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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97권, 광해 7년 11월 17일 기축 6번째기사 1615년 명 만력(萬曆) 43년

능창군 이전의 졸기

이전(李佺)을 위리 안치된 곳에서 죽였다. 이 위리 안치에 나아가자 수장(守將)이 찬 돌방에서 자게 하고, 또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지어 주니, 이 먹지 못하였다. 그러자 수생(壽生)이라고 하는 관동(官僮) 한 사람이 옆에 있다가 항상 그가 먹던 밥을 나누어 올렸다. 수장이 그 일을 알고 관동이 그 안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하고 가시문 밖에 앉아서 먹도록 하였다. 관동이 몰래 과 약속하여 옷을 문 안에 펴 놓게 하고 관동이 때때로 숟가락에 밥을 떠 지나가면서 던져주면 이 한두 숟가락씩 얻어서 먹었다. 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하루 저녁에는 글을 써서 관동에게 부쳐 부모와 결별을 고하고는 관동이 문을 나서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런데 수장은 거짓으로 병이 들었다고 보고하고 곧이어 죽었다고 알리자, 왕이 겉으로 놀라고 괴이한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넌지시 유도한 것이었다.

은 호탕하고,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궁마술(弓馬術)이 남달리 뛰어나고 외모도 훤칠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참소하기를 "정원군(定遠君)에게 특이한 상(相)이 있고 그들이 사는 곳인 새문리(塞門里)의 집 부근에 왕성한 기운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을 시기하여 죽이고 그 집을 빼앗아 허물어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처음에 관동이 감히 의 편지를 내놓지 못하고 사합(沙盒)에 넣어 흙속에다 묻어 두었다가 금상(今上)이 반정(反正)한 후에야 비로소 올렸는데, 필적이 완연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날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왕이 이미 정원군의 집에 왕성한 기운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경덕궁 터로 삼았다. 】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3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殺于圍所。 旣就圍, 守將寢之石堗, 又以沙土雜炊飯飼之, 不能喫。 官僮名 一人在側, 常以其所啗飯分進。 守將覺之, 不許官僮飯其中, 使坐棘門外飯。 僮私與約, 密布衣裾於門內, 僮時以匙飯過擲, 得一二匙喫。 不勝苦, 一夕作書付官僮, 辭訣父母, 紿僮出戶, 自經死。 守將詐以病聞, 旋告訃, 王佯爲驚怪之狀, 實諷之也。 (豪爽有風, 度弓馬絶人, 相表瓌偉。 而或讒之王曰: "定遠有異相, 所居塞門里, 第有旺氣。" 王忌殺之, 奪其第毁之, 建慶德宮。) 初, 官僮不敢出其書, 藏以沙盒埋土中, 今上反正後始上之, 手迹宛然, 始知其諱日云。 【王旣聞定遠第有旺氣之說, 遂 其第, 爲慶德宮基。】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3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