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균관사 이이첨이 무계 서원 건립 비용의 부조회문에 대한 하교에 대해 아뢰다
지성균관사 이이첨이 아뢰기를,
"서원(書院)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기자헌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무계 서원(武溪書院) 건립 비용의 부조회문(扶助回文)을 보고 스승을 존모하는 여러 선비들의 아름다운 뜻을 가상히 여겨 다시 달리 생각한 일이 없었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고 비로소 과연 그러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도성과 가까운 곳에 중들의 암자도 있는데 이 또한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라고 말하나 이것 역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판부사 심희수와 우의정 정창연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앞서 사대부들에게서 나온 회문을 보니 이는 곧 무계 서원 건립 비용의 부조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많은 선비들이 스승을 존모하는 일에 관계되고 또 그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에 미처 달리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과연 그러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을 뿐, 자못 일정한 말이 없었습니다. 어진이를 높이고 도를 지키려는 많은 선비들의 정성이 장차 이로 인해 중지되어야 하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의 도덕에 대해 그 경중과 천심을 후학들이 헤아릴 바는 아닙니다마는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의리(義理)를 천명하여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일맥정기(一脈正氣)가 오히려 마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분의 힘입니다. 선비들이 이분이 남긴 자취를 추앙해서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조용히 수양하며 귀의할 곳을 삼고자 하는 것은 대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도성 근처에 서원을 건립하는 것을 전례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유선(儒先) 숭배하는 것은 도리어 승려들의 잡배가 그의 술업을 숭신하는 것만도 못하여, 정토(淨土)·향림(香林)·승가(僧伽)·도성암(道成菴) 등의 사찰은 도성밖 10리 이내에 연접하였으되 일찍이 한 사람도 이에 항거하는 글을 올려 그 사찰을 헐거나 부처를 불사르는 일이 없었는데, 유독 유현(儒賢)의 향화를 받드는 곳에 대해서만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저지하려 든단 말입니까. 비단 이것뿐만 아닙니다. 두 관왕묘(關王廟)는 도성 밑 동쪽과 남쪽에 인접해 있고, 안일(安逸)·자수(慈壽)·인수(仁壽)도 모두 부처를 받드는 사찰인데도 도성 내외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어찌 지역의 원근으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거사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무계는 북성(北城) 밖 조지서(造紙署) 위에 있는데, 지정한 곳은 승가사(僧伽寺) 근처로서 도성과의 거리가 자못 7, 8리가 넘습니다만 혹시라도 가깝다고 말할까 염려되어 지금 10리 밖으로 개정하려 합니다.
물력(物力)에 대해서는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전례에 의하여 경외(京外)에 회문(回文)을 내어 사대부와 선비들이 각각 능력에 따라 공역의 비용을 돕게 한다면 어찌 공가(公家)에 폐를 끼칠 일이 되겠으며 어려움이 많은 시기에 해를 끼칠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국가의 저축에 여유가 있다면 이와 같은 건립에는 권장하여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 선비들이 스스로 판출하여 하는 일을 또한 쫓아가 말린단 말입니까. 더구나 성상께서 하문하신 것이 실로 전례를 경계하고 재력을 염려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대답하신 말씀이 하문하신 것과 달라 많은 선비들의 큰 기대를 저버리고 유도를 숭상하는 성치(聖治)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신들의 구구한 소견을 아뢰지 않을 수 없으니, 속히 너그러운 허락을 내려 중외를 위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건립할 곳을 다시 정하도록 하고 뒤에는 준례로 삼지 말게 하라."
하였다. 【조식(曺植)이 정인홍으로 〈제자를 삼았기 때문에〉 그 스승이 흉도(兇徒)의 추존하는 바가 되어 서원을 건립하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그 혼백 또한 수치스럽고 분개하여 도망칠 것이다. 자헌의 의논에 "도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중들의 암자 같은 것도 있다."고 한 말은 몹시 모욕하는 말인데도 이첨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정토·승가·안일·자수 등의 사찰을 들어 증거로 삼으니, 또한 그 약간 영리하고 크게 혼암한 것을 볼 수 있겠다.〉 도성과 매우 가까운 곳에 무리들을 널리 취합하는 곳을 만들려 하자, 왕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이 계사가 있었다. 】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365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乙卯二月二十五日壬寅知成均館事李爾瞻啓曰: "書院事議于大臣, 則領議政奇自獻以爲: ‘臣頃見武溪書院役需(出)扶助回文, 且嘉多士尊師之美意, 不復致念於他, 伏覩聖敎, 始覺其果然, 而亦不敢知其何如也。 或以爲: 「都城至近地, 如僧人菴子, 亦或有之, 此亦何妨?」 云云, 亦不敢知其何如也。’ 判府事沈喜壽、右議政鄭昌衍以爲: ‘臣頃見搢紳間所出回文, 乃武溪書院役需(出)扶助事也。 事係多士尊師之擧, 且嘉其意, 未及(思)他念, 伏覩聖敎, 始覺其果然, 而臣等亦不敢知其何如也。 伏惟上裁。’ 大臣之意如此, 而殊無一定之言。 多士尊賢、衛道之誠, 將因此而中廢耶? 先正臣曺植道德, 輕重淺深, 非後學所可窺測, 而扶綱常、闡義理, 雖至于今日, 而一脈正氣, 尙不泯滅者, 皆此人之力也。 其爲士子者, 景仰遺縱 蹤, 營建祠宇, 欲爲藏修依歸之地者, 蓋出於此也。 若以都城近地, 建立書院, 謂無前例云, 則其 甚不然。 我國之人尊尙儒先, 反不如緇徒雜類, 崇信其業, 淨土、香林、僧伽、道成菴等刹, 連甍接逕於城外十里之內, 曾無一人封章抗疏, 毁寺焚佛, 而獨於儒賢俎豆香火之所, 量其地步遠近, 而防塞之耶? 非但此也, 關王兩廟, 逼在城底東南, 安逸、慈壽、仁壽, 亦皆奉佛之宇而布列都城內外, 豈可以地之遠近, 停此斯文之盛擧也? 所謂武溪, 在北城外造紙署上, 而所卜之地則乃僧伽寺近處, 去京城殆過七八里, 而恐或猶以地近爲言, 今將改卜於十里之外矣。 物力則依道峯書院舊例, 通京外出回文, 搢紳、韋布各隨其力, 以助工需, 又豈有貽弊於公家, 有害於時屈乎? 設令國儲有裕, 則如此營建, 似可勸助, 而多士自辦所爲, 又從而止之耶? 況自上垂問, 固出於徵懲前例, 慮財力之盛意, 則不宜所答, 失其所問, 以孤多士之顒望, 而疵尙儒之聖治也。 臣等區區所見, 不得不啓, 亟下聖兪, 以慰群情何如?" 答曰: "建立處所, 更爲定奪, 後勿爲例。" 【曺南冥 植 以 (鄭)仁弘 (爲弟子之故)師, 爲兇徒所宗 尊, 至(於)建(立)書院, (死者有知, 則魂亦慙憤而走矣。 自獻之議以爲: "都城至近地, 如僧人菴子, 亦或有之。" 云者, 此甚辱之之言, 而爾瞻不覺, 反擧淨土、僧伽、安逸、慈壽等處以實之, 亦見其小狡而大暗也。) 於京城至近之地, 以爲廣聚徒黨之地, 王疑其有弊端, 命議大臣處之, 故有此啓。】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365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