과 화제가 조정 신하들의 요청을 듣지 않은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서, 예나 지금이나 다같이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민으로서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의리와 나쁜 사람까지도 널리 포용하는 전하의 덕행이 병행되어 서로 어긋나지 않고 광대한 천지 사이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신하인 저는 먼 지방에 물러가 있기 때문에 사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론은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소활하고 어리석은 소견만으로 이같이 정성을 다하여 피력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채택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64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사상-유학(儒學) / 변란-정변(政變) / 역사-고사(故事)

    ○左議政鄭仁弘送議于議政府曰: "僉台遠以大論, 詢及芻蕘, 感則有矣。 第言耄豈可底行? 臣工有不共之義, 母子有不易之名, 二者各盡其道, 然後可無後悔。 伏願僉台, 廣詢朝紳, 取十分是底行之, 是老妄區區之望。 餘在郞官口伸。" 又以書抵爾瞻曰: "讐不共天, 臣子之大義也。 故《春秋》兩姜, 書遜而不之親, 歸而猶遜之, 其絶之深矣。 其後 光武高后於園廟, 之臣, 請勿附竇氏章陵, 故胡氏 等不討罪, 而反上號, 此皆義之所在, 禮不得不變也。 將而必誅, 亦《春秋》之義也。 預賊謀、作詛呪, 將之甚者也。 畢竟烝乂之道, 未孚於嚚、傲之間, 而大杖之走, 自急於謀蓋之日, 使不得自處一宮, 固一國臣民不共天之讐也。 然包荒無外, 是人君之大度也。 君臣、母子之名義, 出於天而不可易。 故以寧王之聖、太公之賢, 同三千八百之衆, 誅殘賊一夫之 , 而伯夷叔齊挺然獨立, 叩馬之諫而不惑者, 只惜此名義故也。 宣聖稱其‘求仁而得仁’, 蓋以此也。 聖明之處此者, 與臣民自不同者在此, 議者之爲聖明惜者, 所爭亦在此耳。 聖筆於遜于之外, 別無加罪之辭, 光武高后, 不齒宗廟, 而猶存園廟之祀, 和帝不聽廷臣勿附之請。 以此而言, 聖明之處此, 宜有其道也。 第未知今日之所謂分曹、分府・院之官與百官朝拜與凡百儀形, 一如二朝兩君者何哉? 無狀之見, 以爲此等規例, 一皆停廢, 使無二上、二君, 以示一國人不共之義。 若持不 戕之戒於萬分有一之中, 則只令一二忠實之臣, 軍守衛, 嚴出入之禁, 杜外交之路, 一與大內同, 可保無憂。 孀居一婦人, 特包荒中一介人而已, 仍得保全其終始, 則此與聖筆之只書遜于, 光武之黜宗廟、存園祀, 和帝之不聽廷臣之請, 前後一揆, 古今竝稱。 而臣民不共之義、聖明包荒無外之德, 竝行而不相悖, 無憾於天地之大也。 無狀之臣, 縮在遠外, 事勢之如何、輿論之所在, 俱未詳知, 只据踈愚之見, 傾倒若此, 惟諸公採擇爾。"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64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사상-유학(儒學) / 변란-정변(政變)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