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이 새 궁궐터 잡는 일에 관상감 제조 박홍구를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다
영의정이 아뢰기를,
"이번에 인왕산 아래에다 터를 잡는 일은 사체가 중대한데, 실로 그 말이 흠이 없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정부에 단지 기자헌 혼자만 있으니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좌찬성 박홍구(朴弘耉)는 관상감 제조이니, 그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성지(性智)는 미친 중으로, 스스로 지리(地理)에 대한 방서(方書)를 잘 이해한다고 하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언문으로 풍수(風水)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말이 예전 방술대로 하지 않아 괴이하고 어긋나서 가소로웠다. 그는 ‘인왕산은 돌산으로 몹시 기이하게 솟아 있으며, 또 인왕(仁王)이란 두 글자가 바로 길한 참언(讖言)이다. 그러므로 만약 왕자(王者)가 그곳에 살 경우 국가의 운수를 늘릴 수 있고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다.’고 떠들어 대었으며, 또 ‘국초(國初)에 사직단(社稷壇)의 터를 이곳에 잡은 것은 당시의 술사(術士)가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였다. 그러니 사직단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서 그 터에다 궁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임금이 편안하게 지내면 사직 역시 견고한 것이니, 마땅히 옮겨야지 무슨 의심을 둘 것이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크게 놀랐다. 이에 드디어 사단(社壇)의 담장 바깥에다 궁궐의 터를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제(社祭)에 쓰는 시루[甑]가 저절로 소리를 내어 그 소리가 1리 밖까지 들렸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궁궐의 터로 잡아 담장을 무너뜨리고 터를 닦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응험이라고 하였다. 인왕(仁王)은 석가(釋迦)의 미칭(美稱)으로 산에 예전에 인왕사(仁王寺)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었다. 성지가 일찍이 그의 어미의 뼈를 창원(昌原) 안골포(安骨浦) 불모동(佛母洞)에 장사지내고는 말하기를 ‘나의 후신(後身)은 부처가 될 것으로, 포와 동의 이름이 모두 그에 앞선 조짐이다.’고 하였다. 대개 불모동의 본이름은 ‘불못[火池]’으로 노야(爐冶)의 이명(異名)이었다. 동에 예전에 철로(鐵爐)가 있었으므로 ‘불못’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불모(佛母)’와 속음(俗音)이 비슷하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었다. 성지가 방서(方書)에 대해 모르므로 속설(俗說)로 꾸며대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 】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92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63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領議政意舍人啓曰: "今此仁王山下相基之事, 事體重大, 實未知其言之無欠與否。 而政府只有臣奇自獻極爲未安。 左贊成朴弘耉乃是觀象監提調, 使之同參爲當。 敢啓。" 【性智, 狂僧也。 自言能解地理方書, 而目不知文字, 以諺書論風水, 其言不依古方, 怪謬可笑。 倡言: "仁王山石山突起甚奇, 又仁王二字, 乃是吉讖。 若王者居之, 曆數可延而太平可興。" 又曰: "國初卜社稷基于此, 當時術士, 必有意見。 宜遷社稷於他所, 而卜宮其址。 君父享安, 則社稷亦固, 當遷何疑?" 聞者大駭。 遂卜基於社壇墻外。 先是, 社祭飯甑自鳴, 聲聞一里, 未幾卜宮, 壞墻拓址, 人以爲其應。 仁王釋迦之美稱也, 山舊有仁王寺故名。 性智嘗葬其母骨于昌原 安骨浦 佛母洞曰: "吾後身爲佛, 浦洞名, 皆先兆也。" 蓋洞本名火池, 乃爐冶之異名。 洞舊有鐵爐故名火池, 與佛母俗音相似, 故幻而稱之。 性智不曉方書, 故文以俗說, 皆此類也。】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92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63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