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현의 문서를 가져오고 현감 윤공을 잡아가두다
중사(中使)와 선전관(宣傳官)이 봉산현(鳳山縣)의 문서를 수색하여 가지고 오고, 〈가도사(假都事) 심달(沈闥)이〉 현감 윤공(尹珙)을 잡아다가 가두었다. 【신경희(申景禧)가 신문에 임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백령 첨사(白翎僉使) 윤숙(尹璛)과 봉산 군수(鳳山郡守) 윤공(尹珙)이 그의 일족 변제원(卞悌元)·변충원(卞忠元)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윤숙으로 하여금 군사를 배 안에다 숨겨 싣고 서강(西江)에 있는 허욱(許頊)의 정자 아래로 가서 정박한 다음 대비를 빼내오고 인성군(仁城君)의 어린 아들을 안아다가 몰래 섬에 체류하면서 옹립하고자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황신(黃愼)·남이공(南以恭) 등이 방금 해서(海西)에 귀양가 있는 중이므로 하나의 조정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이이첨에게 전하여 엄히 방비하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신이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고 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또 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왕이 이이첨을 불러서 그 사실을 물었는데 이이첨이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방으로 나가 체포하는 바람에 옥사가 매우 만연되었다. 신경희는 형신하는 동안에 다섯 번이나 역변(逆變)을 고해 죽음을 늦추고자 하였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윤길(尹趌)·양시진(楊時晉) 역시 신문을 받다가 죽었으나 끝내 자복한 자가 없었고 소명국(蘇鳴國)은 보방(保放)되었다. 윤길은 간사하고 음험하였으나, 신씨(申氏)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이이첨과 체결할 수 있었는데, 오로지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경희는 윤길을 심복으로 삼아 더욱 사납게 날뛰었는데, 그가 형을 받아 죽자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경희가 곤장을 맞을 때마다 매양 크게 외치기를 "신은 역적을 토벌한 자입니다. 대북(大北) 사람들은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역적질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어찌 신이 하였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묻기를 "대북 사람 중에 노예가 된 자가 누구인가?" 하니, 경희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24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乙卯九月初七日庚辰, 中使、宣傳官, 鳳山縣文書搜來, 假都事沈闥罪人 縣監 尹珙拿來 囚。 【申景禧臨訊上言: "曾聞白翎僉使尹璛、鳳山郡守尹珙, 與其族卞悌元、卞忠元等, 謀爲大逆。 欲令璛藏兵海船, 來泊西江 許頊亭下, 挑出大妃, 懷抱仁城君 幼子, 潛滯島中立之。 則黃愼、南以恭等, 方謫海西, 可辦一朝廷云。 臣以此言, 傳於李爾瞻, 欲嚴加防備, 此皆臣爲國效忠之事。" 因此又起一獄, 王召問爾瞻, 爾瞻對以不聞, 然逮捕四出, 獄事甚蔓。 景禧在刑訊中, 凡五上逆變, 冀以緩死, 皆不遂而竟斃於杖下。 尹趌、楊時晉, 亦被訊而死, 卒無承服者, 鳴國得保放。 趌姦細險毒, 以附婚申氏, 故得締交爾瞻, 專以構害善良自任。 景禧得趌爲爪牙, 益鴟張, 及其刑死, 人不以冤。 景禧受杖, 每大呼曰: "臣是討逆者也。 大北人雖奴隷, 無一人爲逆賊者, 豈臣爲逆乎?" 王問曰: "大北人爲奴隷者, 誰耶?" 景禧不能對。】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96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424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