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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109권, 광해 8년 11월 21일 무자 8번째기사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전 의정부 좌참찬 윤승길의 졸기

【전 의정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이 세상을 떠났다. 【윤승길은 강개하여 의견이 맞는 사람이 적었으므로 벼슬길이 순탄치 않다가 관리의 능력이 드러나 구성 부사(龜城府使)가 되었다. 임진년 난리 때에 군기를 수선하고 물자를 마련한 것이 서로(西路)에서 최고였다. 이원익(李元翼)을 이어서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치적이 거의 비등하였고, 문벌을 이루어 경재(卿宰)에 이르렀다. 동생 윤승훈(尹承勳)은 당론(黨論)을 주장하여 빈객이 많았는데 윤승길은 교제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사위가 바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었는데도 윤승길은 한번도 궁금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선조(宣祖)께서 일찍이 공(珙)에게 이르기를, "너의 장인은 바로 내가 즉위할 때에 사신(史臣)이었다. 그는 사람이 교만하고 너무 강직한 것이 병통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은택이 다른 인척들에 비해서 매우 박하였다. 그러나 광해 이래로 누차 변란을 겪으면서도 윤승길의 집안은 초연히 궁가의 화를 면하였으니, 그가 고요히 지내며 몸가짐을 바르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세상을 뜨니 나이는 일흔 일곱이다. 부인 박씨도 음식을 먹지 않아 죽으니 세상에서 또한 그 정렬(貞烈)을 칭송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532면
  • 【분류】
    인물(人物)

○前議政府左參贊尹承吉卒。 【承吉剛介寡合, 蹭蹬名途, 以吏能顯爲龜城府使。 壬辰之亂, 征繕應辦, 爲西路最。 代李元翼平安監司, 殆績相埒, 積閥至卿宰。 弟承勳主黨, 論多賓客, 而承吉一無所交涉, 仁城君 , 而承吉一不干預宮禁。 宣廟嘗謂曰: "汝婦翁是予卽位時史臣也。 其爲人驕亢病也。" 由是恩澤視諸姻家甚薄。 然而光海以來累經世變, 承吉 一家超然免於宮家之禍者, 以其安靜自守故也。 至是卒, 年七十七。 夫人朴氏亦不食而卒, 世亦言其貞烈。】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532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