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이 배신의 관복 제도에 대해 예부에 올린 자문
사신이 가는 길에 배신(陪臣)의 관복 제도(冠服制度)에 대하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올렸다. 자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전례(典禮)에 따라 번사(蕃使)의 장복(章服)을 바로잡을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예조 장계에 의거하건대, ‘우리 나라와 중국은 국경의 한계야 있지만 실제로는 내외의 구별이 없으므로 문명의 교화를 유독 많이 받았고 관상(冠裳)의 제도도 함께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열조(列祖)의 보살핌과 성황(聖皇)의 총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우리 나라 배신(陪臣)이 일로 인하여 중국에 가서 매번 조천궁(朝天宮)에서 의식을 연습할 때와 반열을 따라 예식에 참가할 때에 더그레와 깃이 둥근 검은 옷 등을 착용하고 참석하여 반열에 나아가는데, 법전을 상고해보면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 배신이 어느 때에 예절과 법도를 버리고 임시방편으로 편리함만 추구하여 예에 맞지도 않는 이런 의복을 착용했는지 모르겠으며, 그후로 계속 잘못된 풍습을 답습하면서 그것을 살필 줄을 모르고 잠자코 따르는 습성에 젖어 중국의 교화 밖으로 자처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망령스런 그들이 전후하여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 할 줄을 몰랐던 것은 책망할 겨를도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조의 예부에서는 오전(五典)을 두텁게 펴서 만국에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나라 배신(陪臣)의 잘못된 예절에 대해서 그 잘못을 그대로 두고서 일찍이 바로잡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궁벽진 외국이라고 핑계하여 비루하게 여기고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대명집례(大明集禮)》의 번사조공의(蕃使朝貢儀)에는 「주변 국가의 사신이 봉천전(奉天殿)에서 조현(朝見)할 때에 품계에 의한 조복을 입고 예를 행한다.」 하였고, 또 번사매세상공의(蕃使每歲常貢儀)의 주석에서는 「사신과 백관은 각각 조복을 갖추고서 자리에 나아간다.」 하였고, 또 번사폐사의(蕃使陛辭儀)의 주석에는 「번사는 조복을 입고 들어와서 대궐의 서남쪽에 서 있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번사가 입공(入貢)·상조(常朝)·폐사(陛辭) 등의 예에 모두 조복을 착용하고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집례(集禮)》란 책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절충한 것이고 세조 숙황제(世祖肅皇帝)께서 간행하여 반포한 것으로 어제 서문(御製序文)에 「진실로 만세의 법이 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널리 선포해서 우리 황조의 법제를 드러나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고황제가 백왕의 법전을 참작하여 한 시대의 회전(會典)을 편수하셨고 숙황제께서는 물려주신 법을 크게 드러내서 중외에 반포하셨으니, 전성과 후성이 법을 세우고 기강을 세워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사물을 법에 맞게 하신 뜻이, 이루어 놓은 업적위에 우뚝하고 그 문장도 빛납니다. 근자에 중국에 가는 배신들이 황조(皇朝)와 문화가 같은 성문법을 폐기하고 법에 어긋난 하국(下國)의 잘못된 유적을 답습하여 그대로 세월만 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놀랍기만 합니다. 끝까지 원상복구하지 못한 실책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어쩔 수가 없지만, 만일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았다면 신속하게 개정해서 정당한 데로 귀결되게 해야지, 어찌 잠시라도 태만히 해서 그전 잘못을 더 무겁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옥(玉)을 받드는 예절에서 높낮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도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바라볼 때 허리띠를 주시하지 않아도 경계를 받는데, 더구나 예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품위를 잃게 되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상의 