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 왕후의 면복을 청하는 주문
사신을 보내어 공성 왕후(恭聖王后)의 면복(冕服)을 거듭 청하였다. 그 주문(奏文)에,
"삼가 다시 간절한 마음을 진달하여 은명(恩命)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지난번 만력(萬曆) 43년025) 6월 12일에 사은사(謝恩使) 윤방(尹昉) 등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신의 생모(生母)인 김씨(金氏)를 추봉(追封)하는 고명(誥命)을 싸받들고 도착하였습니다. 삼가 저희 나라가 응당 시행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받들어 시행하였습니다.
다만 내리게 되어 있는 바의 관복(冠服)을 아직까지 하사받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두렵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온 정성을 다한 글을 폐하께 진달하고 오로지 성지(聖旨)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폐하께서는 성명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이에 부모와 같은 천자께 감히 다시 아뢰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추봉(追封)과 생봉(生封)은 똑같은 은전이요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은 본래 두 가지 물건이 아니니, 봉작(封爵)이 있으면 고명이 있고 고명이 있으면 관복이 있는 것입니다. 봉작을 받으면서 장복(章服)이 없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삼가 조사를 해보니, 지난 성화(成化) 11년026) 에 신의 선조 강정왕(康靖王) 신 아무가 그의 생부와 생모의 추봉을 청하여 삼가 헌종 황제(憲宗皇帝)의 준허(准許)를 받았는데 고명과 관복도 아울러 하사받았습니다. 그리고 성화 7년027) 에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 신 아무의 비(妃) 윤씨(尹氏)를 책봉하시고 아울러 고명과 관복을 하사하셨습니다. 그뒤로도 열성(列聖)들께서 저희 나라에 봉전(封典)을 내린 거조가 대부분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 나라가 대대로 물품을 갖추어 하사받은 것으로서 전후로 찬란하게 빛난 것입니다.
우리 황상(皇上)께서는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신의 정성을 가련히 여기시고 효성을 장려하는 성인(聖人)의 마음을 독실히 미루어 먼저 칙서(敕書)를 내리고 이어서 고명을 내리시어 특별히 추봉을 준허하시고 흡족한 존호를 하사하셨으니, 특별한 성천자의 은총이 우리 나라에 가득 넘쳤습니다. 그러나 유독 관복만은 아직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감격스러워하면서도 도리어 옛 전례와 다름이 있음을 가지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식인 신의 간절함이야 여러 다른 사람들의 마음보다 어찌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의 이 추봉의 은총이 참으로 보통이 넘는 특별한 은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관복(冠服)에 대해서 부(部)·과(科)에서 쉽게 허락하지 않으려고 함은 또한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뜻에 근본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시 황상께 입을 놀려 미진한 은전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신의 구구한 일념은 두터운 은총을 갖추어 받아 어버이를 드러내는 도리를 다하고, 선조들의 전례를 이어서 후손으로서 선조들이 물려주신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의상(衣裳)을 진설해 놓고 어버이가 옆에 계신 듯이 제사를 올려 정성을 다하고, 물품을 진열해 놓고 인륜(人倫)을 극진히 하는 제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이 하늘을 우러러 소망하며 애가 타도록 바라는 바입 니다.
근래에 삼가 들은 바에 의하면, 황조(皇朝) 내번(內藩)의 숭왕(崇王)이, 세종 황제(世宗皇帝)께서 형왕(荊王)의 모비(母妃)인 수씨(壽氏)의 책명(冊命)과 관복(冠服)을 준허하여 지급한 일을 인용하여, 그의 생모를 추봉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정상을 가련하게 여기어 책명과 관복을 준허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이신 강정왕(康靖王)의 생모에게 고명과 관복을 지급해 주셨던 것과 같은 성대한 은전입니다. 전후의 성인(聖人)이 그 법도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조(聖朝)에서 저희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것은 안팎의 차이를 두지 않으시어, 칙유(敕諭)를 내리실 때에 매양 ‘내복(內服)과 같이 본다.’고 하셨으며 또한 ‘짐이 바야흐로 은전을 내리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돌보아주시고 덮어 감싸주시며 구제해 주시고 생성시켜 주시는 융성한 은덕이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며 천하에 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왕업을 이어받아 공손히 제후의 도리를 지켰으며 예물을 바치는 의례를 중국 안의 제후들보다 못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스로 성상의 교화가 미치는 전복(甸服)을 벗어나겠습니까.
이에 삼가 내번(內藩)에 견주고자 하여 형왕(荊王)과 숭왕(崇王)의 사례를 끌어다 신청하는 바이니, 정리로 보아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하며 예의로 보아 참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여 왕도(王道)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먼 나라 가까운 나라 할 것 없이 복종하는 나라들을 모두 포용하시니, 저희 나라를 품어주심에 또한 어찌 피차의 차별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감히 이전에 자주 내리셨던 은총을 믿고 앞으로도 그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고자, 번독스럽게 해드리는 죄를 피하지 아니하고 호소하는 주문(奏文)을 누차 거듭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마음을 두시고 신의 간절함을 굽어 살피시어, 멀리는 헌종황제께서 이미 시행하셨던 법식을 따르고 가까이는 형왕과 숭왕에게 베푼 전례를 비추어 해부(該部)에 특별히 명하여 곧바로 신의 어미의 관복을 아울러 지급하게 하소서. 그러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감격하고 기뻐할 것이니, 성상께서 옛 법식을 따르는 도리에 길이 신용이 있게 될 것이고 신이 근본에 보답하여 멀리 추모하는 예의에도 또한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만력 44년 11월 4일 배신(陪臣) 의정부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와 〈공조 판서〉 유간(柳澗) 등을 〈차임하여〉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서 올리게 합니다."
