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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94권, 광해 7년 윤8월 14일 무오 6번째기사 1615년 명 만력(萬曆) 43년

신경희·양시우·김정익 등을 잡아가두게 하다

전교하기를,

"신경희(申景禧)·양시우(楊時遇)·김정익(金廷益)·소문진(蘇文震)·김이강(金以剛)·오충갑(吳忠甲)을 속히 잡아가두라. 윤길(尹趌)을 잡아가두고, 신경희의 종 춘경(春景)을 포도청으로 하여금 속히 체포하게 하라. 소명국(蘇鳴國)을 각별히 치료하고, 신경희는 다른 옥사에다 단단히 수금하고 잡인을 엄금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라. 이후로 만일 삼가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금부의 당해 낭청을 잡아다 국문할 것이다."

하였다.【경희는 신잡(申磼)의 아들로서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였는데, 당론(黨論) 만들기를 좋아하였다. 부형의 세력을 이용하여 정인홍·이이첨의 무리와 친하게 지냈고, 또 그의 숙부 신입(申砬)의 장녀가 왕자 신성군(信城君)의 부인이 되었고, 차녀가 이대엽(李大燁)의 처가 되었는데, 경희가 이로 인하여 궁액(宮掖)과 왕래하면서 당시의 무리와 결탁하여 기염이 대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어리석고 음험함을 겁내었다. 명국(鳴國)은 익산(益山) 사람으로 나덕윤(羅德潤)·김우성(金佑成) 등과 결당하여 사류를 배척하고 모함하였는데 위인이 흉패하고 불측하였다. 처음에는 유영경(柳永慶)·김대래(金大來) 등을 섬겨 극력 인홍을 공격하다가, 영경이 실패하자 다시 경희와 함께 이첨의 복심(腹心)이 되어 영경의 무리를 다시 공격하였다. 황덕부(黃德符)와 함께 이첨을 아첨하여 섬기니 사람들이 소황(蘇黃)이라고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경희와 명국이 무슨 일로 인하여 혐원(嫌怨)을 맺게 되었다. 윤길(尹趌)과 양시진(楊時晉)은 모두 호남 사람으로 본래부터 명국의 사람됨을 미워해 왔는데 모두 이 당시 당인(黨人)으로서 함께 경희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윤길은 또 경희의 숙부 신할(申硈)의 사위였는데 이런 관계로 인하여 경희와 함께 명국을 죽일 것을 모의하고 그의 음행(淫行)을 들추어내 아뢰어 가두게 하였는데, 명국이 마침내 옥중에서 역모를 상변(上變)하였다. 그 내용의 줄거리는, "경희가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신성군의 부인은 천성이 호걸스러워 여중남자(女中男子)이다. 그의 계사(繼嗣)는 정원군(定遠君)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인데 활솜씨 말타는 솜씨가 뛰어나고, 배우지 않고서도 글을 잘한다. 윤길이 명운(命運)을 잘 점치는데 일찍이 전(佺)의 녹명(祿命)은 40년간 치평의 군주가 될 명운이라고 하였다. 지금 동궁이 아들이 없고 척리(戚里)의 운이 다하였으므로, 운수가 당연히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이 바로 영웅이 부귀를 도모할 때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들은 뒤부터는 경희가 불궤(不軌)의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서 발길을 끊고 만나지 않으면서 상변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경희가 신을 죽여 입을 막고자 하여 부첩(父妾)을 간음하였다는 말을 만들어내어 그의 문객인 지평 양시진과 사촌인 장령 윤길을 시켜 군상을 속이고 무함하여 논척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평소 능창군 전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온데다 또 정원군의 새문동(塞門洞) 사제(私第)와 인빈(仁嬪)의 선영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해 왔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크게 놀라 밤중에 옥사를 일으켰다. 경희는 창황하여 이첨에게로 가서 의논하니 이첨이 서로 구원해줄 것을 허락하였는데 금군(禁軍)이 이첨의 집으로 가서 경희를 체포하였다. 경희가 공초하였는데, 그 대개에 "신의 아비는 이산해(李山海)와 계책을 정하여 주상을 옹립한 공이 있고, 신은 또 정인홍의 고제(高弟)이자 이이첨과 마음을 통하는 벗입니다. 항상 역적을 토죄하는 것으로 충성을 다하는 계책을 삼아왔는데, 어찌 스스로 모역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명국과 대질을 시키도록 하였는데, 명국은 교활하고 구변이 있어서 그가 일찍이 경희와 친밀하게 지낸 정상을 다 말하고, 함께 논했던 시사와 들었던 말들을 방증으로 낱낱이 거론하고, 또 말하기를 "경희가 신과 이토록 친하게 지냈는데 만일 신이 그의 역변을 발설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토록 신을 죽이려 했겠습니까?" 하였다. 경희는 대질하여 변명하면서 여러 번 궁색함을 당하였다. 대체로 경희는 이미 명국과 친밀하였고 또 권세를 크게 과시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전(佺)의 위인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명국이 주워 맞추어 가지고서 겁박하고 또 평소 시사를 비방한 말을 들어서 증거를 삼았다. 왕이 더욱 노하여 명국의 말을 믿고서 마침내 엄히 신문할 것을 명하였다. 이첨의 무리는 평소 역적 토죄로써 일을 삼아 유(柳)·박(朴)의 무리가 제대로 대항치 못하였는데, 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승종(朴承宗)이 추관이 되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역적이 과연 가까이에[邇]055)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첨과 알력이 생기고 그들 당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418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

