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광해군일기[중초본] 102권, 광해 8년 4월 12일 신해 1번째기사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전한 이대엽 등이 비난을 받은 것으로 체차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전한 이대엽, 부응교 이정원, 교리 신광업, 부교리 임성지가 아뢰기를,

"종계가 다시 바루어지고 선왕의 무함을 시원하게 변론하였으니 실로 우리 나라 종사와 신민의 전에 없던 경사로 광국 공신(光國功臣) 때의 일과 전후가 한결같은 법도입니다. 그러한즉 대신이 된 자는 마땅히 올바른 의논을 올려 성대한 예를 빨리 거행해야 할 터인데, 심희수는 이랬다저랬다 말을 변환해가며 큰 경사를 엄폐하였으니, 이는 조종(祖宗)의 악명을 씻을 것 없다고 여긴 것이며 선왕에 대한 크나큰 무함을 변론할 것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대간이 한번 시비를 분별하여 심희수를 심하게 공격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은 단지 황제의 은혜를 영광되게 하고 조종을 위안하여 신인(神人)과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큰 경사와 사특한 논의는 단연코 서로 용납될 수 없으니, 사론(邪論)을 다 제거하지 못한 것으로 이끌어다 허물을 삼은 것은 언관이 과감하게 진달하는 체모를 깊이 얻은 것이요 한층 더 논의를 가하여 성상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란 것입니다. 무릇 혈기를 지닌 자라면 누가 감히 이 논의와 달리하겠습니까.

그저께 본관이 처치할 적에, 황칙(皇敕)이 교외에 도착하여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하니 속히 처치하라는 일로 상께서 누차 분부를 내리셨다고 정원이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몹시 급박한데 동료들은 모이지 않고 부제학 유숙, 교리 유활, 수찬 유여각은 모두 대간과의 상피 관계로 불참했기 때문에 단지 신 등만 회좌(會坐)하여 의논해서 초안을 한 건 작성하였습니다. 유효립도 하번 자리에서 또한 스스로 대간이 피혐한 내용을 베껴 썼으니 이는 대개 스스로 완석에 나와서 그 가부를 함께 의논하여 결정짓고자 한 것입니다. 또 옥당의 전례는 장관의 분부로 인해 각자 초안을 잡아서 완석에서 의논하여 가하면 채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채택하지 않는 것이 본래 있는 고사(古事)였습니다. 더구나 이제 동료들이 본관에 일제히 모여 상의해서 초안을 작성했은즉,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공론입니까, 사론(私論)입니까? 만약 이것을 사론이라고 한다면 효립이 저 혼자 방안에서 써온 것도 역시 사론입니다. 회의를 열어 의논을 결정할 때 초안잡은 것을 가져와서 효립으로 하여금 참관(參觀)하여 결정하게 하였더니, 효립이 발끈 안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대신을 삭직(削職)한 것만도 이미 과중한데 어찌 문외 출송까지 시킨 뒤에야 시원하게 여긴단 말인가. 내 뜻은 양사를 다 체차시키고자 하니 출사시키자는 의논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다.’ 하기에, 즉시 하리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이미 써놓은 좌목(座目) 중에서 지우게 하였더니 방안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본관의 옛 관례는 만일 이견(異見)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완석에서 나가 방으로 피하고 그외의 다른 관원은 제좌(齊坐)하여 그대로 처치를 해왔습니다. 어찌 한 사람의 다른 의견으로 많은 관원들이 뜻을 굽혀 따라서 체차해서는 안 될 언관을 모조리 체차시킬 수 있겠습니까. 거둥이 임박한 때에 큰 경사를 생각지 않고 반드시 대간을 다 체차시킴으로써 성대한 예를 망쳐서 황제의 칙서를 길에서 지체하게 내보려두고자 하였으니, 그의 의도는 현저하게 희수를 위해 옹호하려는 뜻이요 삼사를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입니다. 효립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매번 삼사에 들어올 때마다 경박하게 일 벌이기 좋아하는 것을 자기 일로 삼는단 말입니까. 전후 그의 본심은 갖가지로 다 드러났습니다. 만약 희수를 무죄라고 여기어 완전히 제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성왕을 어느 곳에 둘 것이며 성명을 어느 곳에 두려는 것입니까. 희수의 사론(邪論)이 일개 효립에게 전해져 끝내 우리 성명을 저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 일뿐만 아니라 그가 상소를 올릴 적에 스스로 대개에 쓰기를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 놓고는, 뒤늦게 옹호하는 자취가 환하여 가릴 수 없음을 염려하여 상소를 도로 가져다가 본문을 다 고쳐서 다음날 아침에 고쳐 써서 올렸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극히 교활하고도 참혹합니다. 신 등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현저하게 동료의 비난을 받았으니 태연히 직에 있으면서 다시 양사를 처치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의 직을 삭제하여 효립의 마음을 통쾌하게 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속히 처치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109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6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왕실(王室) / 외교-명(明) / 사법-탄핵(彈劾)

