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정인홍이 백성 규휼 등에 대해 차자를 올리다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이 상차하기를,
"신은 묵은 병이 아직도 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발병[足疾]이 또 나서 침으로 치료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겨우 조금 나았습니다. 그런데 부묘(祔廟)하는 대례(大禮)의 기일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부축을 받으며 길을 떠났으나 옥천(沃川)에 이르자 발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침과 약도 효험이 없어 이따금 머물면서 조리하느라 날짜를 허비해 결코 대례의 기일 안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죄가 더욱 커서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나라에 관계된 일로 불에서 구해내고 물에서 건져내야 하듯이 급한 것이 있는데, 신이 비록 절뚝거리며 성으로 들어가더라도 쉽게 용안(龍顔)을 뵐 수 없기 때문에 감히 먼저 글로 써서 아룁니다.
옛사람 중에 탑전에서 일을 다 아뢰고 나서 다시 문자로 올리겠다고 청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말이 문자로 자세히 다 아뢰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생각건대, 신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을 충성으로 여기고 임금은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덕으로 삼기 때문에 말을 비록 극진히 하더라도 반드시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 참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임금에게 돌아가지 않고 신하가 간언을 했다는 이름을 취한다면 이는 옛사람도 부끄럽게 여긴 바이니, 신하로서 말씀드리는 데에는 이처럼 쉽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삭고(削稿)의 고사(故事)057) 에 비하려고 할 뿐이니, 성명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듣건대, 날마다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정사의 방도를 강론하여 밝히는 것이 바로 임금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임금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자기의 의견으로 삼고 여러 사람의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아야지 하찮은 장구(章句)의 학문을 급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니, 이게 임금의 학문이 선비들의 학문과 같지 않은 점입니다. 더군다나 성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신데, 어찌 반드시 구두(句讀)를 배우고 강론을 들어야만 도움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자주 유신(儒臣)과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치술(治術)을 연마하면 보고 듣는 중외의 사람들이 기뻐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질병이 없으시어 정신을 가다듬어서 다스리기를 날로 더욱더 도모하고 계신다.’고 하면서 태평의 치세를 바랄 것이니, 이는 실로 유신(維新)의 정치로서 인심을 수습하는 급선무입니다.〉
삼가 가뭄의 혹심함을 보건대 근고에 없던 바로서 온 들판에는 싹이 하나도 없고 마을마다 짐승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하의 백성들이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이 타도 마시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온 동네가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있으니, 하늘을 부르며 원망하고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는 형상을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호서(湖西)의 남쪽 바다에 가까운 고을과 영남의 강좌(江左) 일대는 더욱 한 해 농사를 이루지 못해 백성들이 죽음을 모면하고자 해도 되지 않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가운데 절의(節義)를 조금 지키는 선비의 집안으로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 않는 자는 혹 부부가 함께 목을 매어 죽기도 하고, 어리석은 백성 중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하기도 하는 등, 백성들의 살길이 궁할 대로 궁해졌습니다. 그런데 호조에서는 또 재해를 입은 전답의 세금을 감면해 주지 말라고 청하여 전대로 하지하(下之下)의 세금을 거두고 있는가 하면 요역 역시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 전답이 황폐해져 이삭 하나나 한 다발의 곡식도 수확을 하지 못하였는데 여전히 옛날에 내던 세금의 수량대로 채워 받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란 말입니까. 