사연을 갖추어 가지고 자문으로 예부에 청하기를 「이제부터 앞으로는 본국에서 중국에 가는 배신들에게는 《집례(集禮)》의 조례에 의하여 조복을 입고 반열을 따르게 해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게 해준다면 좀더 나은 수준으로 발돋움해 가려는 소원을 이루게 되어 진실로 유익할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장계에 의거하여 당직이 참조하건대, 우리 나라가 비록 멀리 동떨어져 있는 나라이기는 합니다마는, 대체로 모든 문화와 제도는 다 황조(皇朝)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홍무 2년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대훈(大訓)을 소상하게 게시하여 배신의 조복입는 의식까지 정하셨고, 계속해서 가정(嘉靖) 9년에는 성황제께서 깊이 보관해 두었던 책을 널리 간행하여 배포하게 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배신들도 모두 조복을 착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가 공경히 받들어 지금까지 2백 년 동안이나 어기지 않고 시행해 왔습니다. 대체로 절일(節日)·망궐(望闕)·배표(拜表)·영조(迎詔) 등의 예절에 임금과 모든 신하들이 다 조복을 갖추어 입고 삼가 일을 진행하는데, 유독 이 중국에 가는 배신(陪臣)들만은 회동할 때 단지 외국의 사조(私朝)에서만 조복을 입고 천자의 공정(公庭)에서는 입지 않으니 어찌 예의가 심히 문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조장(朝章)에 속하고 의의가 국헌(國憲)에 관련되니, 예조가 조사해서 계청한 것은 과연 정확하다고 하겠습니다. 행정부의 책령으로 지금 가는 배신들이 중국에 도착하는 대로 귀부(貴部)에 품달해서 조복을 착용하고서 예를 연습하고 예를 시행해서, 혹시라도 그전처럼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지 않도록 함은 물론, 자문을 갖추어 보내오니, 귀부는 앞의 내용을 세밀히 살펴보고 《집례(集禮)》에 상세하게 정해 놓은 성대한 제도에 비추어서, 소방의 배신(陪臣)이 조복을 입고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런 일이 없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4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614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
○丁巳八月二十七日己未因使臣之行, 以陪臣冠服之制, 咨于禮部曰:朝鮮國王, 爲遵依皇朝典禮, 釐正蕃使章服事。 據禮曹狀啓節該"小邦之於天朝, 雖有疆場之限, 實無內外之別, 偏被文明之化, 獲共冠裳之制。 玆固列祖之所眷顧, 聖皇之所寵綏者也。 乃者我國陪臣, 因事進京, 每於朝天宮演儀及隨班展禮時, 則却自穿着褡𧞤、玄盤領等服, 入參就列, 考之彝典, 無據甚矣。 不知何等陪臣, 始於何時, 棄禮敗度, 徇便苟簡, 服此不衷, 仍致厥後踵襲謬誤, 遂不覺察, 甘心聾瞽之習, 自處聲敎之外乎? 伊等前後悖妄, 不恥不若之罪, 固不暇責。 竊念皇朝禮部, 惇敍五典, 表率萬國。 親小邦陪臣之失儀若此, 而任他舛戾, 曾不紏飭, 將無乃諉以偏荒外國而鄙陋之, 不肯責備而然耶? 臣等謹按《大明集禮》 《蕃使朝貢儀》, 有曰: ‘蕃使奉天殿朝見, 依品服朝服行禮。’ 又該《蕃使每歲常貢儀》註曰: ‘使臣及百官, 各具朝服就位。’ 又該《蕃使陛辭儀》註曰: ‘蕃使朝服入, 立於丹墀之西南。’ 然則蕃使凡入貢、常朝、階辭等禮, 皆用朝服之儀, 槪可見矣。 竊惟《集禮》一書, 乃是太祖高皇帝所折衷, 世祖肅皇帝所刊布者, 故御製序文, 旣曰: ‘允爲萬世法程。’ 又曰: ‘廣行宣傳, 以彰我皇祖之制。’ 蓋高皇帝參酌百王之彝章, 修明一代之《會典》, 肅皇帝丕顯貽範, 頒示中外, 前聖後聖, 立經陳紀, 納民、軌物之意, 可謂巍乎有成、煥乎其文。 玆者進京陪臣等, 廢皇朝同文之成憲, 襲下价拂經之謬迹, 因循積習, 以至今日, 委屬可駭。 迷復之失, 旣往莫追, 如知其非也, 則固當速改而歸正, 豈容斯須怠慢, 以重前過乎? 執玉高卑, 猶取人譏, 視過帶禬, 尙且垂戒, 況此毁服失容, 將若之何? 合無備將前項緣由, 咨請禮部, ‘自今以後, 本國進京陪臣, 許依《集禮》條例, 仍以朝服隨參, 免致相鼠之剌, 庶遂遷鸎之願, 允爲便益’等因具啓。" 據此當職參昭, 小邦雖係遐裔, 凡典章文物, 悉遵皇朝之經制。 粵在洪武二年, 欽我太祖高皇帝, 昭揭大訓, 至定陪臣朝服之儀, 續該嘉靖九年, 欽蒙聖皇, 又發祕藏, 推衍刊布, 進貢陪臣, 皆令朝服。 小邦欽依祗奉, 罔敢違越, 二百年于玆。 凡遇節日、望闕、拜表、迎詔等禮, 君臣上下, 皆具朝服, 肅虔將事, 而獨此進京陪臣等, 乃於玉帛會同之際, 只行於外國之私朝, 而旋廢於天子之公庭, 豈非紊亂乖悖之極乎? 事屬朝章, 義關國憲, 禮曹査啓之請, 果爲的確。 除‘行政府責令, 今去陪臣等, 行到京師, 具稟貴部, 便將朝服演禮行禮, 毋或似前仍蹈謬例’外, 備咨前去, 煩乞貴部曲察前因, 査照《集禮》詳定之盛制, 許容小邦陪臣, 得以朝服隨參, 不勝幸甚。
- 【태백산사고본】 41책 4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614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