丙辰四月十二日辛亥典翰李大燁、副應敎李挺元、校理辛光業、副校理任性之啓曰: "宗系再正, 先誣快辨, 實我東方宗社臣民, 無前之慶, 與光國前後一揆, 則爲大臣者, 所當獻其正議, 亟行縟禮。 而喜壽反覆變幻, 掩蔽大慶, 是以祖宗之惡名爲不足雪, 以先王之厚誣爲不足辨。 臺諫之欲一辨別, 深攻喜壽者, 其意只在於榮皇恩、慰祖宗, 與神人而同慶者也。 大慶與邪論, 斷不相容, 則其以不得盡除, 引以爲咎者, 深得言官敢陳之體, 而是乃加一節論議, 冀回天聽者也。 凡有血氣, 孰敢異同於此論也? 再昨本館處置時, 皇勅到郊, 大駕將發, 速爲處置之事, 上敎累下, 政院催促, 而僚員未集, 事甚急遽。 副提學柳潚、校理柳活、修撰柳汝恪皆以臺諫相避不參, 只臣等相與會坐, 議構一草。 孝立則於下番房中, 亦自抄書臺諫避嫌頭辭, 蓋欲自出於完席, 通議其可否而定之也。 且玉堂前例, 因長官分付, 各自起草, 議於完席, 可則用之, 否則不用, 自是古事。 況今同僚, 齊會本館, 相議構草, 則未知其公耶私耶? 若以此爲私, 則孝立之自書房中, 是亦私也。 及其開席完議之時, 取來起草, 使孝立參看取舍, 則孝立勃然變色曰: ‘大臣削職, 旣已過重, 豈至於黜送, 然後爲快也? 鄙意則欲盡遞兩司, 出仕之論決不可參。’ 卽使下吏, 抹去其名於已書之座目, 走入房中。 本館古例, 如有立異者, 則出避房中, 其他員則齊坐, 仍爲處置。 豈可以一員之異議, 屈多官而從之, 盡遞不當遞之言官乎? 擧動臨迫, 不有大慶, 必欲盡遞臺諫, 壞敗盛禮, 使皇勅委滯於路左, 其意顯爲喜壽營護之志, 欲爲一網打盡之計耳。 孝立是何人, 每入三司, 浮薄喜事爲己任? 前後心迹, 種種敗露。 若以喜壽爲無罪, 不必盡除, 則置先王於何地, 置聖明於何地歟? 不料喜壽之邪論, 傳法於一孝立, 負我聖明也。 不唯是事, 其呈上疏, 自書大槪, 以非但論議不一云云, 追慮營護之迹昭不可掩, 旣呈還取, 盡改本文, 而翌日朝改書呈之, 其心所在, 極巧且慘矣。 臣等忝在論思, 顯被同僚之詆斥, 不可偃然在職, 更爲處置兩司。 請命鐫改臣等之職, 以快孝立之心。" 答曰: "勿辭, 速爲處置。"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109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6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왕실(王室) / 외교-명(明)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