  • [註 055]
    "역적이 과연 가까이에[邇] : 이(邇) : 이이첨을 가르키는 것

○傳曰: "申景禧楊時遇金廷益蘇文震金以剛吳忠甲, 急速拿囚。 尹趌拿囚, 申景禧 , 令捕盜廳急速跟捕。 蘇鳴國各別着實救療, 申景禧別間堅囚, 雜人嚴禁, 使不得相通言語。 今後如有不謹之事, 禁府當該郞廳拿鞫。" 【景禧, 之子也。 以蔭入仕, 好爲黨論。 以父兄之勢, 爲仁弘爾瞻輩所親厚, 且其叔長女, 爲王子信城君夫人, 次女爲大燁妻, 景禧因此交通宮掖, 締結時輩, 勢焰張甚, 人皆畏其愚險。 鳴國, 益山人, 與羅德 金佑成等結黨, 排陷士類, 爲人兇悖不測。 初事柳永慶金大來等, 力攻仁弘, 及永慶敗, 復與景禧腹心, 復攻永慶之黨。 與黃德符, 諂事爾瞻, 人謂之。 及是, 景禧鳴國, 因事構嫌。 尹趌楊時晉, 皆以湖南人, 亦素 鳴國爲人, 而以俱是時黨, 同爲景禧門客。 景禧 之壻也。 因與景禧, 謀殺鳴國, 發其淫行啓囚之, 鳴國遂從獄中上變。 槪曰: "景禧嘗謂臣言: ‘信城夫人, 天品豪傑, 女中男子。 其繼嗣定遠第三子綾昌君 , 弓馬絶倫, 不學而能文。 善推命, 常云: 「祿命, 當爲四十年治平主。」 目今東宮無子, 戚里運盡, 曆數當歸於此。 此政英雄圖富貴之秋也。’ 臣自聞此言, 景禧有不軌之心, 絶跡不相見, 欲爲上變。 故景禧欲殺臣滅口, 做出淫蒸父妾之說, 使其門客持平楊時晉、四寸掌令尹趌, 欺罔誣論"云。 王素聞 綾昌君 相表異常, 又聞定遠 塞門里第及仁嬪先壠有王氣, 心常疑之, 疏入大驚, 夜半獄起。 景禧倉皇, 詣爾瞻議, 爾瞻許相救解, 緹騎就爾瞻家, 捕景禧 詰理景禧供槪曰: "臣父與李山海等, 有定策援立主上之功, 臣又是鄭仁弘高弟, 李爾瞻心朋。 常以討逆爲盡忠之計, 豈有自爲謀逆之理?" 王使與鳴國面質, 鳴國狡猾有口辯, 極言其曾與景禧親密之狀, 凡所與共爲時論, 參聽傍證, 無不歷擧。 且言: "景禧與臣, 相厚如此, 若非臣欲發其逆言, 渠何故遽欲殺臣至此乎?" 景禧對辨屢屈。 蓋景禧旣與鳴國親密, 又好誇大權勢, 亦嘗言之爲人, 故鳴國掇拾把持以劫之, 又擧平日誹時事之言, 以爲證。 王益怒而信之, 遂命嚴訊爾瞻之黨, 素以討逆爲事, 之黨, 不能抵當。 及景禧獄起, 朴承宗爲推官, 揚言曰: "逆賊果在邇也。" 因此軋爾瞻, 其黨大懼。】


  •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32책 418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