공사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굶주림을 구제할 계책이 없어 가만히 서서 그들이 죽는 것만 보고 있으니, 백성들의 부모가 된 전하께서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구중 궁궐의 깊은 곳에 위를 편히 하는 계책을058) 을 올리지 않으니, 전하께서 어찌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음을 아실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수선(修繕)하라는 명이 또 내렸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별도의 준비가 있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뜻이 전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러나 나라의 용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물을 댄 땅은 이따금 잘된 곳도 있으나 이런 곳을 함께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해조로 하여금 재해를 입은 전지의 면세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거두고 응당 세금을 내야 할 땅을 다시 조사한 다음 이어 흉년을 구제하는 규정을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록 공가의 저축이 부족하더라도 편의에 따라 곡식을 옮겨서 백성들을 걱정하는 성상의 뜻을 분명하게 보이신다면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왕이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하면서 생기가 돋아나 굶주림을 잊게 될 것이니, 이것이 《역(易)》에서 말한 ‘성인이 인심을 감화시켜 천하를 화평하게 한다.’059) 는 것입니다. 1, 2년을 좀 더 기다려 천심(天心)이 다소 편안해져 재이가 소멸되고 흩어진 사람들이 조금 모여들어 민력(民力)이 다소 펴진 다음에 역사(役事)를 시작한다면 비록 빨리 하지 말라고 명하더라도 기한 내에 공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떠날 때에 성상의 분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역적이 또 일어나 나랏일이 위급하다.’고 하신 말씀이 있기에 신은 놀랍고 걱정이 되어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역적이 또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잇달아 일어났는데, 저 신경희(申景禧)는 충훈(忠勳)의 후손으로서 도리어 역모를 하는 무리가 되었으니, 그의 불충과 불효는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신은 전에 듣건대, 소명국(蘇鳴國)이란 자 역시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하였습니다. 이번에 그가 경희와 매우 친밀하게 사귀었기 때문에 경희의 역모를 알았고, 죄가 있어서 갇힌 후에는 죽음을 면하고자 하여 역모한 사실을 모두 고하였으니, 참으로 그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역변을 고하였지만 거짓으로 무고한 자도 이따금 있기 때문에 선왕께서 반좌(反坐)의 율을 엄하게 제정하였던 것입니다. 지난번 무함을 받은 몇 사람은 같은 날에 은혜를 입어 방면되어 나갔고, 고변한 자는 반대로 법의 집행을 받았으니, 이는 참으로 분명히 밝히고 신중히 처리하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않은 전하의 성덕(聖德)입니다. 전하께서 이런 정사를 금석(金石)처럼 굳게 견지하시어 비록 한 사람을 무고하더라도 중한 법을 적용해 용서하지 않는다면 전하의 밝음과 위엄이 깊이 서합(噬嗑)060) 의 상(象)을 얻어 후회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역적을 다스리려고 해도 역적을 다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난을 막고자 해도 난만 부르고 말 것입니다. 신이 마침 일이 많은 때에 명을 받고 왔는데 몸에 병까지 있어 중도에 지체하고 있으면서 지레 어리석고 얕은 소견을 진달하고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에게 병이 있어 중도에서 체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지없이 염려되고 서운하였다. 차자의 말은 마땅히 깊이 마음에 새기겠다. 다만 상소로 경계의 말을 해주는 것보다는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니, 경은 대죄하지 말고 조리한 다음 빨리 와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나의 바람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가뭄의 재변이 참혹하여 나 역시 두려워하고 있으니, 경이 오기를 기다려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좌상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유시하고, 차자 가운데 진달한 재해를 입은 전답의 면세 건과 흉년을 구제하는 등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착실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신경희는 평소 인홍에게 빌붙어 제자라고 불리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역적으로 죽었다. 인홍은 평생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아 모든 역적의 옥사에 관계된 것은 사실 여부와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일체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전후로 올린 상소나 차자가 매우 음참하였다. 그런데 유독 경희의 옥사에는 평번(平反)061) 하라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00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2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 구휼(救恤)
- [註 057]삭고(削稿)의 고사(故事) : 간절한 말로 간하다가 따라주지 않는 것은 두세 번까지 간해보고 나서 초고를 없애버린 이효백(李孝伯)의 고사를 말함. 《북사(北史)》 이효백전(李孝伯傳).