하였다. 【민형남(閔馨男)의 행차에 은(銀) 1만여 냥을 싸가지고 가서 고면(誥冕)을 겸하여 청하게 하였는데, 허균(許筠)이 그 절반을 도용(盜用)하였다. 예부(禮部)에서 뇌물이 적은 것을 혐의로 여겨 허락을 하지 아니했다. 이 때에 이르러 다시 1만 수천 냥을 가지고 갔는데, 모두 역관(譯官)의 무리들이 예부의 낭리(郞吏)들과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527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25]
○丙辰十一月初四日辛未遣使申請恭聖王后冕服。 其奏曰: "謹奏爲更陳危懇, 乞蒙恩命事。 先該萬曆四十三年六月十二日, 謝恩陪臣尹昉等回自京師, 齎捧到追封臣生母金氏誥命。 欽此欽遵除將小邦應行事例奉行外。 只緣所有冠服, 未蒙欽賜, 臣不勝悚缺之懷, 再封瀝血之疏, 冒達宸陛, 專候旨下, 迄至于今, 尙稽成命。 玆敢更煩叫號於父母之天。 臣伏念, 追封之與生封, 均是寵典, 誥命之與冠服, 原非兩物, 有封爵則有誥命, 有誥命則有冠服。 未有命以爵而無其章, 受其封而欠其服者。 竊査先該成化十一年, 臣祖康靖王臣諱, 請追封其生父及母, 欽蒙憲宗皇帝准許, 竝賜誥命、冠服。 又該成化七年, 憲宗皇帝冊封臣先祖【臣諱】妃尹氏竝賜誥命、冠服。 厥後列聖於小邦封典之擧, 率皆如是。 斯乃小邦之世荷備物之賜, 輝映前後者也。 欽我皇上, 惻念微臣顯親之私悃, 篤推聖明錫類之孝理, 先之以勅諭, 繼之以誥冊, 特賜准封, 誕降渙號, 殊恩聖渥, 洋溢海隅。 而獨此冠服, 猶未竝頒, 一國臣民, 欣幸感激之餘, 猶以有異舊例爲言。 況臣爲子之至懇, 寧不倍於群情乎? 臣非不知今此追封之眷, 固出於非常之異數, 而冠服一節, 部科未肯便許者, 亦本於鎭重之義。 臣何敢更容溷聒於黈纊之下, 以覬未盡之恩典乎? 第臣區區一念, 只欲備蒙寵靈, 以致顯揚之道, 式繩先例, 以遂繼述之志。 設衣裳而申如在之誠; 陳物采而表盡倫之制, 玆乃臣之顒望雲霄, 罄竭肝肺者也。 邇者竊聞, 皇朝內藩崇王, 査引世宗皇帝准給荊王母妃壽氏冊命、冠服事例, 迄追封其生母, 朝廷憐其情願, 准許冊命、冠服云。 斯卽憲宗皇帝命給誥命、冠服於臣之先祖康靖王生母之盛典也。 前聖後聖, 可謂一揆。 卽目聖朝之字小邦, 無間內外, 欽賜勅諭, 每曰: "視同內服。" 又曰: "朕方錫類, 嘉與同文。" 其所以眷顧覆燾, 拯濟生成, 隆恩盛德, 古今未有, 天下無二。 臣嗣承先緖, 恪遵侯度, 玉帛贄獻之儀, 不後於中國冠裳之列。 則寧敢自外於聲敎之甸服乎? 玆欲竊比於內藩, 輒援荊、崇二王事例爲請, 禮固然矣。 情固戚矣矧今聖明建極, 王道無偏, 竝包率俾, 罔有遠邇, 則其於懷柔小邦, 又豈有彼此之殊乎? 臣敢恃蕃錫於旣往, 徼寵嘉於方來, 不避瀆擾之罪, 屢申號龥之奏。 伏願聖慈曲垂睿念, 俯察微悃, 遠遵憲宗皇帝成式, 近照荊、崇二藩典例, 特命該部, 便將臣母冠服, 竝許完給。 則幽明感悅, 存沒榮哀, 聖上率由舊章之道, 永孚于休, 而微臣報本、追遠之禮, 亦無所憾矣。 (萬曆四十四年十一月初四日, 差陪臣議政府左議政) 李廷龜、(工曹判書) 柳澗等齎進。 【閔馨男之行, 齎銀萬餘兩, 兼請誥冕, 筠盜用其半。 禮部嫌其賄少不許。 至是復齎萬數千兩而行, 皆譯舌輩與禮部郞吏分利者也。】
- 【태백산사고본】 38책 3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527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