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시험의 부정에 대한 유학 원이곤의 상소
유학(幼學) 원이곤(元以坤)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 하는 것은 인재(人才)가 나오느냐 물러가느냐에 달려 있으며, 인재가 나오느냐 물러가느냐는 과거(科擧)가 공정한지 공정하지 못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에서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취하는 것은, 3년마다 대비(大比)가 있고 경사스런 일을 만나면 별거(別擧)가 있으며, 혹 정전에 나아가 책문으로 시험보이기도 하고 혹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는 방도가 여기에 있으며 나라를 빛내고 대국을 섬기는 방도가 여기에 있으며 왕도를 돕는 계책이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 때문에 조종조에서 법을 처음 만들 때에, 나중에 사사로움이 성행할까를 염려하여 할봉(割封)하고 역서(易書)하는 규정을 두었고, 간사하고 외람된 일로 폐단을 일으킬까를 염려하여 차술(借述)과 협서(挾書)를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도(世道)가 날로 내려가고 온갖 법도가 모두 무너졌는데도 오직 과거라는 한 가지 일만은 공도(公道)를 조금이나마 보존하여 오늘날까지 2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사풍(士風)이 더욱 투박해지고 시습(時習)이 크게 변하여, 거자(擧子)들은 학업을 닦지는 않고 오직 분경(奔競)이 유리하다는 것만을 알며, 고관(考官)들은 공도는 버려둔 채 오직 요직을 차지한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들만을 뽑습니다. 시험을 보이라는 명이 한번 내리면 명사(名士) 집의 문앞에는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시험을 보일 날이 되면 시험장에 들어갈 고시관의 집에는 청탁이 무더기로 밀려옵니다. 가까운 친척들은 출제될 제목의 뜻을 미리 알아서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손을 빌려 반드시 합격하기를 바라는데 마치 좌계(左契)를 지닌 것과 같이 합격이 보장됩니다. 경위(京圍)·향시(鄕試)·회시(會試)·초시(初試)가 모두가 그러합니다. 2백 년 이래로 이러한 폐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더러 학문의 수준은 구두(句讀)나 분별할 줄 아는 정도인데 단지 경서(經書) 칠대문(七大文)을 강송(講誦)하여 순통(純通)이라는 좋은 점수를 얻는 자도 있으니, 이는 얻은 바의 자표(字標)를 시관에게 몰래 통하여 시관으로 하여금 강지(講紙)에다 강송할 칠대문을 적어넣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러 문장을 한 줄도 엮지 못하면서 오직 뇌물을 써서 글을 잘 짓는 사람과 교결할 줄만 알아서, 그의 좋은 작품을 얻어 시권(試券)에다 적어 넣어 마침내 높은 점수로 급제하는 자도 있으니, 이는 대개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로서 시험의 제목 뜻을 미리 알고 지어오거나 시험장에서 남의 글을 빌려 내면서, 편두(篇頭)나 편말(篇末)에 표식이 되는 문자를 적어서 고시관과 서로 짜고서 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난 식년시의 강경 시험을 마친 뒤에 어떤 사람이 길가의 대문 벽에다가 시를 지어 붙이기를, ‘문장과 재사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네. 자기 원하는 칠대문을 줄줄 외고 있으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겠지.[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항에서 조롱거리로 항상 읊조리는 글입니다.
전시(殿試) 복시(覆試)에 이르러서는 상께서 친림을 하시는데도, 미리 지어온 글로 급제를 할 뿐만 아니라, 두사(頭辭)에 표식을 함으로써 시관과 서로 응하는 자도 있고, 글제를 벗어난 글로써 서로 약속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정운(定運)의 미미한 공로’라고 한 것은 형효갑의 책문의 두사였고, ‘명예를 훔친 낙양(洛陽)의 소년’이라는 것은 권의(權誼)의 책문의 두사였습니다. 혹은 행적(行跡)으로 표식을 하기도 하고 혹은 명자(名字)로 표식을 하기도 하니, 참으로 매우 간교합니다. 어찌 거자가 혼자서 간교함을 부리고 고시관은 상응하지 않고서 이러한 일을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성균관에 나아가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에도 미리 출제(出題)를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길에 떠도는 소문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저것과 이것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또한 이렇게 했을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미리 글을 지어와서 과거를 도둑질한 형효갑을 과방에서 뽑아버리게 하셨고, 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다.’고 분부를 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참으로 이미 깊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간으로 있는 자는 마땅히 따라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형효갑을 비호하느라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고시관이 정밀하게 선발하였다.’고 하는데, 그 정밀하게 선발한다는 것이, 두사에 표식을 하여 서로 응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더란 말입니까.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라고 하는데, 그 지공무사라는 것이, 미리 지어오거나 글제를 벗어난 글을 뽑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더란 말입니까. 성상의 전교 안에 있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부는 상께서 다 보고 통촉하신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의 말씀이 한번 내려지자 뭇 사람들이 모두 탄복을 하였는데, 도리어 ‘상께서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계신다.’고 하니, 그 말이 참으로 참담하지 않습니까.