- [註 058]
위를 편히 하는 계책을 : 《주역(周易)》 췌괘(萃卦)에 나오는 말임.- [註 059]
《역(易)》에서 말한 ‘성인이 인심을 감화시켜 천하를 화평하게 한다.’ : 《주역(周易)》 함괘(咸卦)에 나오는 말임.- [註 060]
서합(噬嗑) : 형법(刑法)을 다스림.- [註 061]
평번(平反) : 원죄(冤罪)를 다시 조사해 공평하게 심리하여 가볍게 함.○乙卯九月十一日甲申左議政鄭仁弘上箚曰:伏以臣不獨舊病尙未瘡瘳, 足疾又作, 鍼治踰月, 僅得少差。 以祔廟大禮, 已有日期, 故扶曳登道, 行到沃川, 足痛復作。 鍼藥不效, 不免間或留調, 費了日字, 決不及大禮之期, 罪戾尤極, 只俟誅責。 又有事係國家, 如救焚拯溺之急者而臣雖跛躄入城, 又恐未易致身於違顔咫尺之地, 故敢先具文字以聞。 古人有奏事榻前畢, 仍請更以文字進者, 以口說, 不如文字之詳盡故也。 且念人臣以進言爲忠, 國君以納言爲德, 故言雖盡, 未必可行。 而言苟不行, 美不歸上, 臣取其名, 是亦古人之所恥, 人臣進言之不易, 有如此者。 此臣所以只欲竊比於削藁之故事而已, 惟聖明垂察焉。 臣聞日接儒臣, 講明治道, 乃國君之所先。 (夫人君者, 以衆人之見爲見, 以衆人之知爲知, 區區章句之學, 非人君所急, 其學與韋布不同者此也。 況聖學高明, 豈必句讀講說而後, 有所資益也? 若頻與儒臣, 討論經史, 研精治術, 則中外見聞欣欣然曰: "吾王庶幾無疾病, 勵精圖治, 日復一日", 想望太平之治, 此實維新政理, 收拾人心之先務也。) 竊見旱荒之酷, 近古未有, 千野不苗, 萬井無禽。 殿下之赤子, 不但饑不得食, 渴不得飮, 至於擧一村以就水, 其呼天怨咨, 流移困苦之狀, 有不忍見聞。 而湖西南近海之邑、嶺南之江左一帶, 三務尤不成, 民惟救死不得, 只待溝壑而已。 其中士家之稍守節義而不欲苟生者, 或夫婦俱縊, 愚民之不子者, 或棄子而逃, 生民之理窮矣。 而版曹又請不許災陳, 依舊收下下之稅, 徭役亦復如舊。 噫! 土田荒蕪, 無一穗一穧之收, 而猶取盈舊稅之數, 此何理也? 公私俱渴, 賑飢無策, 只得立視其死, 殿下爲民父母, 將何以爲心也? 九重深遠, 安上之圖不進, 殿下豈知民窮至此極也? 民窮此極, 而繕修之命又下。 殿下雖別有措備, 不煩於民, 其如了無畏天威之意何? 然國計不可不慮, 則引水之地, 往往有稍可者, 此不可比而同之。 伏願殿下急令該曹, 收不許陳災之令, 覆審應稅之地, 仍擧救荒之規。 雖公儲不敷, 隨宜移粟, 明示憂民之聖意, 則百姓欣欣然曰: "吾王之愛民如子。" 有其蘇之氣而忘其飢矣。 《易》所謂‘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者, 此也。 少待一二年, 天心少豫, 災異消絶, 流亡稍集, 民力稍紓, 然後乃擧經始之役, 則雖命使勿亟, 功成不日矣。 臣臨行而祗受聖旨, 有曰: "逆賊又起, 國事危急。" 臣驚駭憂慮, 無以爲心。 逆賊踵起, 又出於搢紳之間。 彼景禧以忠勳之種, 反爲謀逆之黨, 不忠不孝, 萬死無惜。 但臣曾聞鳴國者, 亦不得齒人數中久矣。 今與景禧, 交親甚密, 故知景禧謀逆, 及其有罪囚係後, 覬免其死, 凡告逆實, 則固可饒其罪。 告逆, 而虛誣者, 往往有之, 此先王所以嚴反坐之律也。 頃者被誣若干人, 同日蒙恩放出, 告者反伏典刑, 此誠殿下明愼不留之聖德也。 殿下執此之政, 堅如金石, 雖誣一人不實, 輒置之重典而不貸, 則殿下之明威, 深得噬嗑之象而無悔矣。 不然求以治逆, 而逆不可勝治, 求以弭亂, 而適足以致亂也。 臣之赴命, 適値多事之時, 身又有病, 中道滯留, 未及命徑陳狂淺之見。 伏地待罪。 取進止。 答曰: "省箚, 知卿有疾, 留滯中路, 不勝憂慮缺然。 箚辭當體念。 第惟陳戒, 不如面對, 卿宜勿爲待罪, 調理亟來, 用副予側席之望。 旱災之慘, 予亦兢惕, 待卿之來, 商議處之。" 仍傳曰: "左相處遣史官諭之。 箚中所陳陳災、救荒等事, 令該曹着實擧行。" 【申景禧素附仁弘, 稱爲弟子, 至是以逆死。 仁弘平生以討逆自任, 凡干逆獄, 不問虛實枉直, 一切欲誅鋤之, 前後章箚, 極其陰慘。 獨於景禧之獄, 力持平反之論。】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00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2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 과학-천기(天氣) / 농업-농작(農作) / 구휼(救恤)
- [註 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