아, 대간이 상을 속이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헌사(憲司)가 풍문을 듣고 변헌(卞獻)과 이진(李進) 등을 체포해 가두었는데 그들이 차작(借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의 장옥(場屋)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도 시험을 실시하기 전에 차작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것이 바로 제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지공무사하였다고 하고, 그들이 글을 판 일에는 화를 내며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하니, 이것이 상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 왕부(王府)로 이송하여 공초를 받아 보면 전후로 몰래 사사로움을 부린 종적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국가가 대간을 두는 것은 귀와 눈의 책임을 맡긴 것인데 귀와 눈이 이와 같고, 국가가 인재를 뽑는 것은 뒷날 등용하려고 하는 것인데 공정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면, 신은 전하께서 누구와 더불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함께 정치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재를 뽑는 공도(公道)는 고시관의 책임인데 고시관이 사사로움을 부리는 것이 이와 같고, 고시관이 공정하지 못한 것은 대간이 논핵을 해야 하는데도 대간이 곡진하게 비호해 주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차라리 공도가 없어지더라도 자기 당파를 심는 것을 좋게 여기고 차라리 전하를 저버리더라도 자기 무리를 비호하는 데에 힘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인재를 뽑는 것을 문한(文翰)을 가지고서 했는데 오늘날에는 인재를 뽑는 것을 권세를 가지고 하고 있으며, 옛날의 선비들은 이치를 궁구하고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의 선비들은 시론(時論)에 빌붙기만 합니다. 시배(時輩)들의 자제나 족당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독서가 무슨 일인 줄을 알지 못하고 젖냄새 나는 어린 것들이 먼저 외과(嵬科)에 급제를 합니다. 그리하여 일에 임해서 붓을 잡으면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주고받는 글을 쓸 때에 문장의 격식을 모르는 자도 있습니다. 뒷날 나라를 빛내고 중국에 보낼 글을 전하께서는 누구에게 부탁할 것이며 누구에게 맡길 것입니까.
아, 과거 한 가지 일로 임금을 속이는 조짐이 언론의 책임을 맡은 관원에게서 나왔으니, 이는 국가의 불행이지 어찌 과거만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더없이 큰 공공(公共)의 과거를 사문(私門)의 은혜를 파는 도구로 만들어서, 명절(名節)이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과제(科第)를 그대로 존속시켜 은혜를 파는 바탕이 되게 할 바에는 차라리 과거를 혁파하고 선법(選法)으로 고쳐 만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신하 전휘(錢徽)와 양여사(楊汝士)가 지공거(知貢擧)로서, 요직을 차지한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를 사사로이 뽑았는데, 그 당시에 특명으로 복시(覆試)를 실시하자 처음에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자들이 끝내 시험 답안을 한 줄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담(鄭覃) 등 10명을 내치고 전휘 등을 좌천시켰습니다. 근래 몇 년 동안 사심을 가지고 뽑은 자가 어찌 10명뿐이겠습니까. 복시를 실시하여 내치고 좌천시키는 법전을 오늘날 다시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53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幼學元以坤上疏曰:伏以國家之治亂, 係於人才之進退; 人才之進退, 在於科擧之公不公。 惟我國家設科取士, 三年而大比, 遇慶而別擧, 或臨軒策士, 或臨泮取人。 網羅英俊之途, 在於是; 華國事大之具, 在於是, 其所以發政治民, 黼黻王道之猷, 由玆而成焉。 是以, 祖宗立法之初, 慮末路之行私, 則有割封、易書之規; 恐奸濫之生弊, 則有借述、挾書之禁。 世道日降, 百度皆隳, 而唯科擧一事, 稍存公道, 于今二百年有餘矣。 近年以來, 士風益偸, 時習大變, 爲擧子者, 不修業, 而唯知奔競之爲利; 爲考官者, 捨公道, 而專取權要之子弟。 一下試取之命, 干謁雲委於名士之門, 及當開圍之日, 請托輻輳於應入考官之家。 親切之人預知應出之題意, 假手於能文之人, 期於必得, 若持左契。 京圍、鄕試、會試、初試, 莫不皆然。 二百年來, 此弊益甚。 或學辨句讀, 而只誦經書七大文, 能得純通之優畫者, 以其潛通所得字標于試官, 使之書塡所誦七大文於講紙故也。 或文不綴一行, 而唯知貨賂, 交結能文之人, 得其佳作, 注於試卷, 終占高第者, 蓋其勢門子弟, 或預知題意, 或臨場借述, 而與考官, 相應文字於篇頭、篇末故也。 去式年講經後, 有人題詩於路傍門壁曰: "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 此閭巷相誦嘲詠之詞也。 至於殿試、覆試, 寶座天臨, 而非但宿構見捷, 以冒頭相應者有之, 以題外之辭相約者有之。 "定運微勞"之語, 邢孝甲之策頭也; "名竊洛陽之少年"者, 權誼之策頭也。 或以行跡爲標, 或以名字爲標, 其爲奸巧極矣。 豈有擧子獨行奸巧, 考官不相應而爲此事之理哉? 非但此也。 臨泮取人之際, 亦有預出題之言。 道路之言, 雖不可盡信, 揆之以彼此, 則亦不無是理矣。 殿下特命拔去宿構竊科之邢孝甲, 而又有"科擧不公, 曾已聞之"之聖敎, 是, 殿下固已知之審矣。 爲臺諫者, 所當遵奉之不暇, 而營救孝甲, 無所不至, 一則曰: "考官精選。" 曾謂精選者, 以冒頭相應乎? 一則曰: "至公無私。" 曾謂至公無私者, 取宿構題外之辭乎? 至於聖敎中"不公"之敎, 出於睿鑑之洞燭, 故王言一下, 輿情咸服, 而反謂之"執狐疑之心", 其爲言也, 不亦慘乎? 嗚呼! 臺諫之欺罔, 不難知也。 今者憲司, 以風聞捉囚卞獻、李進等者, 以其借作之故也。 渠等不能入會試、殿試之場屋, 而能爲借作於試前, 則題之預知, 據此可驗。 而告於君父, 則曰"至公無私", 憤其賣父文, 則欲治其罪, 此非欺罔而何? 今若移付王府取供獻輩, 則前後隱私蹤迹, 敗露無餘矣。 國家之有臺諫, 乃是備耳目之責, 而耳目如是, 國家之取人, 欲爲他日之用, 而不公如是, 則臣不敢知殿下誰與共爲國乎, 共爲治乎。 取人之公道, 考官之責也, 而考官之用私如此; 考官之不公, 臺諫當劾, 而臺諫之曲庇如此。 寧滅公道, 而甘心於植黨; 寧負殿下, 而盡力於護黨。 故古之取人, 以其文翰, 而今之取人, 以其權勢, 古之士也, 窮理讀書, 而今之士也, 唯附時論。 名稱時輩之子弟、族黨則不知讀書爲何事, 而口尙乳臭, 先捷嵬科。 臨事執筆, 不成學 字畫者有之; 書於酬答, 不知簡式者有之。 他日華國事大之文, 殿下付之於誰, 任之於誰乎? 噫! 以科擧一事欺罔之漸, 出於言責之官, 則國家之不幸, 豈但科擧之不幸而已哉? 以莫大公共之擧, 爲私門市恩之地, 名節掃地, 弊習已痼, 與其仍存科第而爲市恩之資, 莫若罷科擧而改作選法之爲愈也。 昔者唐臣錢徽、楊汝士知貢擧, 而私取權要子弟, 其時特命覆試, 初占高第者, 終未免曳白。 仍黜鄭覃等十人, 且貶徽等。 今之數年間私取者, 豈特十人而止哉? 覆試黜貶之典, 不可不再擧於今日。 伏願殿下留神焉。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5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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